매혹당한 사람들
토머스 컬리넌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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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매혹당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 사람이 아주 매력적이라면 다르다. 이 소설 속 존 맥버니 북군 병사는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는 젊고 잘 생겼다. 이것만으로도 외딴 곳에 살고 있는 소녀들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는데 여자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 제3자가 보기에는 왜 이런 인물에게 넘어갈까 하는 의문이 있지만 그 시대와 환경과 조건들을 감안하면 충분히 수긍할만하다. 그 조건 중 하나가 숲 속 외로이 떨어져 있는 판즈워스 여학교와 그곳에 머물고 있는 여선생들과 여학생들이다.

 

이 소설은 재밌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번갈아 가면서 화자로 등장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것도 흥미롭지만 낯설지 않은 설정이다. 여기에 대부분의 내용이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 각자의 의견을 풀어놓을 수 있게 만들었다. 이 방식 때문에 하나의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감정 변화나 상황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작가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신 등장인물들의 감정과 상황이 이야기를 살짝 비틀고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눈과 감정은 하나의 상황을 자신의 입장에서 뱉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처음에는 이 방식과 인물들의 이미지가 연결되지 않아 조금 힘들었지만 뒤로 가면서 완전히 적응했다.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존 맥버니는 단 한 번도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여자들만 화자로 등장하여 존에게 호감을 드러내고, 사랑을 표현하고, 그의 간질거리고 유혹적인 말을 전달한다. 그에게 매혹당한 사람들의 시선은 그가 들려주는 거짓말을 그대로 전달할 때조차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비밀을 그에게 스스럼없이 말한다. 이것이 또 하나의 자료가 되어 다른 여자를 매혹시킨다. 이 매혹적인 순환 구조는 불안불안하지만 존의 마법이 깨어지기 전까지는 유효하다. 그의 과감한 행동과 고립된 지역에서 살던 여학생들의 억눌려 있는 이성에 대한 갈망은 순간적으로 폭발한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다른 시대로 옮긴다고 해도 별 문제는 없다. 고립된 지역과 여자들만 있는 공간이란 설정만 만들어진다면 충분히 다른 내용으로 채울 수 있다. 화자들이 번갈아 등장하고, 대화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연극으로 만들어도 충분히 매력적일 것이다. 뭐 이럴 경우 불가피하게 꽤 많은 분량의 대사가 지워져야하겠지만. 또 이것을 반대로 만들 수도 있다. 고립과 남자들만 있는 곳에 매력적인 여자가 나타난다고 해도 될 것이다.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그 여자들의 눈빛과 손짓에 넘어갈지는 너무 뻔하다.

 

이 소설 속에 화자로 등장하는 여자들은 모두 여덟 명이다. 마사와 해리엇 판즈워스 자매, 하녀인 매티, 숲에서 부상당한 존을 데리고 온 어밀리아 대브니, 가장 나이 많고 이쁘지만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에드위나 모로, 가장 성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얼리샤 심스, 남부군 장군을 아버지고 두고 있는 에밀리 스티븐슨, 가장 어리고 활발한 악동 같은 마리 데브르 등이다. 각자의 출생과 환경에 따라 가지고 있는 포부가 다르다. 당연히 비밀을 가지고 있는 여자들이 적지 않은데 이것이 존을 통해서 하나씩 밝혀진다. 누군가에게 매혹되고,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안달인 사람들은 자신의 숨겨져 있던 욕망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것을 한정된 공간 속에서 멋지게 풀어내었다.

 

매혹의 마법은 한정적이다. 이해와 욕망이 충돌하면 그 마법은 깨어진다. 이 소설에서 분위기 반전이 일어나는 것도 이때다.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들과 순수한 사랑의 열정이 마주하는 순간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생긴다. 이 사고는 가면을 쓴 존의 본성을 밖으로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의 비밀이 폭발적으로 폭로되는 시발점이 된다. 그 이전에 살짝 흘러나왔던 이야기들이 하나의 진실로 굳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런 순간에도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파국은 정해져 있고, 언제 어떻게 터질지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몇 가지 이야기는 의문을 남기고, 그 마음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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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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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이란 단어 때문에 이사카 코타로가 SF를 쓴 줄 알았다. 워낙 다양한 장르의 문학을 다루는 작가이다보니 엉뚱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하지만 내용 일부를 놓고 보면 SF적인 상상력이 전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평화경찰이란 설정이 특히 그렇다. 물론 소설 속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마녀 사냥에 더 가깝지만 말이다. 최근의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점점 강해지는 감시사회의 모습을 감안하고 얼마 전 한국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것이 아주 비현실적이지만은 않다. 오락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가 이 부분까지 깊이 파고들지는 않지만 읽는 동안은 많은 것을 생각했다.

 

상황과 사건, 사고를 먼저 보여준 후 화자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 화자도 한 명이 아니다. 이런 시점의 변화는 독자로 하여금 다른 시각에서 이 사건들을 돌아보게 하고, 각 화자의 삶에 쉽게 다가가게 한다. 형사나 정의의 편이 이렇게 등장했다. 솔직히 처음에는 이 갑작스러운 화자 변경이 낯설었지만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현실을 좀더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화자의 설명이나 화자의 시각을 통해 사건들을 보면서 앞에 나온 많은 사건들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툭 던져놓은 듯한 사건 보고가 하나로 묶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설정은 바로 평화경찰이다. 이름만 놓고 보면 아주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지만 실제 이들이 하는 일은 일제 강점기의 그 유명한 특고들과 별 차이가 없다. 테러의 위험을 사전에 방지한다는 목적으로 사람들을 연행한다. 단순히 연행하고 조사만 한다면 문제가 적을 테지만 이들은 고문을 통해 없는 죄도 만든다. 당연히 이들에게 연행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테러범이라고 자백하고 단두대에 목을 올린다. 중세 유럽의 단두대가 현대에 나타나 공개처형 방식으로 시민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이때의 분위기는 화자의 시선을 통해 잘 드러난다. 상당히 끔찍한 처형인데도 일부 시민들에게는 흥분하고 즐길 유흥거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비현실적인 작가의 상상력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현대의 대학살이 너무 많다.

 

감시사회의 공포는 독재사회의 공포처럼 당사자가 아니면 쉽게 느낄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 소설 속 시민들은 평화경찰이 잡은 테러범을 그대로 믿는다. 경찰이 나쁜 짓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시각의 변화는 주변의 평범한 시민들이 잡혀가고, 처형되면서 시작한다. 작은 의심이 자라지만 이것을 입증할 자료가 없다. 한 개인이 이 거대한 공조직을 상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정의의 편이라고 불리는 히어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특히 히어로가 화자로 등장한 편에서 정의와 위선에 대한 갈등과 고민은 한번쯤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점점 관계가 복잡해지는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더.

 

평화경찰은 점점 흉악해지고 지능화되는 사회를 지킨다는 명목에서 만들어졌다. 선의에서 출발했지만 실제 이것을 기획한 인물과 그가 선택한 인물들의 특징은 가학성을 지닌 경찰일 뿐이다. 물론 정의감에 불타는 경찰이 없지 않겠지만 이 조직 안에서 이런 인물이 버텨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고? 고문하는 경찰을 보고 참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고문과 평화경찰을 보면서 한국 현대사가 떠오른 것은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 같은 유명한 말이 있는 나라니까. 아마 이때도 우린 소설 속 히어로 같은 인물을 바랐는지 모르겠다.

 

말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설정과 전개이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고문하는 장면을 외부에 알리겠다고 했을 때 그들이 보여준 반응은 조작된 정보라는 대응이다. 왠지 낯익은 장면과 설정들이다. 일본의 과거 속에서 찾아야 한다면 우리는 현재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장면들이다. 그래서인지 이 비현실적인 설정에 금방 빠졌다. 그리고 미스터리 같은 몇 가지 설정을 넣어 마지막에 한꺼번에 확 풀어버린다.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앞에 깔아놓은 복선과 설정들을 잘 엮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읽은 이사카 코타로였지만 역시라는 반응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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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섬니악 시티 - 뉴욕, 올리버 색스 그리고 나
빌 헤이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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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올리버 색스, 게이. 이 셋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올리버 색스가 동성애자란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마이클 잭슨이 누군지 몰랐다는 사실이다. 세계적인 뇌신경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그가 1980년대 이후 미국 팝의 아이콘이었던 그를 몰랐다는 것을 정말 그의 직업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첨단 기계 등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나의 일반적인 인식이 엇나갔다. 이렇게 나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바로 올리버 색스의 이야기들이었다. 그와 동시에 뉴욕의 풍경과 사람들이었다.

 

빌의 나이는 50대다. 불면의 밤을 보내던 그의 곁에서 연인이 심장마비로 죽었다. 평소처럼 불면 상태였다면 빠른 응급처치가 가능했겠지만 그날은 약으로 잠이 든 상태였다. 연인을 잃은 슬픔은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이 책 앞부분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이 상실과 이것을 잊거나 이겨내려는 몇 가지 노력을 다룬다. 하지만 이 상실감은 시간이 지나고, 올리브 색스와 연인이 되었을 때조차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이 상실감을 책 속에서 계속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삶은 언제나 계속 되고, 새로운 인연은 또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뉴욕에 온 그가 처음으로 흥미로워했던 것은 지하철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본 미국 영화 속 지하철 풍경과 다른 모습에 놀랐다. 저자 자신도 그렇게 말한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관찰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지하철 이동들이 떠올랐다. 그가 다른 것인지, 아니면 내가 다른 것인지,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가판대 알리 이야기나 택시 기사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그의 이야기 범위가 넓어진다. 책 곳곳에 실린 사진들은 그가 만나고 그 대상들에게 동의를 구한 후 찍었다. 출소 첫날이란 제목이 달린 사진을 보면서 어떻게 만났고, 그 사연은 어떻게 들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이야기들의 자세한 후기나 결말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관찰자로 기록자로 남을 뿐이다. 이것이 여운으로 남아 머릿속에 가끔 맴돌기도 한다.

 

동성애자의 기록이다 보니 사랑의 표현들이 나올 때 약간의 거부감을 느낀다. 아직 나의 이성과 감성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다. 불결하다는 느낌보다 어색하고, 나의 이미지가 투영되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리화나를 피우는 그들을 보면서 한국에서 마약으로 분류된 이 식물의 논쟁이 떠올랐다. 올리버 색스가 암으로 고생할 때 이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불법 마약 남용 죄책감이 마리화나 합법화로 사라졌다는 대목은 암 등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한국의 환자들을 떠올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다시 한 번 더 논의 대상이 되어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었으면 어떨까 생각한다.

 

뉴욕의 이미지가 나도 모르는 사이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 등에 의해 뒤틀리고 왜곡되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느낀다. 이 도시의 야경을 사랑하고, 자동차와 신호등의 붉은 물결을 보려는 노력 등은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책을 읽으며 도시에 대한 애정을 강하게 느꼈고, 다른 시각에서 뉴욕을 볼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고 올리버 색스가 빌을 만나기 전까지 오랫동안 성교를 하지 않았다고 했을 때 이 세계적인 뇌신경학자가 얼마나 동성애 혐오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의 실명보다 O라는 단어로 표시된 것이 단순히 간단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나중에 그의 성 정체성을 밝혔다는 대목에서 그 용기와 행동에 박수를 보냈다.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이 최근에 번역되었지만 아직 읽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연인이었던 빌의 기록은 다른 시각 속에서 그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옥스퍼드 사전을 찾는 모습이나 고전음악에 심취했다거나 포도주를 마시는 장면 등은 그의 문화적 취향이 잘 드러난다. 샴페인을 처음 따는 장면은 한 편의 코미디였다. 이런 기록들은 O의 권유로 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란 그의 고백에 동의하게 만든다. 실제 이 책의 꽤 많은 분량이 그의 일기다. 어떤 때는 한 줄이고, 어느 날은 몇 쪽에 달한다. 이런 기록들은 저자의 사랑과 인생과 일과 관심 등을 그대로 보여준다. 주기율표 사진을 보면서 이들의 사랑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다시 느꼈고, 올리버 색스의 책에 다시 눈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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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들의 성지 도쿄 & 오사카 - 아키하바라에서 덴덴타운까지 본격 해부
방상호 지음, 김익환 그림 / 다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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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덕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한때는 덕후 비슷한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덕후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나의 잡다한 관심사가 이런 깊이를 거부했다. 하나만 파고들기에는 욕심이 너무 과했다. 이것저것 보고 싶은 것, 읽고 싶은 것, 알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들로 인해 안타깝게도 덕후가 되지 못했다. 최근 십 년 동안 책에만 빠져 있는데도 그 분야가 잡다하다. 그 이전에는 영화에 미쳐 얼마나 많은 영화를 모으고, 보고, 읽고 했던가. 이 책을 선택한 것도 이 잡다함과 덕후에 대한 동경(?)이 섞여 있다.

 

일본는 덕후의 총본산과도 같다. 매니아와 덕후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나라를 꼽으라면 당연히 일본이다. 일본의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 등을 볼 때 이 덕후들은 아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보통은 하나의 표준화된 듯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최근에는 분야에 따라 조금씩 바뀐다. 요즘 많이 사용되는 키덜트라는 단어도 덕후의 한 모습이다. 며칠 전 출근길에 건담 매장 앞에서 줄서 기다리던 남자들 전부가 성인이었다. 40대 이상도 적지 않았다. 우리의 키덜트 시장의 한 모습을 그때 보았다. 이들이라면 이 책이 일본 여행을 위한 멋진 가이드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몇 년 전 도쿄 오다이바의 실물 크기의 건담 모형을 보고 좋아했다. 개인적으로 건담 시리즈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내가 본 몇 편의 건담 애니 때문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출퇴근길에 늘 건담 매장을 지나가면서 대충 보고 지나가던 나지만 말이다. 솔직히 말해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취향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있었다. 동시에 빠르게 변한 일본 매니아 시장의 모습도 확인했다. 2000년도 무렵까지 넘쳐나던 매장들이 많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직접 볼 수 있는 키덜트 문화의 위력은 여전히 압도적이라고 한다. 이 가이드북은 그것을 확인시켜주었다.

 

겨우 며칠 동안 머문 도쿄 여행 일정에 이 매장들을 둘러볼 생각을 못했다. 아니 몇 년 전에는 이 분야에 대한 관심도 정보도 부족했다. 아키하바라는 단순히 전자 매장으로 생각했고, 이케부쿠로는 드라마 때문에 웨스트게이트파크만 떠올랐다. 오다이바도 관광지 때문에 갔다가 겨우 건담을 찾았다. 아마 이 가이드북에서 유일한 답사였을 것이다. 물론 매장은 대충 봤다. 도쿄 타워는 그때 원피스와 결합하기 전이었다. 실제 본 타워는 올라가볼 생각을 못할 정도로 매력이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 속 도쿄 타워 이미지와 너무 달랐다고 해야 하나. 그때 원피스가 보였다면 생각이 조금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덕후의 세계는 넓고 깊다. 그 모든 것을 섭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분야별로 나눠질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저자가 발로 정말 많이 뛰어다녔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가 몇 가지 분야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일본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분야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애니와 만화와 게임에 집중하고 있다. 최근 인기작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추억의 작품들이 나오는 것은 반갑다. 예전 일본 마니아 문화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과 차이가 있는데 시대의 변화가 보였다. 도쿄 나카노와 오사카의 덴덴타운 같은 곳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낯설다. 그리고 교토 국제 문화 박물관은 우리집 근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요즘 뜸하다고 하지만 만화에 대한 열정까지 식은 것은 아니니까.

 

기본적으로 덕후들의 가이드북으로 잘 짜여 있다. 실제 덕후들이라면 이보다 더 깊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분야가 다른 사람은 실망할 수도 있다. 덕후가 아니라면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번쯤 일본 애니나 만화나 게임에 빠진 사람이라면 비교적 쉽게 갈 수 있는 일본 여행에 이곳을 한번쯤 둘러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다. 메이드 카페에 대한 환상이 일본 드라마를 보고 깨졌지만 수많은 만화책들과 피규어로 가득한 매장이라면 나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을 것 같다. 언제 혼자 일본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이 책이 좋은 참고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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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진짜 인생은
오시마 마스미 지음, 김난주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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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한 뻔한 전개와 결말이 아니다. 보통 소설을 읽을 때 너무 뻔한 전개와 결말로 힘이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은 완전히 나의 예상을 벗어났다. 물론 나의 예상이 나의 바람과 이전까지의 독서 경험이 합쳐진 것이지만. 그리고 세 명의 여인이자 작가가 들려주는 글쓰기와 삶에 대한 이야기는 ‘당신의 진짜 인생은’이란 질문과 맞물려 계속해서 나온다. 그 중심에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모리와키 홀 리가 있다.

 

‘비단 배’ 시리즈의 작가인 그녀는 이제 거의 절필 상태다. 이미 오래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아 글을 쓰지 않았다. 가끔 내놓는 수필의 경우도 그녀의 비서인 우시로 게이코가 쓴 것이다. 물론 이것은 대외적인 비밀이다. 이 비밀이 구니사키 마미가 홀리의 제자 겸 가정부로 오면서 드러난다. 비단 배의 후속편은 쓰지 못하지만 홀리가 살고 있는 집 안팎을 도맡아하는 그녀에게 소소한 일상을 적는 것은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다. 이 일도 그녀가 혼자 결정해서 한 것은 아니다. 홀리의 검사를 받아 내놓았다. 여기서 대필 작가와 문장에 진짜와 가짜가 어디 있냐는 문장론이 나온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소설가로 데뷔한 후 제대로 된 작품을 쓰지 못하는 마미가 홀로의 집으로 들어오면서 시작한다. 그녀를 처음 본 홀리는 비단 배의 고양이 처칠이라고 부른다. 졸지에 마미는 고양이가 된다. 자신이 우상으로 삼았던 작가의 제자가 된다는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이런 상황은 쉽게 적응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몰래 나간다. 이 사실은 안 홀리가 그녀를 데리고 오라고 편집자와 비서에게 말한다. 다시 돌아온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주 맛있는 고로케를 튀기는 일이다. 이 고로케는 마법을 부려 침체되어 있던 집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비단 배를 기다리는 많은 독자가 있지만 작가는 그 이야기의 꼬리를 잡지 못한다. 이제는 몸이 좋지 않아 글을 쓸 수도 없다. 왕성하게 집필할 당시 그녀가 번 돈으로 남편과 담당 편집자가 도박으로 상당한 돈을 탕진한다. 남편과 이혼을 하는데 돈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삶을 소모하던 남편을 구하기 위해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의 머릿속은 세속적인 감정만 들끓었다. 보통 사람의 감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후에 일어나는 몇 가지 에피소드는 이 돈과 연결되어 있고, 이것이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진다. 물론 이런 사건의 중심에는 처칠의 마법 고로케가 있다.

 

소설은 시간의 흐름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다 갑자기 1년의 시간이 지나간다. 이 흐름을 조용히 따라가면 그 앞에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세 명의 화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나이와 성격과 삶의 경험에 따라 다른 색깔을 보여준다. 이 차이가 이야기의 분위기를 극단적으로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그래서 주의하지 않고 있다 보면 누가 화자인지 잠시 깜박한다. 문체의 변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다 화자의 변경이라는 작은 변화가 현실의 벽을 뛰어넘어 다가올 때 새로운 가능성과 기대의 문을 연다. 나의 바람이 예상으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하다.

 

‘당신의 진짜 인생은’이란 물음에 특히 집착하는 인물은 우시로다. 특이한 이력과 대필 작가란 삶을 살아가는 그녀에게 진짜 인생은 하나의 화두다. 반면에 마미는 이것에 그렇게 억매이지 않는다. 이 차이는 두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재미난 장면이 하나 있다. 한 집에서 세 명의 여인이 각자 숨어서 글을 써는 것이다. 한 면은 베스트셀러 작가고, 한 명은 대필 작가고, 다른 한 명은 데뷔 후 바로 슬럼프에 빠진 작가다. 이후 지속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읽으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필 작가였던 우시로다. 그녀에게 새로운 삶이 열린 것이다. 이 변화가 오롯이 자신만의 역량으로 일군 것은 아니지만.

 

작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탓에 이전에 본 소설이나 드라마 속 작가가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마감에 시달리는 그들의 모습이 특히. 홀리의 전성기를 말할 때 이 장면들이 떠오른 것은 당연하다. 고로케의 마법이 가장 멋지게 발휘되는 장면도 이 과거의 회상 부분이다. 이야기 속에서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몇 가지 장면들이 있는데 이것이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이는 작용을 한다. 어떤 기대와 바람을 부채질하기도 한다. 내 예상이 다 깨어진 것도 이 부분들 때문이다. 느슨한 듯하면서 면면이 이어지는 이 소설,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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