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인간학 - 셰익스피어, 인간의 본성을 그리다
오다시마 유시 지음, 장보은 옮김 / 말글빛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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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브레히트의 무대는 특이하다. 배우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건다든가, 날카롭고 밝은 조명으로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든가 액션 중간 중간에 노래를 집어넣어 흐름을 끊는다든가 리허설 중에 대본의 말을 삼인칭이나 과거시제로 바꿔 쓴다든가 연출이 배우보다 더 큰 소리로 지시한다든가 등등



브레히트 무대의 이런 특이함은 의도적이다. 브레히트는 예술을 위한 예술에 반대했다. 그는예술은 정치적 행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이 정치적이 된다는 것은 현실을 보여주어 관객이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연극의 전통은 그런 생각하기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브레히트는 생각했다. 자신과 주인공을 동일시하면서 감정적이 된다. 그래서는 이성적으로 현실을 볼 수 없다.



브레히트는 무대와 관객을 띄워놓기 위해 기괴하달 수 있는 기법들을 개발해야 했다. 그래서 그의 기법을 거리두기 효과(소외효과로 잘못 번역되기도 하지만 거리두기가 맞다)라 한다.



“20세기 후반이 되면 브레히트는 그저 사실적 리얼리즘으로 남는다. 즉 일상생활을 2시간만 잘라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시점을 가진다. 이때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는다. 현대극은 바로 거기에서 오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모습을 전부 바라보려는 입장이었다. 인간을 전부 바라보고자 한 시점에서 이미 셰익스피어는 현대적이었다.”



그러면 저자는 셰익스피어의 무엇이 현대적이라는 것인가?



인간을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셰익스피어의 시선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시선은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눈, 당사자가 아니라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자유의 눈”이라 저자는 말한다.



샤일록의 말을 들어보자. “유대인은 눈이 없고 손이 없소? 오장육부가, 사지가 감각, 감정, 정열이 없단 말이오? 예수쟁이들하고 뭐가 다르오? 같은 음식을 먹고 칼로 찌르면 상처가 나고 같은 병에 걸리고 같은 약으로 치료하면 낫고 똑같이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데, 우리는 뭔가를 느끼지도 못한다고 하는 것이오? 찌르면 피 한 방울도 안나고 간질여도 웃지 않고 독약을 먹여도 우린 죽지도 않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아무리 심한 짓을 당해도 복수란 하면 안 된다는 것이오?”



샤일록이 자신의 정당성을 외치는 말이다. ‘베니스의 상인’ 공연을 보면 샤일록 역은 그 극단에서 가장 관록있고 연기력이 뛰어난 사람이 맡는다.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며 극중에서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렵고 비중이 커진 것은 셰익스피어가 극본을 그렇게 썼기 때문이다. 위의 대사처럼 유대인의 진실을 담았기 때문이다. 샤일록이 주인공이라면 ‘베니스의 상인’은 유대인 비극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시대는 반유대주의가 지배하던 시절이었고 셰익스피어 역시 유대인에게 동정적이지 않았다. 그러면 셰익스피어는 왜 그리고 어떻게 위와 같은 대사가 나올 수 있었고 샤일록 같은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는가?



“셰익스피어는 한 인물을 표현할 때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묘사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주인공은 자신의 의견을 대변하는 인물이고 악역은 그 반대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인간을 그려내는 방식은 샤일록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도 기독교인과 다를 바 없지 않느냐고 그의 내면에서 외치는 절규까지 묘사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무대에선 “그 어떤 조연이건 악역이건 간에 대사를 하고 있을 때는 주인공이라는 의식, 즉 나는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생각을 갖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극작가들은 주연에게만 초점을 맞추지 단역에게까지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는 왕이건 시민이건, 정원사이건 대사를 할 때는 세상의 중심에 잇다.”



그런 셰익스피어의 시선을 저자는 한발 물러서서 보는 눈, “리얼리즘의 눈”이라 말한다. “그 반대는 이상주의이며 인간의 좋은 부분만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하며 “부정적인 면을 냉정하게 비판하고 없애려 하지 않는다. 그런 면도 포함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것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셰익스피어의 사실주의는 그의 작품에 “인간미가 넘치는 따듯함과 재치”를 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리얼리즘과 유머의 일체화는 셰익스피어가 가진 큰 특징 가운데 하나다.”



저자는 ‘헨리 4세’에 나오는 폴스타프를 예로 든다. 헨리 5세가 되기전의 왕자 할의 술친구이다. “나쁜 짓이라면 워든 좋아하는 주제에 한편으로는 겁쟁이다. 그는 반란군과 맞서 싸워야 할 때 ‘술자리에는 가장 먼저 달려가지만 전쟁터에는 가장 마지막에 가지.’라는 대사를 남긴다. 이것이 리얼리즘이다.”



“전쟁터에는 가장 마지막에, 술자리에는 가장 먼저,

이것이 겁쟁이 무사와 식충이를 유지하는 비결이지.”



셰익스피어 당대의 연극을 지배했던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기사에게는 전쟁터에 가장 먼저 달려가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다.” 그러나 리얼리즘으로 그려진 기사 폴스타프는 관객의 웃음을 유도한다. “그는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인물 중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많다. 왜일까. 바로 유머가 있기 때문이다. 하는 말만 들어서는 허황된 소리만 하는 것같지만 그의 전체적인 삶을 보면 바로 같은 면이 많아도 결국엔 사랑스러운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셰익스피어의 진면목이다. 인간은 이상적인 모습뿐 아니라 어두운 면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셰익스피어식의 유머이다. 한발 물러서서 그 모든 걸 바라보면 사람이 다 이런 거지 하고 느낄 수 잇는 따뜻함, 바로 거기에서 유머가 생겨난다.”



저자는 셰익스피어의 리얼리즘은 그의 삶과 그의 시대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아버지는 읍장을 지낸 부유한 상인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두었기에 부잣집 도련님으로 유년기를 보낸다. 그러나 소년기에는 아버지의 파산과 함께 모든 것이 달라진다.



“유년기의 셰익스피어가 마을을 걷고 있으면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웃음을 보였다. 사람은 다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소년기가 되어 집안이 몰락하자 갑자기 모든 이들이 외면하고 등을 돌린다. 겉으로는 웃고 잇지만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에 내재된 인생관과 인간관은 ‘인간에게는 행복이 있으면 불행도 있다. 인간에게는 겉모습이 잇으면 속마음도 있다’라는 것이다.” 학자들은 그런 셰익스피어의 인간관을 “겉보기와 진실의 문제’라고 부른다.”



소년기의 경험에서 셰익스피어가 배운 것은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교훈이 아니었을까 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교훈은 종교개혁으로 신앙이 흔들리던 시절,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 흔들리더 시절의 분위기로 더 깊어졌을 것이다. 선과 악의 절대기준이란 없고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선과 악이 떠도는 셰익스피어의 무대는 그런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저자는 짐작한다.



그렇기에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등장인물은 자신이 놓인 구체적 상황 속에서만 생각한다.그것이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을 때의 철칙이다.” 셰익스피어의 무대에선 셰익스피어는 사라진다. 오직 대사를 가진 등장인물만 잇을 뿐이다. 그의 무대에서 작가는 등장인물의 대필자에 불과하다. “셰익스피어는 오피니언 리더도 아니며 새로운 철학을 설명하는 자도 아니다.” 그저 있을 법한 인간을 보여주면서 “공감하기 쉬운 내용으로 ‘나도 그렇다’라고 받아들이게 만든다. 나처럼 슬퍼하고 잇는 사람이 주변에도 많다고 위로를 해준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그런 시선을 가졋었기에 괴테는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면 그가 인간의 본성 전체를 모든 면에서 그리고 모든 깊이와 모든 높이에서 철저히 연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그 이후에 등장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 역시 “그렇게 생각해 극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셰익스피어의 세일즈맨’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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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송 이즈 유 The Song is You
아서 필립스 지음, 김선형 옮김 / 현대문학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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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펜터즈의 곡 중에서 가장 많이 리메이크되는 곡은 아마도 '슈퍼스타'일 것이다. '슈퍼스타'는 순회공연 중인 팝 스타와 팬의 하루 밤 불장난이란 흔하디 흔한 스토리를 노래한다.

카펜터즈의 음악을 당시 평론가들은 아이스크림 음악이라 불렀다. 쉽게 듣고 잊어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고전이 되어버린 카펜터즈의 음악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든 평이다. 그러나 그런 평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슈퍼스타의 경우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리차드는 그 곡에 밝고 장난스러운 피아노 반주를 입혔다. 그러나 곡이 진행될수록 리차드의 편곡은 캐런의 깊게 가라앉은 보이스와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곡의 편곡에서도 캐런의 우울한 보이스는 무시된다. 진부하고 맥 빠진 단조의 바다에서 과묵한 캐런의 탄식은 묻혀버린다.

캐런의 내면과 리차드의 만들어진 광택 사이의 모순을 가장 잘 잡아낸 것은 소닉 유스(Sonic Youth)의 '슈퍼스타' 커버이다.

"외로움은 그렇게 슬픈 것이다"란 가사가 무엇을 말하는지 캐런과 소닉 유스는 알고 있었지만 리차드는 이해하지 못했다.

"당신의 기타는 이렇게 달콤하고 맑게 울리는데 당신은 여기 없고 라디오만 있군요." 캐런은 한 때의 불장난을 배신감으로 해석해 혼자 남겨진 외로움의 드라마로 바꾸었다. 소닉 유스의 무어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쇠톱을 긁는 것 같은 전자기타의 비틀린 피드백, 신디사이저의 화이트 노이즈, 고음과 저음을 거세해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전화에 대고 말하는 유령 같은 보컬은 (팝스타라는 환상을 쫓는) 스토커의 불길한 갈망을 그린다. '베이비 베이비 베이비' 코러스를 무어가 부를 때면 섬뜩하다. 소닉 유스가 보여주는 것은 카펜터즈 음악의 진실이다.

‘노래가 당신’이란 제목이 붙은 이 소설은 캐런이 잡아낸 환상과 현실의 거리를 말한다.

이 소설은 50을 바라보는 늙은 팬과 팝스타의 이루어지지 않은 로맨스를 다룬다. 자기 나이의 반에 불과한 여자와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남자 사이의 관계는 결핍의 관계이다. 중년의 남자가 젊은 여자에게 보는 것은 젊음의 활기이다. 젊은 여자가 늙은 남자에게 보는 것은 또래에게는 볼 수 없는 어른의 안정감이다. 서로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상대에게 보는 관계이다.

이 소설의 관계 역시 그렇게 이어진다. 케이트가 줄리언에게 본 것은 이런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얼굴이 있었다ㅓ. 아주 멋진 얼굴, 세상을 아는 남자의 얼굴이엇다. 그의 얼굴과 자세에서는 어쩐지 자신감에 넘치는 힘이 느껴졌다.”

그러나 다른 연상/연하의 함수에 이 소설의 관계는 팬과 팝스타라는 변수가 더해지고 그렇게 더해진 변수 때문에 그들의 방정식은 해답이 나올 수 없는 관계가 된다. 팬과 팝스타의 관계는 판타지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녀는 노래했다. 어떤 감정이든 주문만 하면 또렷한 윤곽선의 반짝반짝 윤나는 축소모형으로 제조하고 전시해낼 수 있었다. 실연을 회상하고 나서 회상을 순수하게 증류한 노래를 불러, 결국 줄리언(과 백명도 훌쩍 넘는 남자들과 여자들)으로 하여금 그 아픔의 근원을 혼쭐내주고 그녀를 돕고 싶다는 차라리 자신이 아픔의 장본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했다. 케이트는 자기가 느꼈던 감정을 청중이 느끼게 하고 이미 느껴보고도 모르는 감정을 실감하게 했다.”

서로를 이해한다는 느낌은 팬과 팝스타의 관계를 개인적으로 이어준다. “그녀는 딜레마를 맞았다. 성공하려면 그녀와 그녀의 감정들이 진실로 공명해야 하고 군중들로 하여금 말 그대로 짧은 시간에 사랑에 빠지게 해야만 한다. 그녀의 밥벌이라는게 그런 원초적이고 무의식적인 사안에 의존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델들과 비현실적인 미모를 광고 이미지로 박제하는’ 환상을 다루는 CF 감독으로서 줄리언은 그런 팬과 스타의 관계 역시 자신의 직업 만큼이나 무의미한 환상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캐런 카펜터가 포착한 ‘지독한 상실감과 무의미와 단절’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중년도 저물어가는 줄리언에게 삶은 ‘상실과 결핍이 삶의 조건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사랑하던 아들이 떠나면서 행복한 결혼도 끝나고 왕성한 성적 활력도 잃어버린 초라한 자신. 상실과 결핍을 직시하기에는 무의미에 시달리는 줄리언. 그는 끔찍한 현실을 환상에서 해소하려 한다.

아이팟에서 흘러나오는 케이트의 목소리는 “줄리언 속에서 진하게 버무려져 굳은 정서-회한, 희망, 슬픔, 흔들리는 야망, 갈망-를” 휘저어 “그를 화들짝 놀라게 만든다. 그 목소리 없이는 차마 이렇게 응축된 감정이 이토록 넘칠 수는 없었다. 이제 나이 든 줄리언은 이런 경험이 얼마나 흔치 않은 것인지 잘 알고 잇었다. 그리하여 그는 침묵 속에서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감정들을 밝혀주는 그 목소리를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은 케이트인가 케이트의 목소리인가? 그녀에게 다가가길 망설이는 이유다. “지금쯤은 알 만도 한데 또 한번 음악의 미망에 이끌려 터무니없는 환상을 품고 만” 것은 아닌가?

줄리언은 한때 스타엿으나 이제는 몰락한 눈앞의 개자식을 본다. “케이트는 어떤 면에서 이 바보와 아주 똑같았다. 그들은 다 불행하게도 그저 사람들이었으니까. 이 마법사와 주술사들은 케이트가 그를 한다는-어떤 면에서 그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잇다는-소중한 느낌은 환상일 뿐이다. 그뿐 아니라 야심이 있는 공연자가 매니저와 시장 고문과 커리어 플랜 등을 가지고 진부하게 끼워맞춘 가공되고 조작된 환상이었다.

유일하게 진짜배기들, 순수한 이들은 죽은 이들이었다. 죽은 가수의 레코딩은 기술의 개입이 적을 뿐 아니라(따라서 정서적으로 더 믿을 만햇다) 하잘것없는 인간성이 모조리 폐기처분된 후 테이프에 오롯이 순수성만 남았기 때문에 다르다. 오십 대, 육십 대, 칠십 대가 되어서도 사춘기의 감정을 노래하고 당신의 고통에 아이러니한 웃음을 반복해서 날리고 또 날리고 그러면 작위적인 구조물이 된다. 줄리언이 돈 때문에 하는 일보다 중요할 게 없는 아니 심지어 그보다 더 하찮은. 그런데 케이트는 그에게서 연료를 얻고 싶어 했던가? 그의 가치를 증명하고 포기하지 않고 그녀에게 영감을 주기를 바랐던가? 신선한 감정과 경험을 갈구하는 그 만족을 모르는 허기를 채워달라고?”

“숭배받는 스타와 누구보다 스타를 잘 이해하는 팬으로서 둘은 서로를 절실하게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를 갈망하는 이유는 달랐다. 그리고 그 다름이 그들의 관계를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의 관계로 만든다.

그는 아이팟의 목소리만 있는 케이트와 현실에 몸을 가진 케이트의 거리를 환상으로 메운다. “그 여자가 한 사람으로서 그 여자 자체가 이런 기분이 들게 햇다. 그러니 어쩌면 칼턴(죽은 아들)이 이미 박탈한 과거나 미래에서 온 달콤씁^쓸한 고문이 아니라 그의 삶에 현전하는 기쁨이라 느낄 수 잇게 해줄지도 모른다. 삶에 케이트가 잇다면 자유롭고도 구속받는 젊고도 늙은 기쁘고도 서글픈 그리고 용서받은 사람이 될 수 잇다 믿을 수 있었다.”

현실의 여자는 그런 여신이 될 수 없다. 결혼도 해봤고 수많은 여자를 거치면서 그것을 알만한 나이가 된 그는 자신의 환상을 내버려둔다. 그리고 환상이라는 것을 알면서 애써 무시하기에 줄리언은 케이트에게 다가가 현실의 남자가 되는 것을 망설인다.“그냥 전화를 걸어버릴 수 도 있었다. 분명히 그녀를 원했다. 그러나 하루가 또 하루가 지나도 그냥 전화를 걸지 못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데 저항하는 자기 마음이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줄리언에게 그의 아버지가 들려주던 동화에 이런 말이 나온다. “수도승은 그에게 이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으니 떠나야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는 이제야 제 슬픔을 잊었어요.’ 토시로는 항의햇다. “그 때가 바로 행복이 끝나야만 하는 때다.” 수돗6ㅡㅇ이 말햇다. “하지만 스승님. 저는 여기서 행복합니다.” 토시로가 우겼다. “아니다. 너는 너의 불행을 감추고 그 대신 거기서 꿈을 만드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그런 줄리언에게 케이트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자 빨리 대답해요. 음악 따위 언급도 하지 말고, 어째서 나를 쫓아다녔는지. 내 안에서 어떤 깊이를 보았는지. 하지만 음악 얘기는 하지도 말아요. 지금 당장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들이 좀 있어요. 당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얘기들이겠지만. 아니면 우리에게 세상의 모든 시간들이 남아 잇을까요?”

그러나 “그녀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수집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그가 자신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걸 모으는 상상을 해보았다. 어쩌면 그녀를 모으면 모을수록 그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보면 볼수록 그의 기대에 못미치는 존재였다는 사실이 드러날지 모른다.”

그녀는 그를 기다리는 동안 깨닫는다. “실망하고 화가 난 그녀는 그 같은 남자들에게 작고 어리고 재미없고 뻔”할 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이유일 수 없엇다. “그녀는 그만두엇다. 완성된 최종본은 워라고 해야 할까? 음률이 맞지 않을 터엿다. 전혀 말이 안되는 코드 진행이엇다. 부모, 아기, 자란 아기, 더 자란 아기, 케이트. 오늘 밤 무대에서는 세상 만물의 꼭대기에 올라앉은 기분이엇는데 지금은 자기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뭔가를 망치고 잇다는 느낌이엇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그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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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평전 - 외롭고孤 높고高 쓸쓸한寒
몽우 조셉킴(Joseph Kim) 지음 / 미다스북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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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이란 제목이 붙은 이책의 내용은 평전과는 거리가 멀다. 이책은 물론 백석이란 인간의 생애를 다루지만 이책의 관심은 백석이란 인간이 아니라 시인으로서 백석이며 백석이라는 시인이 만든 세계가 한국의 근대예술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추적하는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한다.

저자는 백석의 시가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된 이유를 민족정신에서 찾는다. 김소월을 배출하기도 했던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는 민족주의 교육의 산실이었다. 그 학교를 다닌 백석은 한민족으로서 자신을 자각하게 되었고 시를 쓰는 것을 민족운동으로서 의식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백석의 시는 얻은 것은 이념이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던 당시 사회주의 예술과는 달랐다. 백석은 민족은 그 언어에 살아있다고 생각햇으며 언어를 갈고 닦는 것이 민족을 살리는 길이라 생각했다고 저자는 본다.

“그 나라 말을 오해 보존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 그 나라 문학을 높은 수준에 올리는 것이다.” 백석의 말이다.

백석은 한국어의 아름다움과 그 가능성을 자신의 시에 담는다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 좋은 예는 백석 시의 음악성이라 저자는 말한다. “바로 백석의 시는 시 그대로 노래하는 사실이다. 그래서 제자 강소천이 동요를 짖게 된 것이라는 점을 말씀해셨다. 백석의 시는 조선 말기의 판소리 어법과 맞는 형식이기도 하고 고려 말기에 존재한 외치는 소리 혹은 들판의 소리로도 불리는 사대부 집안의 한글시와도 유사하다고 했다.”

한국어의 강점을 살리는 시였기에 그리고 한국어의 매력을 발산하는 시였기에 백석의 시는 막강한 영향력이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언어의 마력은 다층적인 마력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백석은 시를 보는 사람들이 무지한 사람이든 지성인이든 그 시를 읽고 느끼는 사람들 모두를 만족시켰는데 1차원적으로 보면 그저 향토적이고 음식을 사랑한 인간적인 모습이 그려져서 좋아하는 것이고 2차원적인 해석을 할 수 잇는 사람들은 그 안에 표현된 인간을 관찰하고 감상할 수 있어서 기뻐하는 것이며 3차원적인 눈으로 시를 볼 수 잇는 사람들은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는 백석 시에서 위로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백석 시의 그런 다층적 깊이가 그의 시가 해방 이후에도 시, 가요, 회화를 넘나들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한 이유라 말한다.

한국어의 매력, 향토적 소재만을 다루었다면 1차원에 머물렀을 것이며 다른 예술가들에게 그렇게 강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모더니즘 시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김기림이 백석을 존경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상이 이책이 말하는 백석의 시세계를 요약해 본것이다. 그러나 실제 위에서 다룬 내용은 이책의 주 내용이 아니다. 이책의 주 내용은 그런 백석의 시세계가 작사가들의 가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대중가요들의 가사와 백석의 시를 비교하며 보여주는 것, 근현대 시인들의 시와 백석의 시를 비교하는 것 등의 영향관계를 따지는데 거의 책의 반 이상이 할당된다.

백석과 한국 근현대 예술사가 더 어울리는 제목이다. 그러다보니 막상 백석의 예술 자체나 백석의 삶은 비중이 일천하다. 평전이라 고른 책에서 지루한 영향관계 고증을 왜 읽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평점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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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카페여행 바이블 - 반짝 반짝 보석처럼 숨어 있는 도쿄 카페로 떠나는 시크릿 여행
조성림.박용준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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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의 그림은 도회지의 고독과 불안을 그렸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렇게 평하는 사람은 고독은 나쁜 것이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고독은 쾌적할 수 잇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간섭받지 않고. 호퍼 자신 함부로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는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다. 호퍼의 그림에 불필요한 것은 없다. 그것이 가끔 공허하다는 말을 듣지만 공허한 실은 모든 것을 채우는 예감으로 가득하다.”

가장 미국적인 화가로 불리는 에드워드 하퍼에 대한 평이다. ‘Nighthwaks’는 하퍼를 말할 때 가장 흔하게 떠올리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텅 빈 뉴욕의 거리를 배경으로 홀로 빛나는 바를 그린다. 등장인물은 4명. 바텐더와 연인 그리고 중절모를 눌러 쓰고 등을 보이는 남자. 그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없다. 그들 사이의 공간을 메우는 것은 가게의 조명뿐. 그 빛은 가게를 메우는데도 벅차다. 그 빛은 네 사람 사이의 공간을 채우는데도 힘에 겨워 어두운 거리를 비추기엔 역부족이다. 빛이 갇힌 그 공간은 텅 비었고 건조하다.

자신만의 공간에 갇힌 사람들. 빛이 모자란 하퍼의 세계. 바는 하퍼의 세계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도시에서 사람의 영혼은 돈도 물건도 아닌 마지막엔 같은 사람에 의해서 밖엔 위로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하퍼의 도시에선 기댈 사람이 없다. 하퍼의 도시는 혼자가 되어야 하는 공간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는 특별한 공간이다. “미국의 바에는 오래 전부터 이런 얘기가 있다. 자살을 생각하는 남자가 마지막에 이야기 상대로 고르는 인간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목사 또 하나는 바텐더” 바텐더는 손님의 이야기를 받아주며 무거운 마음을 받아낸다. “바의 카운터 판은 아주 두껍고 무겁다. 손님의 고독 미움 슬픔 괴로움 절망하는 영혼 그런 너무나 무거운 마음을 단단히 지탱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기에 “바텐더는 아무리 괴로워도 그 얼굴을 손님에게 보여선 안된다 바란 손님이 비를 피하는 장소 우산을 내밀어야 할 바텐더가 우는 소릴 하면 어쩌냐. 바는 녹슬고 지친 손님의 마음을 빛나게 하기 위해 있다. 세상 모두가 손님의 적이라 해도 바텐더만은 마지막 한편이 되어야 한다.” (조 아라키)

빛이 모자란 도시에서 바는 사람을 빌릴 수 있는 섬이다. 사람을 빌리는 바에서 주인공은 손님을 상대할 줄 아는 바텐더이며 바텐더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주변으로 물러나야 하며 어둡게 남아야 한다. 바에 비를 피해 온 손님을 받아주는 것은 바라는 공간이 아니라 바텐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페의 주인공은 공간이다. 카페에서 우리가 사는 것은 차도 음식도 아닌 공간 자체이다. 바가 사람을 빌려주는 접대업이라면 카페는 공간을 빌려주는 임대업이 본질이다. 그러므로 공간을 빌려주는 카페는 그 공간이 어떤 곳인가에 따라 좋은 카페와 그저그런 카페가 나뉜다. 그러면 우리가 카페에서 빌리는 공간은 어떤 공간인가?

“지유가오카의 한적한 분위기를 이끄는 일등 공신은 뭐니뭐니해도 그린 스트리트다. 지유가오카 역 남쪽 출구를 빠져나와 2분 남짓 걷다 보면 푸르른 녹음이 한껏 자태를 뽐내는 가로수길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그린 스트리트다. 아름다운 가로수들이 만드는 그늘 밑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을 쉽사리 만날 수 있다.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벤치 아래로 커피 한 잔을 들고 오면 이곳이 바로 노천카페, 또 유명 스위츠 숍에서 달콤한 디저트 하나 테이크아웃하면 바로 노천디저트카페가 되니 지유가오카는 동네 자체가 커다란 카페.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지유가오카 카페 문화 발전을 저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분명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일지도 모르겠으나 여성들이 열광하는 지역이라고 하기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가 상대적으로 굉장히 적다. 사실 봄이면 길가에 꽃이 피고 여름이면 가로수의 녹음이 짙어지며 가을이면 거리마다 단품이 넘실거리는 무료 노천카페가 있는데 굳이 답답한 실내에 앉아 잇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마도 지유가오카에 주로 테이크아웃을 전문으로 하는 디저트 샵들이 많이 모인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거리 자체가 카페이기에 카페가 희귀한 곳. 저자가 생각하는 카페라는 공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도시의 모든 거리가 지유가오카 같을 수는 없다. 인사동에서도 쉬려면 카페를 찾고 찻집을 찾아 돈을 주고 쉬어야 하는 게 도시이고 공간이 사유화된 도시의 논리이다. 그런 도시에서 이상적인 카페는 어떤 곳인가, 저자는 이런 곳이라 말한다.

“내 또래 손님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사진을 찍어대던 첫 방문 때와는 달리 두 번째 고소앙과의 만남은 정취처럼 차분했다. 고즈넉한 다이쇼 시대 저택 그대로의 와관과 아담한 정원을 지나 들어서자 느껴지던 평온한 실내는 아직까지도 눈에 선하다. 평일, 그것도 월요일인 탓인지 관광객보다는 대부분 나이 지긋한 손님들이엇다. 모두들 누가 들을세라 조근조근 담소를 나눈다.

창가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 이마 위로 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갑자기 더워진 날씨가 무색하리만치 시원한 바람이. 평소 같았으면 사정없이 내리쬐는 도쿄의 오후 햇살에 눈을 찡긋거리느라 정신이 없었을 텐데. 신선한 바람 탓인지 고소앙의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마냥 기분 좋게만 느껴졌다.”

그 공간은 혼자 또는 나와 같이 온 누군가만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은 배경이어야만 한다. 그곳은 도시에서 물러나 쉬는 곳이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해도 좋은 장소이다.

“나는 모카 포트로 끊여 낸 커피와 바나나 2개가 총총 박힌 바나나케이크를 먹으며 천천히 시간을 즐겼다. 계속 흘러나오던 생소한 탱고 선율도 어느 새 익숙해져 모든 것이 편안했다. 누구 하나 나에게 신경 쓰는 이 없고 누구 하나 나에게 눈치 주는 이도 없었다. 모두 각자 자기 시간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공간은 특별하다. 카페마다 자신만의 색이 있기 때문이다. “10평 남짓 되는 작은 공간은 정말 이름 그대로 방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 카페는 운영하는 사람의 또 다른 방이라 생각한다는 이곳의 주인 사이토상의 말이 그대로 반영된 듯한 공간이다. 마치 옆집 언니네 놀러 온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아늑하고 작은 방이다.”

그러나 카페가 모두 같은 카페는 아니다. 저자가 찾는 카페는 그리 흔하지 않다. “가만 생각해보면 혼자 잇을 때, 애인과 함께, 친구와 함께 찾아가는 카페는 모두 다른 장소일 확률이 높다. 나는 주말을 제외하곤 거의 카페에 혼자 가곤 하는데 우리나라 카페에 가장 큰 불만은 바로 혼자 갈 만한 카페가 별로 없다는 것. 홍대 쪽의 몇몇 카페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여러 명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라 여자 혼자 가서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에 저자는 도시를 누비며 카페를 찾아 헤멘다. 이책은 저자가 꿈꾸는 그런 공간을 찾아 도쿄를 누빈 기록이다. 저자가 꿈꾸는 카페는 이런 곳이다. “전쟁터 같은 일상에서 고군분투하다 보면 가끔은 여자로서 ‘나’를 느끼는 순간이 절실해질 때가 있다. 내 취향대로 꾸며진 공간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순간, 밑바닥을 쳤던 감성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흠뻑 차올라 행복해지는 그런 순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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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걷기여행 - On Foot Guides 걷기여행 시리즈
프랭크 쿠즈니크 지음, 정현진 옮김 / 터치아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위키의 프라하 항목을 찾아보면 프라하의 인구는 130만, 교외지역까지 포함하면 230만이다. 서울과 맞먹는 런던 같은 도시에 비하면 별 감흥이 없는 수이다. 그러나 정치, 경제, 문화가 지역적으로 분산되어 있는 유럽의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큰 도시이다. 그러나 위키 아티클을 더 읽어가다보면 그보다 더 놀라운 아니 감흥이 있을 만한 수치가 보인다. 2009년 기준으로 프라하를 거쳐간 관광객의 수가 410만이라는 것이다.

최대로 잡은 인구로 봐도 2배에 가까운 사람들이 오가는 도시. 왜 그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로 오는 것일까?

1100년전 처음 세워졌을 때부터 몰다우강을 끼고 있는 프라하는 중부유럽의 교통요지였고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의 성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센터였다.

그러나 1차대전의 패전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이 해체된 이후 프라하는 역사에서 잊혀진 도시일 뿐이었다. 프라하의 봄 같은 이벤트가 있었지만 세계사의 흐름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재확인하는 사건일 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흐름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프라하의 매력을 만들었다.

이책은 프라하 여행가이드북이다. 그러나 이 시리즈는 다른 가이드북들과 달리 두발로 여행지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을 위한 가이드북이다. 이책의 구성은 걷는다는 것을 전제로 프라하를 즐길 수 있는 코스를 소개하면서 그 코스를 걸으면서 눈여겨 보아야 할 사이트들을 나열하고 간단하게 소개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책을 읽다보면 왜 프라하가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도시 전체가 골동품이기 때문이다. 중세 초기 고딕 양식이 나오기 전의 로마네스크 양식부터,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그리고 19세기의 아르누보를 거쳐 20세기 초의 국제주의 양식까지 건축의 골동품이 모여있는, 역사가 동결되어 있는 공간이 프라하이기 때문이다.

두번의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다른 유럽도시들과 달리 프라하는 중세부터 근대의 흔적이 그대로 남게 되었고 20세기의 대부분을 역사의 주류에서 비껴있었던 덕에 전쟁으로부터 파괴되지 않은 유적들이 개발의 흐름에서도 비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남겨진 과거의 유산이 프라하를 다른 도시와는 다른 곳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프라하의 매력이다.

책의 저자는 불친절함, 바가지, 소매치기 등을 경고한다. 더군다나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고 영어안내판 조차 드문 곳이다. 여행자에게 그리 호의적인 곳은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이책을 보다보면 그런 프라하라도 찾도록 만드는 매력이 넘치는 곳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잇다.

자동차를 기준으로 재설계된 다른 도시들과 달리 프라하는 사람이 걷는 것을 기껏해야 마차 정도가 대체수단이었던 시절의 설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프라하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은 걷는 것이다. 사람의 걸음을 기준으로 설계된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책은 프라하를 즐기는 방법으로 걷는 코스를 소개한다.

그러면 이책은 볼만한 책인가? 프라하를 가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이책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단지 이런 책도 없이 프라하로 무작정 가는 것보다는 분명히 좋은 시작점을 제공할 것이라는 것 이상을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이책은 읽을만한 책인가? 여행가이드가 단지 여행자를 위한 책으로만 나오지는 않는다. 여행을 갈 생각이 없더라도 그 장소에 대한 어느 정도 지식을 얻고 싶은 사람들도 가이드북을 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 이책은 어떤가?

그런 목적이라면 쓸만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책은 걷기 코스를 소개한다는 목적에 충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코스소개에 충실하고 도시 전체에 대한 소개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읽고 나서도 프라하에 대해 그리 많은 정보를 얻는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읽다보면 걸으면서 얻게 되는 프라하에 대한 느낌을 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이책의 장점이다. 걷는 사람의 기준으로 프라하가 어떻게 보일지를 이책을 보면서 알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가이드북과는 상당히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정보보다는 그 장소에서 걷는 경험이 어떤 것일지 그 공간의 느낌을 간접체험할 수 있다는 색다른 장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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