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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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는 기획물이다.

‘작가의 삶’과 ‘작품들’을 연관 지어 이야기한다.

이 기획물의 목적은 작품 뒤에 숨어있는 작가의 내면과 외면을 들여다보도록 하여 문학과 일상인의 거리를 좁히려는데 있다.

이번 작가탐구의 작가는 박부길이다.

화자인 ‘나’는 독자와 비슷할 정도로 자신이 쓰게 될 작가를 잘 알지 못하는 인물로 독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대상 작가의 작품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작가 박부길은 ‘15년 동안 열 권의 장편소설과 일곱권의 중‧단편집, 그리고 세 권의 에세이집을 냈다’(16쪽)고 밝히고 있다.

‘1년 평균 한 권 이상의 책을 냈으므로 아주 과작은 아닌 편’이라는 평도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소설 속에서 책 속의 내용들을 인용하며 작가의 삶을 파헤쳐 나간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은 작가의 모습이 투영된 것이라고 한다.

또는 자신 안의 괴물이나 천사가 와서 대신 써주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가설 중에 이승우 작가는 전자의 생각으로 이 소설을 집필하지 않았나 싶다.

실제로 이 소설은 박부길이라는 작가의 작품 내용보다 그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듯 박부길 작가의 작품은 그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성장과정에서 어떤 경험을 통해 작가가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이야기해준다.

그렇게 중간 중간 삽입되는 이야기는 장면이 생생히 그려지는 영화 같기도 하고, 회상 장면 같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서술 방식은 작품과 작가 사이의 연결성을 알린다는 차원에서 필요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책의 인용부분은 대화체가 현재 시제를 사용했기 때문에 현장감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둘 사이의 교집합에만 집중하느라 여집합에 소홀했다는 생각도 든다.

과연 모든 작품은 작가의 ‘경험’만으로 이루어지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 전세계를 집시처럼 떠돌며 여러 가지 경험에 목메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작가는 ‘상상력’이라는 재료를 이용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인 봉평은 그가 묘사한 것만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지닌 곳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상상속 이야기였다.

더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남성작가들의 소설에서 그토록 비일비재하게 등장하는 ‘몸 파는 여성’의 생각이나 감정을 작가들이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남성작가들이 그녀들의 이야기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그녀들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방법은 대화나 전문 등을 통해 ‘의사체험’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 예가 주인공인 박부길 씨의 예와 구별된다고 할 수도 있다.

어떻게 ‘주역과 조역의 역할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하면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한다.

모노드라마가 아닌 이상 모든 이야기 속에는 주역과 조역이 존재한다.

하지만 작가의 경험만을 강조한다면 모노드라마만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예전에 내가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 없이 이 소설을 읽게 되었다면 ‘그래, 소설에는 역시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게 마련이지’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소설의 마지막 장까지 읽어 가면서 ‘작가의 내면과 외면’을 아는 것과 작가가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 과연 얼만큼 의미 있는 일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소설에 있어서 경험보다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로봇 산업을 이끈 것은 일본의 유명 만화 ‘아톰이나 마징가Z’ 등을 보고 자란 세대라고 한다.

그들은 그것을 보며 ‘앞으로 나도 저런 로봇을 만들어야지’라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그들을 작가의 상상력을 경험하며 자랐다.

작가의 작품 안에 들어 있는 화자를 살펴본다는 액자식 구성은 흥미롭고 신선한 접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박부길이 자신의 경험에만 기초한 것이 아니라 상상을 통해 새롭게 창조한 세계도 있었음을 보여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이렇게 그의 경험을 통해 나온 작품도 있지만 그의 새로운 사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장애인으로 태어나서 불평만 해대는 많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희아, 닉 부이치치, 오토다케 히로타다 등’앞의 사람들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인생 자체가 다른 이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다.

박부길은 슬픈 어린 시절을 겪었다.

그는 성격적 결함으로 연애에도 실패했다.

그렇게 끝없이 침잠하던 어둠 속에서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리고 그 충동은 그를 ‘15년 동안 열 권의 장편소설과 일곱 권의 중‧단편집, 그리고 세 권의 에세이집을 낸’ 중견작가로 만들어 주었다.

이것이 실화였다면 어둠을 뚫고 작가로서 성공한 이야기만으로도 의미가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소설이기에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다.

현실같은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는 이런 길을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행복한 결말도 많지만 슬픈 결말도 많다.

책을 읽으며 결말을 바꾸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나는 앞에 경험과 상상력에 대해 주절거렸지만, 사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경험이나 상상력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단지 내가 행복한 결말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나는 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크다면 큰 깨달음이었지만, 해결책이 쉽게 눈에 띄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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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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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 손 안에 들어오는 가격 착한 책이 대세인가 보다.

그런데 이 책은 착하게만 있지 말고 분노하라고 말한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화가 나고 속상하니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마 오늘날의 분노는 MBC파업 사태나 대기업 담합 사태, 비정규직 철폐 등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분노는 전쟁과 같이 전 국민이 겪는 아픔이 아니라, 한정된 집단에게만 영향력을 미치는 것 같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뉴스 진행자가 파업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그 이유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나는 심지어 YTN파업 사태 당시 도서관에서 국민의 볼 권리를 침해 한다는 이유로 파업하는 사람들을 욕하는 말도 들었다.

과연 우리는 무엇에 분노해야 할까?

지금 2-30대 무직 또는 비정규직의 분노는 이것이 아닐까?

부모님이 여태껏 키워놨는데 밥벌레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속상해 하시는 부모님께 면목이 없다.

그렇다고 이윤 추구가 목적인 기업에다,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사원을 안 뽑았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요즘은 내는 것도 같다.)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중고등학생은 어떤가? 어느 누구 하나 편들어 주지 않고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문제는 사회 문제라고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아직 개인의 문제다.

그러니 가장 크게 남는 분노는 자신과 사회 전체에 대한 반감뿐이다. 이것은 때로는 ‘악플’로 때로는 ‘묻지마 범죄’라는 슬픈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더 나은 것도 아니다.

밤늦도록 야근에 휴일 출근도 비일비재 하다.

저자인 스테판 에셀은 말한다.

“비폭력이란 손 놓고 팔짱 끼고, 속수무책으로 따귀 때리는 자에게 뺨이나 내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비폭력이란 우선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일, 그다음에 타인들의 폭력성향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는 당최 그 방법을 모르겠다. 앉아서 면벽수도 하면 비폭력적 분노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억압에 시달려도, 끈기 있게 비폭력으로.

우리는 다시 간디의 시대로 돌아간다.

그런데 의문이다. 과연 그게 현대사회에 얼마나 통용될까?

무시당하기도 했지만, 부모님 밑에서 실컷 누리고 온 세대다.

이 말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을까?

비폭력을 위해 얼마나 뭉칠 수 있을까?

나는 현재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그럴 수 있을까?

글쎄……. 나는 자꾸 자신이 없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가진 자들이 못 가진 자들을 포기시키는 방식일 것이다.

금전적 압박으로 위협하는 일.

동전이 떨어지면 한쪽 면으로 떨어지기가 쉽지, 세워지긴 어렵다.

아예 저항을 포기하던지, 불을 품고 거리로 나서던지 하지 않을까?

저항을 포기하면 옛날에 정체성을 빼앗긴 식민지 국가의 국민이 되는 것이고, 불을 뿜는 사람은 알카에다의 성향으로 옮아갈 성향이 높다고 본다.

나처럼 뒷방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일까?

그러나 가진 자들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희망이 없으면, 분노도 없다.

3무세대, 3포세대가 정말 세대명답게 자손을 남기지 않고 죽으면 어떻게 될까?

그 때는 재벌들이 공장에서 자동차를 만드는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로봇을 움직이더라도 작동은 직접 해야 하니까.

뭐 운동이라며 즐기시면 다행이겠다.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고 싶어 한다.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 과연 잘 굴러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긍지와 투지가 엿보이는 얼굴이라고 할 게 분명한 노학자의 얼굴.

이 사진이 왜 내게는 해골 장난감 같이 무시무시한 얼굴로만 보이는 걸까?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아저씨가 말하는 이야기와 내가 이번에 편집자로 참여한 첫 책의 저자와 생각이 같아, 앞에 투덜댔을지언정 읽으면서 참 반갑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있다.

‘폭력은 효과적인 수단이 아니고, 폭력적인 희망은 없다.’

“현실에 대한 냉소, 무관심, 거리두기만으로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의 정당한 분노와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 바꾸기에 나서자.”

결국 실천 방법은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다.

어제 프랑스에서 총기 난사를 일으킨 사람은 왜 그랬을까?

알카에다가 나쁘다고 욕하기 전에, 유럽에서 받았을 이슬람인의 차별을 먼저 보도해 주었으면 어땠을까?

그들이 받은 차별과 울분이 알카에다에 가입하고 싶은 마음을 낳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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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울지 않아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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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런 단편 모음이라 해도 될 것이다. 삶을 돌아보게 해주는 작은 소품집이라 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글들이 이렇게 내 마음에 남는 건 아마 여성으로서 일에 대해 고민하는 이야기가 나와 있어서가 아닐까?

짤막하게 정리한 세 가지 이야기뿐만 아니라 책에는 여러 가지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옮긴이의 말_ 각각 다른 직업을 가진 여성 열여섯 명)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직업전선에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눌러 앉게 되었다.’ 식의 전개가 많았다. 아마 작가는 여성이 일하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고 하더라도, 남성보다 보편적이지 않아 그런 식으로 일하게 된 경우가 많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들 속에는 분명히 ‘현실감’이 있다. 그래서 내가 ‘플로리스트’가 된 것 같고, 주류회사의 ‘영업 사원’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예전에 차였던 남자를 찰 수 있는 능력 있는 ‘백화점 사원’이 된 것도 같다. 아직 우리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중 많은 부분이 ‘사원’에 한정지어져 있어서 일까? 그게 한편으론 슬프면서도, 사실 다른 한편에선 다른 누구도 아닌 ‘사원’들이 책에 많이 나와서 더 동질감이 느껴졌다.

스물아홉. 서른 줄에 들어서면 적은 나이라고 느껴지겠지만, 지금 내가 느끼기에는 조금 버거운 나이다.

숫자를 몇 개만 떨어뜨려 스물여섯이나 스물일곱 정도면 정말 감사할 텐데 말이다.

남들은 결혼한다고 설치는 나이에 자꾸 일 한다고 설치고 다니니 부모님 눈에 곱게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묻기가 두려워 묻어 두기로 한다. =_=;;)

뭐 일도 결혼도 잘하면 되지! 마음을 다잡지만, 가끔 미끄럼틀 앞에서 언제 내려갈지 모르는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된다.

그런데, 사실 아직 올라온 게 없으니, 미끄럼틀을 내려올 수도 없다. 다만 올라갈 미끄럼틀 자체가 없어질 까봐 조바심 내고 있는 것이다.

‘절대 울지 않아’ 라고 외치지만, 어딘가에서 혼자 울기로 정해진 것이 ‘사회인’이란 세 글자에 담겨있는 논리가 아닐까 싶다. 남성도 아마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오늘도 현실에 발을 디디고 ‘절대 울지 않아’라고 외치며 아마 악착을 떨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잘하게 되겠지! 낙천적인 사람인양 나를 포장해 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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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김용만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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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광개토태왕릉비’라는 하나의 실재하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 시대 광개토태왕의 업적과 고구려 및 외부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본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추리소설과 같다.

우리는 저자와 함께 탐정이 되어 힌트인 ‘광개토태왕릉비’를 가지고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해보는 것이다.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광개토태왕이 살던 시대로 돌아가 역사의 무대를 누빌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모든 문장을 해독할 수 있는 한문학자라고 해도 역사적 사실을 알지 못하는 한 역사 분야에서 제대로 된 추론을 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저자가 가진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비문에 대한 논리적 접근을 통해 저자가 대표로 탐정이 되어 수사를 진행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문장이 있지만, 이것은 비문을 만든 고구려입장에서 말이 안 되기 때문에 거짓이다.’

저자는 탐정이 되는 하나의 방법으로 비문을 만들게 한 장수왕의 입장이 되어 봄으로써 현실 인식을 새롭게 한다.

일본이 비문을 고쳐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지만, 400년 고구려가 속국인 신라를 도와주러 갔던 것과 달리, 백제를 지배했다면서 369년 백제가 고구려에 대패했을 때 백제를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저자는 일침을 놓는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드라마’를 통해 역사를 많이 접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재미를 위해 허구를 너무 많이 섞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 제대로 된 가치판단을 하기 어렵다.

그리고 제대로 된 가치판단이 없으면 결국 우리는 제대로 된 반성을 하지 못하게 된다. ‘역사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라는 흔한 말이 통용되지 않는 것이다.

여태까지 많은 책들이 보여주었던 ‘국수주의’ 또는 ‘자문화 중심주의’, ‘사대주의’또는 ‘신화화’라는 왜곡된 시각에서 벗어나 그 시대 국제 정세와 고구려의 내적상황에 의해 그의 업적을 재평가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본다.

과거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이 없다면, 제대로 된 미래 설계도 할 수 없다.

여태까지의 역사책은 모든 역사의 흐름을 담는 것이 항상 당연하고 최선이라고 생각하듯 방대한 역사를 줄줄이 써놓은 책이 많았다.

그리고 짧게 파편화 되어 늘어선 사실들을 독자에게 역사니 배울 필요가 있으며 읽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런 입문서나 통서가 독자의 삶에 깊은 성찰을 주기는 힘들 것이다. 책을 삶에 적용하려면 좁고 깊은 방법 또한 필요하다.

한 가지 문제에 대해 심층 깊이 파고들어 그 사실을 따지는 것을 통해서 한 가지 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해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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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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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겠지만,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성별을 생각하며 읽기보다 책 자체에 중심을 더 두는 편이다.

그러나 일단 한 책이 좋아지고 그 작가에 대해 관심이 생기면 내가 여성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특별히 여성작가들에게 좀 더 많은 관심이 가게 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추리 소설은 '애거서 크리스티' 영어권 소설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 작가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에 '여성'이라는 이름보다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더 깊이 각인되어 있다.

책의 마지막까지 읽고 내가 외친 말은 '역시, 노통브는 천재야!'였다. (이름을 먼저 쓰고 성을 나중에 쓰는 서양어법으로 미루어 볼 때 '아멜리'라고 말하는 게 옳겠지만 나는 '노통브'라는 성이 그녀의 신비하고 거친 상상력에 더 잘 어울리는 어감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부르길 더 좋아한다.)

하지만 사실 내가 그녀의 책을 많이 읽은 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작 작가로서 매해 가을마다 책을 낸다는 노통브는 펴낸 책만 해도 벌써 스무 권이 넘는다.

나는 그 중 '살인자의 건강법, 앙테크리스타, 시간의 옷' 그리고 이 책 '적의 화장법'을 읽었다.

그 중 '살인자의 건강법'을 제외하고는 모두 200쪽을 넘지 않을 정도로 얇은 책이다.

그러나 그 책들은 우리 삶을 꿰뚫는 주옥같은 문장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읽다보면 접은 부분 덕분에 책이 불어나곤 했고, 이 책 역시 그랬다.

적의 화장법. 제목만 들으면 아름다운 여성들이 나오는 이야기일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에 아름다운 여성은 단 한 명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입씨름을 열심히 하는 남자 둘이 전면에 나선다. 그렇다. 이 책에서 화장을 하는 사람은 남자다.

공항 대합실. '제롬 앙귀스트'는 비즈니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말쑥한 신사로 비행기가 연착되어 공항에서 발이 묶인 상태다.

그리고 그 곳에서 기묘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기묘한 남자의 이름은 '텍스토르 텍셀' 그는 ‘제롬 앙귀스트’를 따라다니며 자신의 말을 들어 줄 것을 종용한다.

이 책은 거의 대화체로 되어있다. 글을 쓰다보면 대화로만 상황을 표현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종종 느끼게 된다.

인물은 말로만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도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상황을 묘사하고 주인공의 표정을 말하는 것을 통해 독자에게 현재 상황을 인식시키고, 복선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 사건을 이야기하는 세련된 방법이라고 인정받았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턴가 책을 읽을 때 장황한 묘사를 보면 '또 이거야?'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지나친 묘사는 독서의 속도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자칫 이야기의 흐름과 흥미를 잃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화로만 전달할 수 없는 사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많은 작가들은 묘사나 설명이라는 다른 수사법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에서 노통브의 천재성은 대화를 통해 나타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이 책은 거의 대화체로 되어있다. 독자는 거의 모든 정보를 대화를 통해 얻어 낸다. 이것은 '시간의 옷'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의 옷'에서 말씨름이 서로에 대한 주장에 그치고 복선의 의미가 약했다면, 이 책에서는 대화의 곳곳에 복선이라는 장치가 숨겨져 있다.

반전이 두 번이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줄거리는 말하지 않겠지만(미리 알고 싶으신 분은 34쪽을 차근차근 읽어 보시길 권한다.), 선생님들이 '문제 속에 답이 있다!'고 강조하듯이 이 책은 '대화 속에 답이 있다!'.

역자인 성귀수 씨의 표현에 따르면 '황당함> 역겨움> 섬뜩함> 충격'의 순으로 번역하는 동안 정신상태가 변화했다고 한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감정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충격 뒤에는 인간에 대한 묘~한 믿음도 싹텄다.

나는 기본적으로 성악설을 믿지만, 성선설에도 작게 손을 들고 싶은 이유는 인간이 선함 또한 가지고 있어서 일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나는 마더 테레사와 잭 더 리퍼의 인격에 같은 양의 선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악이 90% 정도라고 하면, 선은 10% 정도 되지 않을까?

반전에 대한 힌트를 하나 더 주자면, 제목의 화장(化粧)의 의미가 화장보다 위장(僞裝)에 가깝다는 것을 주지하며 읽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읽고 책을 본다고 해서 작가가 생각한 반전을 먼저 찾아내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속상해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노통브는 천재니까!

나는 천재가 아니라고 모두 살리에르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우리는 천재들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그 재능을 자신에게 이롭게 사용하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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