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걸으며 가장 많이 보게 되는 단어가 뭘까. ‘놓치면 후회 50%할인, 1+1의 기회, 최대 찬스' 회원 가입을 했던 여러 화장품 가게나 카드사에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혹은 잊기 전에도 소식을 알려오곤 한다. '10월 멤버십 데이 마지막 날! 10%혜택, BIG SALE 마지막 혜택 놓치지 마세요~, 미국산 LA식 갈비 1,690원' 대부분이 할인을 한다는 메시지다. 이렇게 매번 할인을 하면, 도대체 남는 게 있기나 할까.


책을 정가로 사면 바보라는 말을 듣던 시절이 있었다. 온갖 할인 쿠폰에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반값할인, 계절마다 찾아오는 창고 대 개방까지. 다른 책을 읽으며 할인시기를 기다리면 할인의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하지만 할인 도서 안에서만 맴돈 책 구매는 만족감까지 할인되어 애써 구입한 책들을 책꽂이에서 먼지와 뒹굴게 하거나 집안을 어지럽히는 주범으로 어머니의 잔소리거리가 되기 일쑤였다. 요즘도 사은품으로 간혹 유혹당하긴 하지만, 그때에 비하면 필요한 책 위주로 구매하는 규모 있는 쇼핑으로 돌아서는 중이다. 그 대신 내 방에는 화장품과 옷들이 쌓여가고 있다.


‘대한민국에도 드디어 블랙프라이데이 상륙, 저렴한 가격에 시민들 기대 커, 백화점 개장 전 400여 명의 손님 몰려, 할인이라더니 제 값 받아, 할인율 조작으로 소비자들 분통’ 20대 이상의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대다수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뉴스가 얼마 전 부글부글 끓다 사그라들었다. 나도 블랙프라이데이 기간에 브랜드 트렌치코트를 한 벌 구입했다. 할인율이 조작됐는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한 벌에 몇 십만 원을 호가하는 브랜드의 옷을 십만 원도 주지 않고 구입했으니 꽤 저렴한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새 옷을 사면서 어머니 몰래, 예전에 입던 트렌치코트를 버렸다.


내방 서랍 한쪽에는 아이브로우 타투 한 개, 매직쿠션 두 개, 립스틱 한 개, 보습 오일 한 통이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쌓여있다. 가끔 조카가 꺼내 장난을 칠뿐 내가 만진 적은 까마득하다. 보습 오일은 ‘원 플러스 원’으로 구입했다가 한 통을 다 쓰지도 않고 새로운 보습 크림을 사면서 일 년 정도 방치한 것 같다. 옷이나 신발도 싸다고 사두었다가 몇 번 몸에 걸치지도 않고 쌓아둔 것이 많다. 이렇게 내 방에서 가만히 썩어갈 물건들을 생각하면 쇼핑은 금물이지만 길을 걷다 ‘할인’이라는 단어를 발견하면 내 눈동자는 자연스럽게 그쪽을 좇고 있다.


눈동자를 단속하기 위해 통장 잔고를 생각했다가, 집에 굴러다니는 물건들을 생각했다가, 이도저도 안 되면 그냥 가서 물건을 살펴본다. 천천히 살피다 보면 이성이 돌아와 세일하는 물건들이 이미 나에게 있거나 필요 없는 물건임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쇼핑몰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종사자들은 늘어나는데, 사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으니 할인을 할 수밖에 없다. 요즘 하나 둘 문을 닫는 가게들을 발견하게 된다. 지나친 상업화가 가져올 문제는 없는 걸까? 거리를 둘러보면, 이상할 정도로 비슷한 것들만 파는 가게들이 우후죽순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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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어느새 한 달 가까이 지나버렸다. 먹고, 자고, 뒹굴 거릴 계획은 정말 계획으로 끝나고 연휴 내내 음식 만들고 조카와 놀아주는 가족 봉사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나마 재미라고 불릴만한 일이 새로 시작한 <디데이>라는 드라마를 본 일이다. <디데이>는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가정 하에 만든 드라마로 응급실 의사들의 신발이 운동화라 던지, 중환자실에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수동 산소 호흡기를 사용한다던지, 소송의 소지를 만들지 않기 위해 환자를 받지 않겠다는 대형병원 등의 모습들을 보여줘 마치 지금 어딘가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현장감이 느껴졌다. 1회를 못 본채로 2회 중간부터 봤음에도 불구하고 힘들지 않게 드라마에 몰입이 가능했다. 공중파 막장드라마와 격이 다른 케이블 웰메이드 드라마 시대가 도래한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서로 더 갖겠다고 싸우는 1% 얘기에 관심이 사라진지 오래다. 별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별세계에 살게 놔두면 된다. 삼시세끼를 어떻게 먹을지 고민하고, 가족과 어떻게 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지 생각하는 것이 나 같은 보통사람이다. 참, 휴일과 연봉 문제도 뺄 수 없는 주제다. 그 보통사람의 이야기가, 이 드라마에는 있다.
 
 
발군의 연기력과 화면의 적절한 사용, 나열하면 끝이 없지만 굳이 드라마 제작의 일등공신 꼽자면 철저한 조사와 입담을 바탕으로 써냈을 극본이라 하고 싶다. 좋은 극본이 없다면 모든 노력이 헛일이다.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내용이 허접하면 가슴에 남는 게 없지 않은가. 그런데 예고편 이후에 자막에서 제작이 'SM'이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SM이라면 이제 세계에서 알아주는 거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아닌가. 그래, 그 기업이 맞다.
 
 
생각해봤다, 내가 SM이라면 왜 제작 사업을 시작했을까. 탄탄한 극본으로 바탕으로 한 웰메이드 드라마를 제작하면 잘 만든 만큼 제작비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고, 연기 잘하는 스타 배우 옆에 소속사 배우를 조연으로 포진시켜 데뷔무대를 만들 수 있고, 언젠가 극본부터 배우며 제작까지 총괄해서 한 편을 만들 능력을 기른다면 영향력은 막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물론 안방 브라운관 앞에 앉아 흥미진진한 대리만족을 경험하겠지만 그것이 얼마만큼의 진실일까. 그들이 만든 체제에 익숙해진 우리가 거짓을 보여주어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아직 시청률은 1%대고 주연 배우 중 소속배우는 정소민 한 명이다. 게다 그녀는 연기도 잘하니 연기력 운운한다면 입을 다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방송사에서 1년 드라마 편성전체를 SM에게 외주로 넘기고, ‘SM에서 만드는 웰메이드 드라마에 출연하지 못하면 인기를 얻기 힘들다’가 공식이 되는 시대가 온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이건 잘 됐을 때의 일이니, 기우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건 우리나라 대기업이 그렇듯, 집중된 권력이 부패를 일으키지 않는 경우를 아직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내가 굳이 SM을 괴롭히려고 이 글을 쓴 것이 아님을 확실히 밝힌다.(저는 소송을 걸만큼 힘이 있는 인물이 아니랍니다) 괴롭히긴 커녕 이런 글을 쓴 나도 SM에서 높은 연봉으로 자리 하나 준다고 하면 얼씨구나 하고 달려갈지 모를 일이다. 그저 드라마를 보며 든 의구심을 글로 풀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내 불안증(!)에 대한 대책으로는 엔터테인먼트가 제작을 겸할시 소속 배우 중에 주인공을 세울 수 없다거나, 극본은 프리랜서에게 맡긴다거나 하는 관련 법규를 만드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힘 있는 사람이 법에서 빠져나갈 구멍은 얼마든지 있다. 자회사를 설립하거나 프리랜서 작가에게 집필 이후의 생계를 약속하는 것이 대기업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법을 만드는 것보다 시청자가 똑똑해지는 편이 낫지 않을까. 기업이 이권을 독식하려 하지는 않는지 내가 언론플레이에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닌지 알아볼 안목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사람을 잘 믿는 사람이 바보취급 당한 건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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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A903076925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예쁜 제목입니다. 아름다운 문장가 김연수 작가님의 사인을 받으면 저도 그런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신청합니다. 터무니없나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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