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의 시대 - 강준만이 전하는 대한민국 멘토들의 이야기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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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 멘토……, 멘토가 과연 뭘까?

지난해에는 삶의 지침을 전해주는 멘토들의 ‘말’이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이것도 비슷한 책인가? 했지만 이 책은 좀 다르다.

이 시대의 멘토가 어떻게 ‘멘토’로 인정받을 수 있었는지 이야기하는 책이다.


그러나 솔직히 처음엔 대선 이야기가 하도 많이 나와서 다시 표지로 가서 제목을 찾아 볼 정도였다.

책의 성격과 제목이 좀 동떨어진 것 같아 불만이었다.

모르던 그들에 대해 알게 되어 유권자로서 고민이 줄어들었으니 주고받은 셈이라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그러나 저자가 책에서 밝혔던 ‘멘토의 제도화’ 시도에는 반대한다.

제도는 자의보다 타의가 많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대표적으로 봉사활동의 점수화가 많은 학생들에게 위법의 짜릿함을 맛보게 하는 제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취지는 좋지만 의지가 없는 사람들까지 껴안기를 ‘멘토’는 싫어할 것 같다.

‘멘토와 멘티의 사회화’는 어떨까?

사회적으로 자신보다 미성숙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힘이 되어주는 것을 사회적 기본 도덕률 같이 만드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예전에 받았던 도움을 아래로 흘리는 것이다.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 멀어져 가는 세대 간의 간극을 좁히는 사회 통합의 의미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 나오는 멘토는 총 12명이다.


1. 비전‧선망형 멘토 안철수


2. 인격‧품위형 멘토 문재인

3. 순교자형 멘토 박원순

4. 교주형 멘토 김어준

5. 선지자형 멘토 문성근

6. 멀티‧관리자형 멘토 박경철

7. 상향 위로형 멘토 김제동

8. 자유‧개척형 멘토 한비야

9. 경청‧실무형 멘토 김난도

10. 열정형 멘토 공지영

11. 자유‧도인형 멘토 이외수

12. 재미‧계몽형 멘토 김영희


이 책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멘토를 위한, 멘토에 의한, 멘토의 시대’쯤 되지 않을까?

책은 이 시대에 멘토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그가 자신의 삶을 토대로 어떻게 멘토링 해왔는지 이야기 해준다.

그리고 이것이 시대의 어떤 흐름과 결부되어 나왔는지와 그래서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도 이야기해 준다.


그리고 정치와 생활이라는 1부와 2부로 나누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비야 씨와 김제동 씨는 묶일 수 있다.

김제동 씨와 박경철 씨도 묶일 수 있다.

그러나 김제동 씨와 안철수 씨는 묶을 수 없다.

아니, 묶으면 안 된다.

너무 강한 표현인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책의 앞부분 반은 정치적 성향이 너무 강하다.

문재인, 박원순, 김어준, 문성근 씨를 나는 멘토로 생각하지 못하겠다.

그들에게 굳이 배울 점이 없다는 점이 아니다.

각광받는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왜 이 사람들을 멘토로 삼아야 하는가?

여러 멘토들을 이야기하는 책이라 함께 묶어 두었다고 생각하지만 내 속에 작은 거부감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이 책의 좋은 점은 그 한 명 한 명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있다는 점이다.

평범한 시민에 불과한 나로서는 알기 힘든 그들의 과거부터 그들이 한 말, 그리고 결정적으로 멘토들의 행보를 통해 그 사람을 비판적으로 보게 해주었다.

아마 그들이 지금이 지나 인기 없고, 별 영향력 없는 사람들이었다면 나는 작가가 보여준 통찰에 지금의 3분의 1정도만 고마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사회를 선도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나는 작가에게 온전한 1만큼 고마웠다.

나도 너무 정치 얘기만 했나?

이 책의 8장부터 13장까지는 내가 생각하는 진짜 멘토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도 사람이기에 넘어지고, 고민하고, 잘못을 시인하고, 때로 불의한 세상에 답답해하기도 한다.

하루에 몇 천, 몇 만 명이 그들의 하루 일과를 궁금해 하는 유명인이다.

그만큼 자유롭지 못하고 하는 일이 만천하에 공개되어 정신적 압박도 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을 관철해 나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 감동적이었다.


사실 나도 제 밥벌이도 제대로 못하고 서른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새로운 일을 하겠다고 부모님께 붙어 사는 기생충 같은 존재다.

그러나 나도 세상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 살고 싶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과 공생을 위한 꿈을 꾸는 것 아닐까? 물론 아예 세상을 등지고 살라는 말이 아니다.

나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연명하며 계속 꿈을 꾸고 있다.

다만 멘토들의 말대로 그들처럼 꿈을 꾸되 모두와 함께 잘 사는 꿈을 꾸자는 것이다.

세상에서 잘났다고 추앙받는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만 가지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들은 아래를 보고 우리가 내려가서 밧줄을 내려줄 테니, 잡고 위로 올라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이들이 멘토가 될 수 있는 건 잘 살았다기보다, 함께 사는 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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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균형 아시아 문학선 3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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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도의 현실은 옛날 우리의 이야기

인생 이야기를 하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도와주니까 매우 중요한 겁니다. 그래야 항상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죠.(859p)

책 속의 삶들을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던 시절 우리나라가 떠오른다.

언론은 통제되었으며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어두운 곳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미디어가 국민의 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할을 잘 할 수 없었기에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목소리는 책으로 많이 등장했다.

이는 당시 출판계인사들이 다수 감옥에 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다.

이때 여러 인문, 사상서들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필두로 한 여러 근대소설들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근대소설이란 사회의 변화를 위해 잘못된 점을 고발하는 데 초점을 둔다’고 가라타니 고진은 말한다.

“문학의 지위가 높아지는 것과 문학이 도덕적 과제를 짊어지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는 이야기 한다.

그러나 지금 대개의 경우 우리에게 문학은 그저 문학일 뿐이다.

문학은 순수문학을 표방하며 이제 더 이상 사회 변혁을 조장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그러한 책임회피 덕분에 독자들로부터 소설 자체의 효용성을 의심받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적절한 균형’은 근대소설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책의 배경은 그야말로 ‘현대 인도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에는 네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결혼 3주년 기념일에 남편을 잃고 미망인이 된 디나.

불가촉천민인 차마르 카스트로 태어나 아버지의 이슬람 친구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하여 재봉사가 된 이시바.

이시바의 동생인 나라얀의 아들로 아버지가 직접투표하려 했다는 이유로 삼촌과 자신을 제외한 온 집안이 몰살당한 옴프라카시(이하 옴).

뛰어난 자연환경이 있는 휴양지에서 태어났지만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냉장고와 에어콘을 배우기 위해 도시로 온 마넥이다.

가끔 듣던 월드뉴스의 참혹한 일상이 지금 인도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작가는 담담한 문체 속에 날카로운 비유를 집어넣어 인도의 아픈 현실 상황을 이야기해 나간다.

그들이 겪는 부당함은 위정자들의 횡포에서 칼날 위를 걷듯 살았던 우리 옛 조상들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나라의 백정이 차마르 카스트 정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노예제도는 영미권 나라라고 없었던 것이 아니며, 여성이 독립하여 살기 힘든 구조도 온 세계에 퍼져있는 좋지 못한 습관이다.

부당한 삶의 모습은 인도만의 것 같지만, 실은 온 세계의 공통된 사항이며 그중 인도의 특수성을 보여준 것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말하는 아픈 현실이 전 세계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리라 생각한다.

2. ‘건강한’ 하층민의 삶

이 세상에는 많은 불행이 있지만 기쁨 또한 충만하다. 그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알기만 하면 된다.(851p)

기쁨은 짧고, 고통은 길다고 했던가?

이들의 삶이 꼭 이 말과 닮아있다.

이들이 모여서 행복하게 살았던 기간은 기껏해야 채 일 년을 채우지 못한다.

이후에 마넥을 제외한 세 명은 거지와 더부살이로 살게 된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 꼭 소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의식주와 일신의 자유가 억압받는 이들의 일상이 행복하거나 축복받은 삶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앞의 삶들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평가받는 ‘건강한 삶’ 또한 그들의 것이 아님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로힌턴 미스트리는 암담한 상황 속에 있는 그들을 묘사하면서 종종 ‘건강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주인공들의 처절한 삶을 즐겁게 읽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우리는 부조리한 현실에 처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세상을 등지려 한다는 것을 안다.

무엇을 해도 더 이상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은 각박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문제 자체를 없애려고 한다.

그렇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본인도 주위사람들도 알고 있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없기에 그저 문제 지우기에 골몰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방법은 다르다.

삶은 힘겹지만 이들은 남 탓만 하고 있지 않는다.

부조리한 현실을 몰라서가 아니다.

위선적인 타쿠르 다람시의 횡포에 뒤에서 침을 뱉고 욕을 할지언정, 울며 주저앉기보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농담으로 일상을 채우고, 요리로 작은 기쁨을 만들어 낸다.

이들이 가꾸는 하루하루는 때때로 불행을 만나 일그러지기도 한다.

그러나 곧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휘어져 자라는 나무처럼 새 생활에 적응해 농담 섞인 일상이 시작된다.

이시바와 옴은 거지가 된 뒤에도 자신들의 상황을 비하하고 희망을 잃기보다 즐겁게 농담하며 웃으며 살아가는 쪽을 택한다.

보통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때에도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건강한 삶’이 아니면 무엇일까.

천대 받는 삶일지언정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건강한 삶이 작가가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인도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3. 상상하는 고통이 더 아프다

하지만 마넥은 뛰기 전에 걷는 법을 먼저 배워야 돼. 때가 되기 전인 어린애가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건 좋지 않다고.(311p)

두 사람이 옴의 신붓감을 보기 위해 시골로 가고, 말렉이 방학을 이용해 집으로 돌아갔을 때, 디나는 결국 집주인의 횡포 때문에 집을 빼앗기고 만다.

디나는 그 정도로 현실과 타협이 가능했지만 이시바와 옴에게는 비극이 줄을 잇는다.

옴은 자식을 생산할 수 없는 몸이 되었고, 이시바는 조카를 돌보며 몸의 변화를 소홀히 하다 결국 두 다리를 잘라내야 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그들의 결말은 좋지 못했다.

셋이 당한 고통과 비교하면 말렉은 부모님과 사이가 멀어지긴 했으나 경제적으로 문제없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

도심의 호텔에 숙소를 잡고 조석을 해결할 만큼 그는 자립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부정한 정치권에 항거하다 죽임당한 학생회장 이바나시와 신부 지참금을 염려한 그의 여동생들의 죽음.

디나와 이시바 옴의 이야기까지.

혼자서 잘 살아왔던 것이 미안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만 생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만다.

현실에서 생생하게 아픔을 겪은 사람은 다시 차파티를 가지고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지만, 고통을 겪지 않은 순수한 영혼은 죄책감과 생에 대한 환멸에 몸부림치며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어느 순간 현실은 말할 수 없이 참혹하다.

그러나 말렉이 거지가 된 두 친구와 차파티에 관한 농담만 나눌 수 있었더라도 결말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는 모두 알 수 없다, 직접 뛰어들어라!’ 책장을 덮으며 작가의 간절한 외침을 들은 듯한 착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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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텀
찰스 부코우스키 지음, 석기용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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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이거 미친놈 아냐?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에 대한 내 생각은 책을 읽는 내내 줄곧 이랬다.

그는 끊임없이 성관계와 술에 탐닉한다.

그는 기차를 타고 가는 일자리에서 숙소와 음식을 제공받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도 하지 않고 내린다.

그는 부모에게 의절 당한다.

그는 가끔 들어간 직장에서 유혹한 상대와 일터에서 성관계를 갖기도 한다.

물론 그 사실이 발각되면 직업을 잃는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다.

그는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청소 방법을 듣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도 감독이 말해준 것보다 자신의 생각이 중요했다.

바닥을 닦는 일이 그에게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구석에 놓인 담배꽁초 따위는 그냥 두어도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헨리 치나스키가 처음부터 미쳤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내가 또라이라는 사실을 학창시절에 처음 알았다’(177p)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그건 따돌림을 당했을 때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는 얘기다.

어쩌면 이런 일에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며 자기를 지켰기 때문에 그가 미쳐갔을지도 모른다.

미치면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아니면 양탄자 위에 토한 벌로 토사물을 먹이려는 엄한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37p)

그가 내게 ‘미친놈’으로 정의 되는 사람이 된 이유를 하나로 정의하기는 역시 힘들다.

그는 잡역부이기도 하지만, 로스앤젤레스 시립대학에서 2년간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소설을 쓰고 있는 습작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단편소설을 쓰는 일을 꽤 꾸준히 해나갔으며 결국 그 중 「맥주에 절은 내 영혼은 세상의 모든 죽은 크리스마스트리들보다 더 슬프다」라는 단편은 여러 작가를 키워냈다는 미국 최고의 문학잡지 『프런트파이어』의 발행인인 클레이 글래드모어에게 낙점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뿐, 이후로 그가 변변한 작품을 썼다는 말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에피소드를 넣은 이유는 그가 미국최고의 문학잡지 편집장을 감동시킬만한 사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즉 아무리 이상한 말을 짓거리던 허랑방탕한 사람이라도 세상을 보는 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2. 부조리한 세상을 부조리한 사람이 이야기 한다

나는 그가 공부한 학문이 ‘저널리즘’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널리즘이란 사회의 모순점을 찾아내 고발하는 것이 아닌가?

내 생각이 맞다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시대 고발은 대개 여러 잡일거리를 나열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빵공장에서 그는 힘든 노동으로 미쳐가는 사람, 경영자만 배불리는 구조, 인간답지 못한 대우를 받는 노동자, 사회의 변화로 망하는 회사 등.

이 사실은 그가 실크 스타킹을 멋지게 신은 다리를 부모님보다 사랑하며, 싸구려 포트와인을 물보다 자주 마신다는 것만큼이나 진실하다.

그러나 이것은 저널리즘에서 흔히 사용하는 객관적 사실 전달과는 구별된다.

철저히 헨리 치나스키의 눈으로 보고 그의 머리로 생각한 주관적 이야기의 나열이다.

게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이 지독한 색광에 주정뱅이임을 독자는 잊지 않고 있다.

독자는 그의 말을 딱히 신뢰하지도 않으면서 반신반의하며 듣게 된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새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세상을 보게 된다.

3. ‘미친놈’의 이야기가 아닌, ‘미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이야기

역자 석기용 씨는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대답해보자. 거창하게 말해서,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소외, 수단화된 인간관계의 절망과 위선에 저항하며, 인간 본성의 실현과 진정한 인간관계의 회복을 추구하는 자유인, 혹은 아예 내친 김에 한술 더 떠서,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해 냉혹한 현실의 삶 속에서 현대인의 나아가야 할 바를 꿋꿋하게 실천하려 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인가? 글쎄, 아무리 좋게 봐줘도 그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치나스키는 그렇게 단순히 악당으로 분류해 미워할 수 있는 그런 사람도 아닌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주정뱅이 치나스키.

작가는 그를 통해 자본이 최고 덕목인 황금만능주의 사회에서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가장 낮은 자의 삶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사회의 잘못으로 돌리는 사회주의적 모순도 저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 자기계발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열심히 사는’ 인물을 넣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일부러 도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밑바닥에 있는 인생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일단 그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들려주는 과정 속에서 그가 얼마나 인생을 제대로 허비해 나가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넓게 깔린 그 잔디 위에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라는 꽃을 조금씩 섞는다.

잔디와 꽃이 어우러져 있는 공간은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일상의 공간이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누렇게 죽은 잔디에 초록색 페인트를 칠한 것일 뿐이며, 꽃 또한 반영구지만 향기 없는 조화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앞에서 이야기 했듯 저자는 사회의 문제점만을 꼬집지는 않는다.

역자 석기용 씨는 “치나스키는 뒤죽박죽 엉터리 같은 인간이지만, 그런 모습들에서 무엇에 주목해야 할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라는 말로 치나스키에 대한 논평을 유보한다.

솔직히 치나스키는 책임감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방탕하고 게으르다.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면 깜짝 놀랄 일을 서슴없이 한다.

그러나 그런 그도 사람이다.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

그는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한다.

잡지 출판사들의 배급총판, 신문사의 식자실, 자동차 부품 창고, 지하철 포스터 붙이기, 야간 청소 노동자, 발송계원, 건물 보수와 경비원, 미술재료 도매상 발송계원, 형광등 설비 창고일 등. 그의 방탕함이 그 일을 지속하지 못하게 한 적도 있지만, 과도한 노동이 그를 갉아먹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사람이 견디지 못할 노동은 사람을 기계화 한다.

헨리 치나스키가 그러게까지 변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는 개인의 잘못도 있지만 사회의 잘못도 무시하지 못한다.

원인을 제공한 것은 사회이니 사회의 잘못이 더 크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이 사실을 눈치 챘을 때에야 비로소 이 소설은 내가 ‘미친놈’의 이야기가 아닌, ‘미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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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 개정판
필립 얀시 지음, 윤종석 옮김 / IVP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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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으며 일찍이 교회가 내 고민이기 이전에 필립 얀시라는 사람의 고민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모이면 여러 사건과 사고 그리고 소문이 난립하기 쉽다.

하기 쉽다? 아니 ‘한다’라는 단정적 표현을 써도 무방하리라.

그리고 교회도 결코 그런 이름에서 놓여난 공간은 아니다.

이 사실은 내게 교회에 대한 회의를 가져다주었다.

머리가 좀 굵어지고 나서부터 나는 줄곧 생각했다.

과연 교회를 다녀야 하는 것인가? 혼자 집에서 성경책을 보는 것은 어떨까?

어렸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뭔가 받는 것이 기뻐서 다녔던 것 같다.

먹을 것. 놀잇감. 친구. 염려와 걱정.

그러나 나이가 한두 살 나이를 먹어 가면서 이제 내가 그런 것을 줄 입장이 되었을 때 나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 같다.

여전히 이해와 공감을 받기만 원했다.

그러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실망하며 교회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이 책에는 저자 ‘필립 얀시’가 좋은 교회를 찾아다닌 이야기가 나온다.

그 또한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었던 것 같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 소문의 온상이며 이기주의의 근원이지만, 내 마음에 드는 걸 내 놓아야 하는 곳.

저자는 ‘비판적인 소비자 정신’으로 교회를 대했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아쉽지만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가진 것을 모두 퍼주는 곳이 교회다.

다양한 직업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무지막지하게 기괴하고 힘든 동네다.

“‘교회는 비조합원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 유일의 협동조합 조직’(28p)”이라는 말을 윌리엄 템플 대주교가 괜히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뭘 바라고 교회에 가지만 제대로 다니자면 실상 내가 받을 것보다 나서서 해내고, 해줘야 할 것이 더 많다.

나는 책 속에 나오는 ‘라살 스트리트 교회’ 이야기를 읽으며 감동 받았다.

그 교회는 시카고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와 가장 가난한 동네의 중간에 있었다. 동쪽으로 두 블록만 가면 평균 연봉 5만 달러가 넘는 골드 코스트가 있고, 서쪽으로 두 블록만 가면 평균 연봉이 3만5천 달러 이하인 캐브리니 그린 공영 주택단지가 있었다. 라살은 두 지역을 잇는 ‘다리 교회’의 역할에 힘썼다.

교회의 위치적 특성에 따라 거리의 부랑자부터 고액연봉자까지 모두 한 교회에 다녔고, 그들은 서로 어울렸다.

‘끼리끼리 논다’가 통용되는 것이 사회라면 ‘모두 함께 논다’가 통용되는 것이 교회였다.

여러 가지 사례가 있었지만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기도시간에 이상한 소리를 하며 스트레스를 풀던 ‘아돌퍼스 버스비’라는 인물에 대한 예화였다.

그는 다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세상의 평화, 병자의 자유 등을 위해 기도하는 ‘회중의 기도’시간에 “주여, 휘트니 휴스턴과 그 기막힌 몸매를 지으심에 감사하나이다!”라던가 “이 교회 흰둥이 목사들의 집이 이번 주에 다 불타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했다.

사람들은 당황했고 난감했지만 그를 교회에서 내쫓지는 않았다.

대신 의사와 정신과의사를 비롯한 전문가 집단이 그를 ‘부적절하다’라는 단어로 설득하는 특수 사역을 맡게 되었다.

아돌퍼스, 자네의 분노는 정당할 수 있지만 분노를 표현하는 데는 적절한 방식이 있고 부적절한 방식이 있는 거라네. 목사의 집이 불타게 해 달라는 기도는 부적절한 것이지

그리고 교인들은 그를 차로 데려다 주기도 하고, 집에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이 헛된 것이었을까? 정식 교인이 아니었던 그는 세 번의 시도 끝에 정식 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물론 나도 모른다.

다만 아직도 그 미담이 현재진행형이길 바랄 뿐이다.

비신자에게 엄청난 반발을 살 말이겠지만 결국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삶이 예배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리지 못할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내 몫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교회가 필요하다.

앞에서 교회를 제대로 다니려면 뭘 바라기보다 할 일이 많다고 이야기 했다.

이것은 반대로 말하면 나는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만 다른 사람도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봉사할 의무를 지게 되므로 나 역시도 혜택 받게 된다.

물론 자신이 실천하지 않으려는 이기주의 속에서 이것은 요원한 일이다.

거듭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뭉쳐서 노력하자고 말 할 수밖에 없다.

가시에 찔릴까봐 혼자서 벌벌 떠는 고슴도치는 얼어 죽을 수도 있지만,

가끔 따끔한 가시에 찔려도 함께 붙어있으면 추위 속에서도 서로의 체온으로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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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
천운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수업시간에 배운 ‘신경숙, 은희경, 공지영’을 잇는 차세대 여성 작가는 누굴까.

나는 ‘김애란, 김려령 그리고 천운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대작가를 논하는 이 수업에 참 잘 어울리는 작가로 천운영을 선택하게 되었다.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읽을까 뒤적거리다 집어 온 것이 계기였다.

그때 나는 작가가 유명한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읽으면서 ‘어, 이 작가 누구지?’ 했던 감상을 확인해봤더니 ‘정말 괜찮다더라’ 하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내 안목에 잔을 높이 들었다.

작가가 주목받는 신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는 내 안목이 높다고 우쭐했었다.

그러나 나는 어두운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현실도 충분히 어두운데 꼭 소설을 읽으면서까지 튼튼하지 못한 내 심장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로맨스 소설을 좋아한다.

아름다운 캐나다의 자연을 그려낸 ‘루시 모드 몽고메리’나 탁월한 심리묘사로 정평난 ‘제인 오스틴’이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다.

그러나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두운 내용에서도 인생의 지혜를 발견하곤 하게 되었다.

이 책도 그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명랑하지 못한 인생들을 그리는 명랑.

반어법이 제목이 된 것은 첫 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명랑하지 못한 인생들 속에 그것을 바라는 우리의 모습이 담겨있어 책 속으로 내 마음은 한 없이 끌려 들어갔다.

이제 내 심장도 조금 튼튼해진 것이리라.

주인공들의 결핍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그렇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 알 수 없는 고독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딘가에 속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이 허락되는 경우는 드물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사람들.

그렇게 버림받은 기억들은 ‘늑대가 왔다’의 주인공을 자신이 에스키모라는 환상의 세계에 가두기도 한다.

‘낫’의 주인공처럼 스스로 세상을 버리는 것으로 삶을 매듭짓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그림자 상자’의 주인공은 죽음에 대한 가상 체험을 통해 새로 태어나고자 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몸짓들은 세상에서 떨어져 나온 외로운 영혼들의 처절한 몸짓이라는 것을 떠오르게 한다.

작가는 책을 통해 아무 갈 곳 없는 이 영혼들을 위로하자고, 손을 내밀자고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독자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이런 일도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관찰자의 입장만을 고수하지는 않지만, 내용이 주관적으로 흐르지 않게 하기 위해 작가는 보여주기 기법을 많이 이용한다.

주인공의 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이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이야기 해준다.

그리고 그것을 기름기 적은 담백한 문체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이라고 하는 이 책에 과함이나 지나침은 찾기 힘들다.

사실 이야기 속 상황은 ‘자살’이나 ‘죽음’ 그리고 ‘죽음에 대한 가상 체험’과 같이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내가 독자로서 글을 읽으며 그 결말들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나는 이것이 작가의 문체 덕분이 아닌가 한다.

꾸미기를 최대한 배제하고 그려주기나 보여주기의 방식을 선택.

감정을 행동으로 말해주는 이 방법이 독자에게 침착한 마음으로 등장인물의 심리를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두 줄을 넘지 않는 건조체 속에 녹아든다.

감정의 과잉 없이 독자에게 내용을 전달해준다.

또한 닳고 닳은 소재들을 다루지 않아 좋았다.

이 책에 어둡고 고리타분한 사랑 이야기는 따위는 없다.

대신 삶을 고민하는 안타까운 영혼들이 있었을 뿐이다.

명랑하지 않은 세상을 명랑하게 살고 싶은 소망.

나는 이 소설집을 통해 작가의 소망, 그리고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소망과 마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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