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미래 - 2013년 제3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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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적이다. 「침묵의 미래」를 읽으며 내가 내내 되뇌던 말이다.

‘관념’이란 말도 제대로 모르면서 말이다.

소설을 읽고 함께 실린 평론들을 읽었다.

나는 그 속에서 이 소설이 관념적이라 이야기한 몇 명의 전문가들의 생각도 읽을 수 있었다. 얼마간 안심이다.


*관념(觀念)- 1. 어떤 일에 대한 견해나 생각.
2. 현실에 의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공상적인 생각.
3. <불교> 마음을 가라앉혀 부처나 진리를 관찰하고 생각함.
4. <심리> 사고(思考)의 대상이 되는 의식의 내용, 심적 형상(心的形象)을 통틀어 이르는 말.
5. <철학> 어떤 대상에 관한 인식이나 의식 내용.


내가 생각한 이 소설은 2번 해석쯤 되겠다.

우리나라 소설을 많이 못 읽은 내가 단행본으로 나온 단편집은 모두 읽었다는 사실부터가 작가가 내게 주는 의미가 남다름을 알려준다.

'침묵의 미래'를 읽으면서 어디선가 박민규 작가의 냄새가 났다.

현실과 조금 거리가 있는 우주적 감수성을 지닌 작가.

나는 박민규 작가의 상상력이 지구보다 좀더 멀리 볼 수 있어 좋다.

지금껏 내가 본 김애란 작가의 작품은 추상보다 구체에 가까웠다.

방이 없어 시달리고, 취직자리가 없어 고민하며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물들 말이다.

‘소수언어박물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구체적이며 특별한 이름은 필요치 않아 보인다.

그들은 다만 소수언어를 박물관에서 읊조리다 주어진 시간이 끝나면 ‘멸’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다.

그 존재란 것이 하는 이야기는 슬프다.

‘없어지기 위해 수집되었다’는 말, '새로운 인생'을 찾아 떠났다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일.

억압된 구조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사회가 파괴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나무에 그려지고 돌에 새겨지며 태어났다. 내 첫 이름은 '오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나를 점점 '이해'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내 이름이었거나 내 이름의 일부였을지 모르는 그 단어를 좋아했다. 나는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 단순한 사랑, 단수이자 복수, 시원이자 결말, 거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노래였다. 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이었다. -33p 5-11

언어는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몸짓이 아닌 글자로 소통한다.

이 소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글자로 새로운 미래를 상상한다.

소수언어가 아닌 단 하나의 언어만 살아남은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같은 언어를 쓰는 문화권이니 세계가 한 나라를 이루어 모두 합심해 밝은 미래를 만들어 갈까?

이쯤에서 딴지를 걸지 않으면 아마 나다운 화법이 아닐 것이다.

나는 많은 이들이 같은 언어를 써야만 하는 사실을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다.

(물론 내가 영어 등 기타 언어에 소질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흠흠-)

『1984』에서 윈스턴 스미드가 지겹도록 하는 일은 '단어를 줄이는'일이었다.

언어를 줄인다, 단어를 줄인다, 생각을 줄인다, 생각을 통제한다.

다양성이 존중되지 못한 사회가 인간에게 살기 좋은 때는 없었다.

어쩌면 세계의 대표들이 커다란 원탁에 마주앉아 세계경제를 하나로 모으자고 했을 때부터 불행이 시작됐을지 모른다.

침묵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 어쩌면 우리는 나라별 인터넷을 끊고 각자 원시시대처럼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인가? 맞다.

그리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감시역을 꾸준히 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아직 침묵의 미래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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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2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 도전 미생 2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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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하고 싶다면 일단 너만 생각해.

모두를 만족시키는 선택은 없어.

그 선택에 책임을 지라고.


품을 좁혀서는 비겁한 모습이 된다.

실리에의 미련은 이미 오래전에 버렸지 않은가.

큰 꿈을 품고 드넒은 중앙에서 승부를 보기로 결심하지 않았던가.


지금 하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똑같을 거다.


들어오라며 넓게 벌렸으므로 무심히 쳐들어간다.

허허실실이다. 마음을 비우고 거친 파도에 몸을 맡긴다.

사실은 이 장면에서 이 한 수뿐이라는 것을 상대도 알고 나도 안다.

이 한수로부터 이 판의 골격과 상이 결정된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떨린다. 이젠 돌아갈 수 없다.

묘수 혹은 꼼수는 정수로 받는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망설임 없이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당신이 내 가난한 껍질을 벗겨줬어.

그냥이란 건 없어.

어떤 수를 두고자 할 때는 그 수로 무엇을 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계획이 있어야 해 그걸 '의도'라고 하지.

우연은 기대하는 게 아니라 준비가 끝난 사람에게 오는 선물 같은 거니까.

세상의 고수 중에 초식동물은 없다. 고수는 본능적으로 평등과 평화를 거부한다.

요석과 폐석을 한눈에 알아보는 것이 안목이다.

판 전체의 상을 볼 줄 알면 안목도 깊어진다.

폐석을 살리고 요석을 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를 하수라 부른다.

후회를 남기진 않았는지,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게......


새벽에 미생2권을 다 읽었습니다.

2권에서는 장그래가 드디어 원 인터네셔널의 사원이 됩니다.

존중받으며 일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그 곳에서요.

최종 pT를 마치고 합격한 인원은 네 명.

저 같았으면 일찍 결혼한 아기 아빠도 붙여줬을텐데, 아무래도 이야기의 진행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네 명만 뽑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길을 지나가면 지나가는 사람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배울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뭘 배워야 할까요?

배울 점은 옆에 있어야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진득하게 보고, 감동 받을 시간이 필요합니다.

볼수록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저는 아직 그렇게까진 되지 못했나 봅니다.

장그래도 이제 주위사람들에게 하나 둘 배워가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누구나 자기만의 바둑이 있지요.

자신이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받아들인다고 다른 사람의 바둑은 아닐겁니다.


아직 바둑을 두어가는 과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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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눈사람 - 1992년 제23회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
최윤 지음 / 조선일보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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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밖에 눈 왔어. 미끄러우니까 연탄재 있으면 밖에 좀 뿌려줘.”

이런 말을 듣게 된 학생은 아마 연탄재를 잘게 부수어 미끄러운 골목길에 뿌릴 것이다.

그리고 그 골목을 끼고 사는 아이들이 나와서 연탄재가 덕지덕지 묻은 눈으로 공을 굴려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할 것이다.

물론 흰 눈으로 만든 눈사람처럼 예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힘든 삶을 살아내는 우리의 아픈 모습일지 모르며, 누군가가 만들었다는 자체로 의미가 생긴다.

흰 눈처럼 예쁘던 회색 눈처럼 예쁘지 않던 우리는 모두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삶을 산다.

그러므로 마흔한 살에 혼자 살며, 노 교수의 조수로 일하는 ‘강하원’의 인생도 가치가 있다.

왜 우리 소설에는 이다지도 기구한 운명을 가진 사람이 많아야 하는지 알 수 없고 다소 불만이기도 하지만 「회색 눈사람」 속 주인공이 그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근대사회까지 우리사회를 점하고 있던 전쟁 때문일까, 아니면 이념전쟁의 산물인 분단의 역사 때문일까.

이도저도 아니면 무엇 때문에.

‘희망’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일까?

어둠 속 촛불이 더 밝아 보이듯, 절망적인 상황일수록 희망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과외를 하고 학기가 지나면 공부하던 책마저 팔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 하원은 육체적, 정신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다.

그때 ‘안’이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난다.

그는 동화 속 마법사 같다.

일거리를 해결해 육체적 곤궁을 채워주는가 하면, 그에 대한 사랑을 품게 해 정신적 곤궁까지 해결해준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 밝혔듯이 짝사랑은 때로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희망’이라는 단어로 더 잘 설명된다.

그 사람이 나를 봐줬으면 좋겠고 좀 더 잘 해줬으면 좋겠지만 그저 이편에서만 애가 닳을 뿐, 내색도 못하고 냉가슴만 앓기 십상이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돌아서서 상대의 행동이나 말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고 되새기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에 기쁨이 되기도 하고 괴로움이 되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한 가지 이름으로만 정의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짝사랑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좋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이번 경우처럼 가끔 삶의 의욕이 없던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하원은 결국 도움 받던 ‘안’에게 이용당했으나, 그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온정을 통해 새 삶을 얻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항상 성마르고 거칠게 대하던 세상에서 자신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인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뿌듯한 일인가.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안’이 하원의 여권을 요구하는 일이 처음에는 너무 심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우스운 건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하원이었더라도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는 것 이상으로 주는 대상에 애착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하원은, 받은 온정을 되돌려 줄 수 있어 기쁘지 않았을까.

그녀는 그 ‘희망’의 기억을 안고 다시 시골로 내려간다.

결실을 맺진 못했지만, 사랑을 하기도 하고,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해 줄 정도로 한 사회에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소설의 마지막에 그녀가 말한다.

동네 아이들을 모아 눈사람을 만들어봐야겠다고.

동경이건, 감사건 어떤 단어로 표현되는 감정인지 확실치 않지만 그녀가 ‘안’을 사랑했다는 것은 진실이다.

연적이라 짐작되는 김희진이라는 여성을 위해 자신이 힘든 와중에 돈과 노력을 쏟아 만든 여권을 줄 정도로 하원은 안을 사랑했다.

이제 그녀는 희진의 부고를 접하며 청년시절 풋사랑과도 작별을 고한다.

연탄재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회색 눈사람이 아니라 깨끗하고 아름다운 흰색 눈사람을 만들면서.

‘아픔은 늙을 줄 모른다’고 그녀는 얘기한다.

천만에, 아픔은 늙는다.

‘아프게 사라진 모든 사람이 그를 알던 이들의 마음에 상처와도 같은 작은 빛을 남긴다’고 작가는 말한다.

상처는 아물게 마련이다.

또한 ‘작은 빛’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결국, 아픔은 늙어 희망이 된다.

하원에게 그랬고, 안에게 그랬듯이.

작가는 독자에게도 그러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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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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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인, 금성인, 기린.

알바생, 푸시맨, 인류.

박민규 소설의 힘은 낯설게 보기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인물이 그러하다.

‘화성인’이야 그렇다 쳐도, 금성인이나 기린, 인류라는 말을 어디 가서 이렇게 자주 들을 수 있을까.

또, 낯설게 해서 얻는 효과는 도대체 뭘까.

출근시간에 늦을까봐 우는 사람도, 지하철에서 정액을 분사하는 사람도, 본드를 불다 유체이탈을 경험해본 사람도, 갑자기 소년가장이 된 청소년도, 따지고 보면 모두 인류다.

반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기. 1인칭 주인공 시점이지만 하나의 분류로 묶는다.

이것이 독자에게 등장인물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입체안경을 장착해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우는 여자와 변태 남자, 비행청소년, 불우청소년은 너무 멀게 느껴져 같은 의미가 숨어있으리라고 생각하기 힘들다.

그러나 각각의 인물들을 모두 합해 ‘인류’라고 부르는 순간 그들은 함께 의미를 획득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주인공 ‘나’ 또한 인류이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이 소설에서 인물은 ‘인류’와 ‘그 외’로 나눌 수 있다.

화자는 지하철에서 여러 인물들의 군상을 바라보다, 그들을 합해 ‘인류’라고 표현함으로써 자신 또한 지하철 안에 탑승해 버린다.

이는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편의점 사장이 여자애의 허벅지를 만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는 대번에 ‘만지는 게 나쁜 게 아니다. 그리고 고작 천원을 주는 게 나쁜 짓이다’(70p)라고 말한다.

자신이 인류이기 때문에 같은 인류가 당한 일에 감정이입이 쉽게 되는 것이다.

그저 물질만능주의의 신봉자의 대사 같다고?

그럼, 물어보자. 지구라는 행성 안에서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것이 인류 외에 도대체 누군가.

작가는 계속해서 각박한 경제상황과 유복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류의 군상들을 독자에게 들이민다.

이제 독자는 각박한 현실을 가볍게 풀어낸 글을 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한 치수 작은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불편해진다.

그리고, 아버지가 나온다.

마치 ‘엄마를 부탁해’의 엄마와 같이 소설 속 아버지는 부재를 통해 비로소 존재감을 획득한다.

함께 있으면 귀함을 모르는 존재, 오랜만에 다시 만난 아버지는 자신이 기린이라고 말한다.

작가가 기린의 속성까지 염두하고 썼는지, 겉모습만을 중심으로 썼는지, 관용어의 뜻에 기대서 썼는지는 책 어디에도 써 있지 않으므로 알 길이 없다.

그러니 내가 아는 기린만 말해본다.

‘후각, 청각, 시각이 뛰어나며 다양한 소리를 내나 그 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은’ 존재.

옛날부터 ‘귀하고 상서롭다’고 여겨진 존재.

이것이 사전적인 기린이다.

인류로서 자신을 기린이라고 칭한,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화자의 아버지는 인생점수가 거의 0점에 가까워 보인다.

돈도 못 벌어오던 무능력한 아버지는 일이 터지자 뒷수습을 하다 결국 도망치고 만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다시 만났을 때는 존재 자체가 도움이 된다고 말하며 끝까지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말은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다.

인류와 그 외. ‘그 외’에서 가장 큰 역할을 차지하는 것이 마지막에 한 번 등장하는 ‘기린’이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만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인류와 존재 자체가 상서로워 환영 받는 기린.

아버지는 현실 속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인물이다.

‘나’도 지금은 아버지의 존재 자체만으로 힘이 된다고 하지만, 집에 돌아와 그 전처럼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모습만 보여준다면 아예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래서 아버지를 ‘기린’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존재 자체로 환영받는 존재, 그 자체로 긍정되는 인물.

환영받지 못하던 아버지는 스스로 기린이 되어 환영해 마지않는 상서로운 동물로 변한다.

‘풉-’하고 웃는 독자 뒤에서 작가는 이제 함께 새로운 인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반갑습니다! 소설갑니다’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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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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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전화가 걸려온다.

소설가에게 우편을 보낸 한 명의 여인이다.

그녀는 다짜고짜 자신이 보낸 소포를 꼭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소설가는 비가 추적추적 오는 밤 여인이 보낸 소포를 뜯어 읽기 시작한다.

꽤 흥미로웠는지 정리해서 독자에게 이야기해 주려고 한다.

여기서부터 주인공은 여인으로 바뀐다.

둘 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소위 액자식 구성이다.

이제 여인이 쓴 글이 그녀의 목소리가 된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옛날이야기를 장황하게 몇 장 읊고서야 비로소 '흡혈귀임이 거의 분명한 그녀의 남편' 이야기를 한다.

여인의 성격을 짐작하게 해주는 부분이지만 너무 길다.

남편이 얼마나 '흡혈귀스러운지'에 대한 이야기는 장황한 앞의 분량과 비슷하다.

그의 서재에서 얼굴 부분이 오려진 옛날 사진들이 발견되고,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박식하며, 성관계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고, 밥도 죽지 않을 만큼만 먹는다.

대충 그녀의 남편이 인생에 회의적이며 달관한 자세를 보이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이 소설, 뭔가 어색하다.

김희연이라는 1인칭 주인공이 굉장히 주관적이어서 일까?

그녀는 남편이 '김치를 안 먹는 점'과 '할리우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점'을 흡혈귀스러움의 예로 든다.

요즘 아이들 중에는 김치를 싫어해서 전혀 먹지 않는 아이들이 많다.

물론 사람이라 불리는 족속들 중에 컬트영화광들도 많다.

그들이 존재하기에 컬트영화가 존재한다.

또, 아직 내가 아는 한 지구상에는 애초에 인간이 아니라면 영화라는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생명체가 없다.

백보 양보해서 그 안에 루마니아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흡혈귀들이 존재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김희연이라는 주인공이 이야기한 사실을 모두 믿겨질 만큼 신빙성 있게 느껴지진 않는다.

나는 읽어가며 사소한 것들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과연 이 여인이 서재에서 본 나무상자가 관이 맞을까, 사진에서 얼굴만 오려낸 것이 그녀 남편의 것일까.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녀가 그렇게 주장할 뿐이지 남들도 그렇게 느낀다는 객관적 지표가 너무 불충분하다.

심하게 표현하면 정신병원에 가기 직전인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렇게 미심적은 면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적일 것 같았던 소설가가 아무 의심 없이 여인의 이야기에 흠뻑 빠진 것도 어색하다. 실망스럽다.

과연 김희연이라는 여성의 어느 부분이 흡혈귀 같았던 것일까?

그녀가 환자가 아니라, 진짜 흡혈귀여서 자신의 이야기를 남편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이야기한 것이라 가정해보자.

여인은 강한 매력을 가진 인물에게 끌려 다닌다.

화가 나도 자신이 불쌍해 보이는 것이 싫어 애써 외면한다.

소포로 장황한 이야기를 적어 보내고, 비 오는 날 전화하는 효과를 냈지만 '자신이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면부지의 소설가에게 물을 정도의 사람이다.

그에 비해 남편은 다른 사람들이 일정한 격을 둘 정도로 어려워하지만 자기주장이 강하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낸다면 누구나 자신과 닮은 인물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여인이 흡혈귀 같다는 작가의 가설을 납득하기엔 두 사람의 이미지가 너무 동떨어져 있다.

그래서 작가의 짐작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게 이 소설은 마치 실패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전형같이 느껴진다.

독자인 나는 전혀 소설에 경도되지 않았다.

그녀가 흡혈귀인 것도, 그녀의 남편이 흡혈귀인 것도 나는 믿지 못하겠다.

내 짐작으론 그녀는 소설가 지망생이다.

지어 보낸 편지글 형식의 미숙한 단편소설, 그런 느낌이다.

아예 여인이 등장하지 않고 작가가 전설이나 민담을 들은 것과 같이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썼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뭐 이것도 어디까지나 그저 내 짐작일 뿐이다. 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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