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이루어주는 코끼리
미즈노 케이야 지음, 김문정 옮김 / 나무한그루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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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주여,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게 해주시고
제가 할 수 없는 것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위의 글은 '그건, 사랑이었네'에 나오는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신은 하나님이 아니고, 인도의 신 가네샤다.

이 시는 다만 책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준다고 생각해 넣어보았다.

책을 읽을 때 종종 전혀 연관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책들이 서로 닮아있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이 일상 생활에서 배울 점을 찾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술김에 불려나온, 팔이 네 개 달린 안미츠의 대가. 코끼리를 닮은 인도의 신 가네샤.

꿈을 이루고 싶은 주인공을 도와주기위해 가네샤는 매일매일 문제를 낸다.

구두를 닦아라, 복팔분을 해라, 공짜로 얻어라, 결심한 일응 계속 실천하기 위한 환경을 만든다 등.

이쯤 되면 책을 읽지 않고 제목만 들어도 책을 다 읽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출판사에서 목차를 구태여 정리해 둘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구성은 나중에 독자가 내용 정리하기에 어려움을 느낀다는 단점이 있다. (넣어 주시길 부탁드려요~! -_ㅜ)

하지만 사실 책의 뒤편에 '가네샤 명언집'과 '위인 색인'을 부록으로 넣어 확인하기에 무척 편리하다.

다만 개인적으로 책을 한 눈에 파악하기 쉬운 것은 목차다.

가끔 잘 써진 목차를 보면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 들 때가 있다. ^ ㅅ ^ ~*(목차 잘 쓴 책에 상을 주는 '목차상'이 만들어 지면 훌륭한 목차들이 더 많이 나오게 되지 않을까! -_-; 근데 이것마저 상을 주면 상을 남발하는 꼴이 될 듯 하기도... )



1. 성공하고 싶다.

사실 주인공이 그리 못난 사람은 아니다.

그가 말하듯이 그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고 인정도 받았다.

오히려 그처럼 되지 못한 많은 보통 사람들에게 선망의 위치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카사카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고층빌딩 맨션에서 상대적 박탈감으로 괴로워한다.(신자유주의의 폐해다!)

잡지나 TV에 자주 나오는 '가와시마'라는 사업가의 생일파티에서 그는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는다.

그리고 그들처럼 성공하고 싶고 변하고 싶다고 외친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예~전에 변하겠다며 떠난 인도여행에서 사온 코끼리 조각상에게 뺨을 맞대고 비비대며 고민을 이야기한다.

바보 같은 행동이지만 결국 그 덕에 가네샤를 만난다.

가네샤는 그를 바꿔줄테니 자기 말에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모든 희망을 가져간다는 계약서에 사인하라고 채근한다.



2. 성공을 위한 선택.

어쩌면 우리가 가장 두려워 하면서도 믿고 있는 것이 '불확실한 미래' 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워 도전하지 못하고,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도전하고 싶어한다.

이율배반적이지만 사실이다.

우리는 둘 중 하나의 선택지를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가네샤는 성공하고 싶다는 주인공에게 그렇다면 두 번째를 선택하라고 말한다.

가네샤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곧 고객이며 그 고객을 만족시켰을 때 성공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말이다.

세부 사항의 대전제인 이 말은 경제학부를 졸업한 작가의 세계관을 느끼게 해주어 재미있으면서도, 한 편으론 '일본인의 내면이란 이런 것인가?'하고 놀라기도 했다.



3. 성공의 주인공이 돼라.

소설 책을 읽을 때 나는 곧잘 주인공의 이름을 잊어버리곤 한다.

왜일까?

그건 바로 내가 주인공 입장에서 책을 읽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이름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된다.

그렇게 책을 읽으면 이야기가 좀 더 친근하게 여겨진다.

책을 읽으며 나는 주인공이 되었다.

가네샤에게 안미츠를 바치기도 하고,

그의 말에 따라 하나 하나 과제를 이루어가며 기뻐했다.

그러면서도 '이건 나중에 꼭 실천해 봐야지. 이건 하고 있던 거니 다행이네.'하고 수시로 3인칭 시점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3인칭 시점이 되었을 때의 나는 안도의 숨을 내뱉을 때가 많았다.

'그래. 이건 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이것도.'

그러나 이 책에 있는 것들을 실천하고 있다고 해서 내가 소위 '승자 독식'으로 불리워지는 성공한 사람의 축에 들 수 있을까?

역시 잘 모르겠다. 인간의 미래는 불완전 하니까.

그리고 높은 곳에 홀로 서서 웃는 것이 내게 성공은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성공을 원한다.

1등만이 의미있다는 '승자 독식'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해 자신을 병들게 만드는 무서운 경제학 논리일 뿐이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제대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구나!'하는 정도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와서야 가네샤도 말한다.

"성공만이 인생이 아니고 이상적인 것을 포기하는 것도 인생이 아니야. ... 세상을 즐겨, 맘껏!"

한 번뿐인 인생.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후회를 남기는 건 곤란하지 않겠는가?

뭐 물론 그러다가 나처럼 면접 보러 가서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나도 한 때 내 인생을 안타깝게 여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돌아와서 경험할 수 있었던 많은 일들에 감사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후회하지 않으려 버둥댄 나에게 잔잔한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도 이것을 느끼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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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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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차 선로에 사람 밀어 떨어뜨리기.

섬뜩한 제목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마음에 와 닿는 제목이기도 하다.

책의 중간중간에 저자는 이 질문을 대입해 봄으로써 정의의 바로미터로 사용한다.

기차가 선로를 달리고 있다.

운전 기사는 바로 독자 자신.

기차는 시속 100킬로미터로 질주하고있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브레이크는 말을 듣지 않는다.

이대로 진행한다면 인부 다섯 명이 철로에 있는 사람이 모두 죽는다.

하지만 반대편 비상 철로에는 인부가 한 명 밖에 없다.

,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이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 하며 또 다른 가정을 말해준다.

열차를 기다리는 덩치가 산만한 남자를 선로로 밀어 5명의 인부에게 위험을 알려줄 수 있는 방법도 있다고 말이다.

이제 독자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과연 어떤 것이 정의인가?

저자는 이 문제를 연이어 나오는 철학 사상을 가지고 차례차례 풀어간다.

공리주의, 자유주의, 이마누엘 칸트, 존 롤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서양 철학자를 모두 토론의 장으로 불러들인다.

그러나 저자는 과연 뭐가 좋은 가에 대한 답은 쉽게 이야기 하지 못한다.

아니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저자는 한 가지 사상이 그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이야기 하고

다만 이러 이러한 내용이 있다고 말해줄 뿐이다.

그것을 어떻게 읽고 받아들이는가는 오로지 독자에게 달려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게 저자는 어느 편의 손도 들어주지 않은 채로 책의 마지막까지 간다.

처음에는 왜 이 사람은 자기 주장을 하지 않지?

학자라면 자신의 주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책을 3분의 1을 읽었을 때쯤엔 나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고찰하는 것도 괜찮지!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2. 그래도 정의는 있다.

책을 거의 다 읽어 갈 무렵에도 나는 이 책을 그저 여러 정의에 대한 생각들을 담은 책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책은 저자가 주장하는 정의의 개념을 밝히고 있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결국 자신의 생각을 넣은 것이다.

저자는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360-361p)

그리고 그 이유를 마지막 이야기로 선택했다.

나는 이 책의 의미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하버드대라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학교의 교수가 정치 철학을 이용하여 정의를 이야기 하는 일은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연구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연구이기에 의미 깊다.

오늘날에는 천재 한 명이 기업을 먹여 살리고,

상위 몇 퍼센트가 나라를 바꾼다고 하는 둥 엘리트주의에 빠져있으면서도

지식인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머리를 쓰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일들은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이렇게 공동체를 위해 고민하는 사람이 존재하기에 미래에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고, 기대하고 싶다.

앞으로 인간이 동물보다 낫다는 정의를 일깨워줄 지식인들이 많이 나와주길 바라본다.

3. 목적으로서의 사람.

저자인 마이클 샐던 교수님의 정의는 이마누엘 칸트와 무척 닮아있었다.

사람을 수단으로 보지 말고 목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칸트.

친구를 죽이러 온 살인자에게도 선한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그는

꽉 막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있었던 사실이지만 살인자가 오해하게 만드는 호도성 진실을 언급함으로써

도덕법을 지키면서도 친구를 숨겨줄 수 있는 묘안을 제시한다.

칸트는 예외를 인정하기 시작하면 전체 도덕의 틀을 포기하게 된다고 말하며 도덕법을 지키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호도성 진실마저 꺼내놓지 않고 대놓고 세상을 우롱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잘못을 하고 호도성 진실’을 사용하여 변명만 늘어 놓는 것은 잘못이지만,

칸트가 말한 호도성 진실’은 도덕법에 대한 존중의 의미이기에 더 가슴아프다.

도덕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너무 많은 권리를 주고 있는 건 아닌가!

도덕법은 지켜져야 하는가?

공공의 이익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여 흩어져도 상관없는 것인가?

나는 지켜져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다를지도 모르겠다.

책이 묻는다. ... 정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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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어딘가 미친 구석이 있어야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예술가, 발음해보면 이 말이 얼마나 어색하게 들리는 지 알 수 있다. 가수나 작가, 화가가 아닌 예술가는 책이나 잡지 같은 활자 매체 속에서만 존재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 마음 속 깊이 와 닿는다. 그런 의미에서 자비에 돌란이란 배우도 찰스 비나메란 감독도 이 단어의 의미를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눈빛을 보면, 둘 다 반쯤 광기가 들어차 있다. 


가끔 생각한다. 폭력성이 강한 자녀에게 경찰을 권하는 부모도 있지만, 내향성이 다분한 자녀에게 예술을 권하는 부모도 있지 않을까. 마이클은 자신의 성향을 이해받을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영화를 보면서 연극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알고보니 원작이 연극이었다. 연극에서라면 아마 올리비아 역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보여주는 게 더 그럴 듯하지만, 그린이 “집에 올리비아가 있어. 난 늦게 들어가도 될 것 같아.”라고 말하고 피터슨이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한 배역이었다.(역할 비중에 비해 배우가 아까웠다) 


영화는 참으로 복고풍이다. 취조실의 녹음기나 만년필도 피터슨의 간호사복도 그린 박사의 자동차도 정신병원 자체도. 지난세기의 중후반이 아닐까 생각해 보지만 정확히 어느 시대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것보다 배경을 충실히 느끼게 해주었던 건, 마이클의 어머니가 쿠바에서 잘 나가던 성악가라는 사실과 남아공에서 마이클의 아버지와 만났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이나 영국, 오스트리아가 아니다. 영화의 배경은 내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세상에서 조금 다른 곳에 위치했다.


그것은 인물들이 주는 위화감에서도 드러난다. 처음부터 남자들에게만 색기를 철철 흘리지만 꼭 동성애자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마이클이나(내게는 그랬다)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 어울리지 않기도 한 피터슨과 그린은 이 세계가 진실인지 허상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올리비아(캐리 앤 모스)가 예전에 종횡무진 쏘다녔던 매트릭스의 세계처럼. 관객인 나는 물론, 감독이 만들어낸 허상임을 알고 있다. 피터슨의 눈물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영화에서 한 장면을 꼽으라면 휴게실에서 피터슨과 마이클이 피터슨의 딸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부분이다. 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이클에게 피터슨은 말한다. “그건 너와 내가 나눌 이야기가 아니란 걸 너도 알지 않니?” 그때 피터슨의 애가 다 닳은 듯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은 마이클이 바라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영화를 보며 눈물이 흘릴 만큼 내 마음은 움직였지만, 영화를 모두 이해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다음에 보게 된다면 ‘정신과, 이혼, 자녀’ 이 세 가지 키워드를 염두에 두고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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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 다큐멘터리
그러니까 이 영화는 가상 다큐멘터리다. “예전에 사람들은 그랬죠…….” 주름살 짙은 사람들의 회상 속에는 먼지가 많아 천으로 입을 가리던 시절의 이야기가 있다. 배경이 미국이니 서부개척 시대의 이야긴가 싶기도 하다. 그들도 말을 달릴 때나 광산에 들어갈 때는 입을 가렸다. 멋을 생각해서 그랬는지 마을 안에서 벌어지는 총잡이들의 대결에서는 입을 가리는 천이 등장하지 않았지만, 앞에서 언급한 ‘주름이 짙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 안에서 대결하려면 때때로 입을 가리는 일이 필요할 것이었다. 식물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오로지 ‘옥수수’만 재배 가능한 환경, 학교에서 우주 탐사를 가르치지 않는 미래의 어느 날 속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인터스텔라>에서 서두는 마치 관객에게 내미는 복선과 같다. 작가와 감독은 조각보 중 가운데 조각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한 귀퉁이에서 천천히 바느질을 시작한다. 소재는 같지만 모양과 크기가 서로 다른 조각들이 하나 둘 연결되기 시작한다.
 
 


플랜A vs 플랜B
병충해 입은 곡물들은 베어내지 않고 태운다. 불에 탄 토양은 메말라 바람이 불면 모래 폭풍이 되어 휘몰아친다. 어른이 된 머피가 사는 지구는 이제 벗어나야만 할 곳이 되었다. 호호 할아버지 브랜든 박사는 숨을 거두기 전 머피에게 고백한다. “플랜A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플랜A는 지구인들은 새 행성으로 이주시키는 것, 플랜B는 선발대가 정착해 세포 상태의 지구 생물들을 다시 키우는 것이다. 할아버지 브랜든은 자신과 오빠를 위해 아버지를 우주로 보낸다고 했지만 결국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플랜A가 없는데 플랜B에 의미가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 가족이 아프면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지만 생판 모르는 지구 반대편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고 눈물 흘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각한 전염병이나 잔혹한 살인을 당했다면 모를까 대부분의 사람은 내게 친숙한 사람의 죽음에 눈물 흘릴 뿐, 타인의 죽음에는 무관심하다. 세포형태로 다른 행성에서 자라나는 생명체에 나는 많은 애착을 느끼진 못할 것 같다. 무조건적으로 후대를 보존해야 할 만큼 인류는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존재일까? 설사 아무 연고도 없는 생명체들을 사랑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이 헌신짝처럼 버려진다면 동의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이제, 플랜C를 짜볼까.


플랜C
플랜C는 지구에 순응하는 방법으로 전적으로 내 생각이다. *르몽드 세계사의 기온상승 곡선을 보면 10만 년에 한 번씩 지구의 기온은 기온상승 임계선에 닿았다 온도가 떨어지며 빙하기를 맞이한다. 이 그래프에 따르면 1만 년 전쯤 기온상승 임계선에 다다르고 이제 슬슬 기온이 떨어지고 있어야 할 시점이다. 그러던 것이 1만 년 전부터 오르락 내리락이다. 이 사항을 두고 책에서는 기온이 2℃ 상승한 시점이 돌이킬 수 없는 임계지점이므로 도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극단적으로 기상이 급변한 지구는 엘니뇨의 발생 빈도가 높아졌으며, 유럽은 폭염에 휩싸이고, 아시아와 미국에 열대성 폭풍이 유례없이 자주 발생했다고도 밝히고 있다. 또한 기온 변화와 그에 따른 해수면 상승 등으로 생물의 다양성에 미치는 영향이 심각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물론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예전에 비해 비이상적으로 높은 것은 사실이나, 온도 면에서 보면 아직 최고점을 찍지 않았기 때문에 온도가 올라가는 것은 밀물과 썰물 같은 지구의 자연적인 흐름일지도 모른다. 온난화 자체가 비정상이 아니라 오히려 온난화를 막으려는 우리가 ‘지구 비정상 추진위원회’ 소속은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이산화탄소 규제 정책을 펴는 것에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높아진 해수면에 적응할 수 있도록 수중도시를 건설하고, 인간이 병충해 입은 곡물도 먹을 수 있게 변하는 것이 더 좋은 해결책일지 모른다.
 
*르몽드 세계사(휴머니스트, 2008)


​대작의 괴로움
대작의 괴로움은 한시도 쉬지 않고 관객을 몰아붙인다는 점이다. 두 번 혹은 세 번 봐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시나리오도 가끔 등장한다. 감독은 이것도 보여줘야 하고 저것도 인식시켜야 하며, 관객들은 한 장면이라도 놓치면 큰일이 날 것만 같은 강박증에 빠진다. 그에 반해 <인터스텔라>는 이야기를 되짚어 볼 수 있을만한 간극이 있다. 우주를 유영하는 동안, 파도가 몰아치는 동안, 곡식이 불에 타는 동안……. 이 시간들 속에서 관객들은 다음에 올 장면을 기다리며 있었던 일들을 곱씹는다. 빨갛게 충혈 된 눈을 부릅떴던 <인셉션>의 기억은 이 영화에 없다. 여백의 미를 채운 한스 짐머의 음악과 함께 관객은 어느새 철학의 세계를 유영하게 된다.
그렇다고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만 박사의 도킹 장면에서 이유는 말해주지 않은 채 ‘혼자서 도킹하면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해 나중에는 잠시 감정이 격해지기도 했다. 어째서 이유를 말하지 않았을까? 그가 도킹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주선이 파괴될지도 모르며 자신도 목숨을 잃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시도를 멈출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마 그가 계속 살아있으면 이후의 이야기 전개가 매끄럽지 못해서 였으리라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그러나 쿠퍼나 브랜든이 위험 요소에 대해 설명한다 하더라도 그가 이야기 전개에 문제를 주는 일은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만 박사는 자신의 연구를 위해 쿠퍼를 죽이려 했을 정도로 안하무인인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다른 사람이 자신을 생각해서 들려주는 말이라고 기껍게 들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아마 거짓말이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무시하면서 계속 도킹을 시도했으리라. 이야기에 개연성이 사라진 순간, 돌멩이가 나타나 매끄러운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고 사라졌다.
영화 속 결정적인 장면을 고르라면 쿠퍼가 블랙홀에 들어가서 만나는 5차원 큐브 세계다. 큐브 속에는 인류를 구할 재원인 머피의 방이 시시각각 펼쳐져있다. 쿠퍼는 그 중에서 자신이 머피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던 방에 도달해 신호를 전달한다. ‘STAY’ 처음에 말한 내용에 부합해 있고, 짧은 시간 내에 시계에 암호를 심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머피는 ‘여러 번’ 책이 떨어지는 현상을 겪었다고 말했지만, 쿠퍼가 큐브 속에서 책을 떨어뜨리는 장면은 영화 속에서 ‘단 한 번’뿐이다. 편집에서 삭제된 걸까, 장면의 극대화일까, 러닝타임이 문제였을까? 머피가 잠을 자고 있을 때 책을 떨어뜨리는 모습을 두어 번 보여주는데 5초도 안 걸렸을 것 같은데, 그 장면이 나오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럼 과거의 유령 얘기는 성립될 수 없는 것 아닌가?(내가 놓친 부분이 있기를 바란다) 나는 어째서 이런 소소한 일이 마음에 걸리는지 모르겠다.


유토피아를 꿈꾼다
앤딩크래딧을 끝까지 보고 나오는 마지막 관객이 되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그 소망은 성취되지 못했다. 한스 짐머의 음악을 들을 줄 아는 정상인들이 열대여섯 명 정도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 일곱 명 정도를 쿨하게 남겨두고 영화관을 나왔다. ‘한번 여행을 떠난 자는 돌아오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혼자 걸어 나오는 나를 불쌍히 여길 때, 영화관 복도를 걸으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배긴스도 프로도도 모험에서 돌아오지만 다시 모험을 떠난다. 샘같이 모험에서 돌아와 정착하는 경우는 흔치 않을지 모른다. <반지의 제왕>만을 예로 들어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 우리 주위에 ‘여행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배낭을 짊어지고 언제나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여행가이든 아니든, 우리는 모두 유토피아를 꿈꾼다. 세상에 없는 좋은 장소. 주변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대륙, 다른 사회에서 유토피아를 찾아다녔다면 사람들은 이제 지구를 나가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 같다. 에드먼드가 발견한 별의 환경이 악화되면 인류는 다시 모험을 떠나면 되는 걸까. 제 3의 별이 오염되면 또 다른 별을 찾으면 만사형통이다. 우리는 태생부터 수렵과 채집을 일삼는 유목민의 후손이니 어쩌면, 이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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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오래전 봤던 일본드라마가 보고 싶었던 것이, 리메이크작이 나온다고 해서인지 인간에 대한 성찰이 필요했던 시기여서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몇 주 전부터 <라이어 게임>이라는 일본 드라마를 다시 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처음 봤을 때는 기괴한 가면을 쓰고 나오는 게임 딜러 때문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하기 힘들었지만(감상 시간은 주로 밤이었고, 얼굴이 반씩 서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그 가면은 처음 보면 좀 두근두근 한다) 다시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귀여운 가면이라며 웃어넘기게 되었다. 정말,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다시 봐서 놀라운 점은 칸자키 나오(주인공. 인간은 서로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며 항상 바보 소리를 듣는다)가 진짜 바보가 아니라는 점이다. 내 기억 속에서 모든 문제는 아키야마(역시 주인공. 전직 사기꾼이자 심리학 교수로 바보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나오짱의 백마 탄 기사다)가 다 풀었었는데, 다시 보니 나오 짱 혼자서 푼 문제도 있고, 절대 바보로서는 생각해내지 못할 계산식들도 종종 사용한다.(물론 그런 점과 관계없이 모두에게 퍼주기 때문에 바보라고 불린다) 내 기억의 어떤 부분이 그릇된 정보를 저장했는지, 알 길이 없어 그저 답답할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작품을 리메이크 한다는 사실을 안 것은 시즌2를 반 정도 본 이후의 일이었다. 클릭 클릭, 인터넷 서핑을 시작했다. 많은 경우에 그렇듯 일본 드라마보다 출연진의 외관은 눈을 즐겁게 해주었지만, 기획의도가 역시 마음에 걸렸다.(물론 시청자 각자의 해석에 따라 작품의 성격이 결정되지만 글을 쓰겠다는 포부를 품은 나로서는 어떤 의도로 만들기 시작했는지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여주인공을 보다 주체적인 인물로 그리기로 했다’ 이 부분을 읽고, 눈을 깜박인 후 다시 한 번 읽을 수밖에 없었다.(애석하게도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주체성이 결여된 인물이 아니다.(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오히려 주체성이 너무 강해 평면적인 인물의 전형이라 해도 될 정도다. 드라마에서 그녀를 ‘바보’라고 부르지 않은 사람이 한 명은 있었던 가 고민하게 될 정도로 비웃음을 사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심지 굳은 인물이다.


1, 2회를 봤는데 리메이크한 우리나라 드라마의 설정도 나쁘지 않았다. 일본의 <라이어 게임>은 게임 대결을 중심으로 인간의 욕망에 대해 풀어나가 마치 정제된 심리학 실험처럼 드라마 속 세상이 또 다른 세계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각 게임마다 세상과 동떨어진 장소에서 게임이 진행되어 그렇다고 본다. 리메이크작은 방송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 나와야 하니 이런 생각은 줄어드리라 생각한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의 <라이어 게임>은 시청률에 목메는 방송국의 행태와 성공하고 싶은 증권가 애널리스트, 신체포기각서까지 들고 나오는 사채업자들을 등장시키며 냉엄한 현실을 느끼게 해주었다. 다만 여주인공인 남다정(김소은 분)이 하 박사(이상윤 분)에게 왜 처음 본 사이에 반말을 쓰냐고 한다던가, 스스로 아버지의 빚을 갚기로 결심해서 게임에 했다는 것 등으로 ‘주체적’이라고 말하면 곤란하다. 주체성을 돋보이게 하려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하기만한’ 인물이 아니라,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하지만 ‘지혜로워서’ 게임에서 이기고 남을 여력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인물을 그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그녀의 변신은 일본드라마에선 시즌2 중반을 넘겨서야 나오지만 시즌2를 만들지 않는 이상 극의 반을 넘기 전에는 꼭 나와야 할 캐릭터의 특징이라 생각한다. 그래 뭐, 내 생각이다) 칸자키 나오가 주인공인 이유는 게임을 잘 해서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절대선을 표방하는 ‘칸자키 나오’나 인간의 욕망을 조종하려 하는 신자유주의 축소판 같은 ‘라이어게임 사무국’이던, 대칭을 이루는 ‘남다정’과 ‘방송국’이든 둘 다 결국 극과 극이다. ‘인간의 속성은 정말 극점에 존재할까?’ 동물과 신 사이, 선과 악의 중간쯤에 위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나.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이득을 향해 끊임없는 배신을 일삼는 후쿠나가 유지(자기잇속만 챙기는 배신의 캐릭터에서 자기잇속을 챙길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절대선과 영합하는 캐릭터로 변모)의 변화가 극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착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모두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악보다 지혜로운 선이 필요하다. 두 번째 보면서야 비로소 보인 그의 존재 의미를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는 어떻게 그려낼까?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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