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겠지만,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성별을 생각하며 읽기보다 책 자체에 중심을 더 두는 편이다.

그러나 일단 한 책이 좋아지고 그 작가에 대해 관심이 생기면 내가 여성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특별히 여성작가들에게 좀 더 많은 관심이 가게 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추리 소설은 '애거서 크리스티' 영어권 소설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 작가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에 '여성'이라는 이름보다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더 깊이 각인되어 있다.

책의 마지막까지 읽고 내가 외친 말은 '역시, 노통브는 천재야!'였다. (이름을 먼저 쓰고 성을 나중에 쓰는 서양어법으로 미루어 볼 때 '아멜리'라고 말하는 게 옳겠지만 나는 '노통브'라는 성이 그녀의 신비하고 거친 상상력에 더 잘 어울리는 어감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부르길 더 좋아한다.)

하지만 사실 내가 그녀의 책을 많이 읽은 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작 작가로서 매해 가을마다 책을 낸다는 노통브는 펴낸 책만 해도 벌써 스무 권이 넘는다.

나는 그 중 '살인자의 건강법, 앙테크리스타, 시간의 옷' 그리고 이 책 '적의 화장법'을 읽었다.

그 중 '살인자의 건강법'을 제외하고는 모두 200쪽을 넘지 않을 정도로 얇은 책이다.

그러나 그 책들은 우리 삶을 꿰뚫는 주옥같은 문장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읽다보면 접은 부분 덕분에 책이 불어나곤 했고, 이 책 역시 그랬다.

적의 화장법. 제목만 들으면 아름다운 여성들이 나오는 이야기일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에 아름다운 여성은 단 한 명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입씨름을 열심히 하는 남자 둘이 전면에 나선다. 그렇다. 이 책에서 화장을 하는 사람은 남자다.

공항 대합실. '제롬 앙귀스트'는 비즈니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말쑥한 신사로 비행기가 연착되어 공항에서 발이 묶인 상태다.

그리고 그 곳에서 기묘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기묘한 남자의 이름은 '텍스토르 텍셀' 그는 ‘제롬 앙귀스트’를 따라다니며 자신의 말을 들어 줄 것을 종용한다.

이 책은 거의 대화체로 되어있다. 글을 쓰다보면 대화로만 상황을 표현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종종 느끼게 된다.

인물은 말로만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도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상황을 묘사하고 주인공의 표정을 말하는 것을 통해 독자에게 현재 상황을 인식시키고, 복선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서 사건을 이야기하는 세련된 방법이라고 인정받았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턴가 책을 읽을 때 장황한 묘사를 보면 '또 이거야?'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지나친 묘사는 독서의 속도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자칫 이야기의 흐름과 흥미를 잃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화로만 전달할 수 없는 사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많은 작가들은 묘사나 설명이라는 다른 수사법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에서 노통브의 천재성은 대화를 통해 나타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이 책은 거의 대화체로 되어있다. 독자는 거의 모든 정보를 대화를 통해 얻어 낸다. 이것은 '시간의 옷'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의 옷'에서 말씨름이 서로에 대한 주장에 그치고 복선의 의미가 약했다면, 이 책에서는 대화의 곳곳에 복선이라는 장치가 숨겨져 있다.

반전이 두 번이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줄거리는 말하지 않겠지만(미리 알고 싶으신 분은 34쪽을 차근차근 읽어 보시길 권한다.), 선생님들이 '문제 속에 답이 있다!'고 강조하듯이 이 책은 '대화 속에 답이 있다!'.

역자인 성귀수 씨의 표현에 따르면 '황당함> 역겨움> 섬뜩함> 충격'의 순으로 번역하는 동안 정신상태가 변화했다고 한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감정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충격 뒤에는 인간에 대한 묘~한 믿음도 싹텄다.

나는 기본적으로 성악설을 믿지만, 성선설에도 작게 손을 들고 싶은 이유는 인간이 선함 또한 가지고 있어서 일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나는 마더 테레사와 잭 더 리퍼의 인격에 같은 양의 선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악이 90% 정도라고 하면, 선은 10% 정도 되지 않을까?

반전에 대한 힌트를 하나 더 주자면, 제목의 화장(化粧)의 의미가 화장보다 위장(僞裝)에 가깝다는 것을 주지하며 읽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읽고 책을 본다고 해서 작가가 생각한 반전을 먼저 찾아내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고 속상해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노통브는 천재니까!

나는 천재가 아니라고 모두 살리에르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우리는 천재들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그 재능을 자신에게 이롭게 사용하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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