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사람 속을 꿰뚫어 본다고
‘1453년 흔들리는 조선’ 용한 관상쟁이가 한양에 입성한다. 그가 바로 두 말하면 입 아파지는 주인공 ‘내경’이다. 얼굴만 보아도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용한 재주로 뭇사람들의 관상을 보는 것은 물론이요, 살인사건까지 해결하니 과연 임금마저 탐낼 관상계의 슈퍼스타가 아닐 수 없다. 하여, 슈퍼스타는 문종에게 일을 하사받게 된다. 그의 재주로 역적모의를 할 것 같은 인물들을 찾아내라는 것이다. ‘내경’은 왕의 대리인으로서 일을 시작한다.
일단 소재가 괜찮았다. 묘 자리를 가지고 그렇게 정쟁을 일삼던 사람들이니, 관상을 가지고 싸움질을 한다 한들 이상할 건 없어 보인다. 신기한 것은 ‘풍수’나 ‘관상’이나, 미신 같지만, 이미 있는 것을 해석한다는 데서 공통점을 지닌다는 점이다. 또한 현상을 ‘분석’한다는 면에서 어떻게 보면 오히려 과학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실화에서 영감을 받으면 상상력의 보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점에서 상상력을 ‘관상’이라는 있을 법한 소재를 활용해 이야기를 잘 풀어나갔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양궁으로 치면 9점 이상 맞춘 것이 분명하다. 명궁이다.
보아하니, 도화빛이 돌고 입술이 붉은게……
「관상」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색’이다. 적재적소에 사용되는 색의 대비. 색을 이용한 미장센의 활용은 유채색과 무채색의 대비로 나눠보면 어떨까. 무채색과 유채색은 한 병에 담겨있어도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 같다. 영화 속 장면들도 이러하다. 복잡한 한양의 생동감 넘치는 유채색이 현실을 상징하고, 비현실적일 정도로 고즈넉한 내경의 집이 무채색과 짝 지워 진다.
영화는 이상 속에 사는 ‘내경’의 식솔들을 현실 속으로 끌어낸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과 어울리지 못해 한양에서 제대로 된 색을 얻지 못하고 희미하다. 반면, 항상 세상 소리에 밝고 기민하게 행동하는 연홍과 수양대군의 옷은 색이 가진 것을 마음껏 뽐낸다. 김종서 대감의 흰 옷 또한 무채색이지만 시골 필부들이 입던 느낌이 아니다. 휘황한 호랑이 기운을 보여준다. 그들의 옷은 그 자체로 빛이 난다. 그들은 현실 속에 제대로 뿌리박고 사는 이들인 것이다.
내경과 문종이 왕의 집무장소인 근정전에서 만나는 장면이 있다. 왕은 어좌에 앉아있고, 내경은 바닥에 꿇은 채이다. 수양대군과 단종도 같은 장소에서 만나 이야기 나누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색의 비교는 진가를 발한다. 문종의 곤룡포는 검붉은 색으로 보인다면, 그의 아들은 다르다. 단종과 수양과 사이를 가로지르는 밝은 빛이 그의 옷이 무슨 색인지 알아보기 힘들게 한다. 색이 없다. 현실이, 현실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 장면에서 단종의 어좌가 흔들리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미장센을 잘 살린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한명회’이다. 감독은 다분히 영화언어다운 방법으로 그를 포장한다. 그가 인상적인 것은 언어나 행동이 아니라 ‘모습’이다. 중반 이후까지 그의 얼굴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가면을 쓰고 고개가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관객은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하지만 그 모습을 통해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그는 밤에 이글거리는 불빛과 함께 등장할 때가 많으므로 섬뜩한 감정을 배가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인상적인 앞부분을 끝까지 끌고나가기는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미장센의 가면을 벗은 한명회는 연기파 배우마저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미장센이 뛰어났다고 볼 수 있겠지만, 영화의 완성도로 따진다면 전체적으로는 무게중심 분배에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
「관상」의 인물들을 살펴보며 어쩌면 하나 같이 이렇게 ‘영화적일’수가 하고 감탄했다. 소설적 인물이라 해도 구태여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주인공은 어떤 종류의 의지력이 강한 인물이며, 설득력 있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또한 성공 여부를 떠나 욕망 달성의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몇 번의 실패 후에 기회를 맞이해야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그렇다.
우선, 여섯 명의 주인공 중 대표적 인물인 김종서, 내경, 수양대군만 살펴보자.
‘김종서 대감’은 왕위찬탈을 반대하는 쪽이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그의 욕망이다. 그리하여 내경을 통해 왕을 설득해 역모 전에 처단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물론 단종은 수양대군을 믿기 때문에 몇 번이나 거듭된 실패 후에 얻게 된 귀한 기회이다.
‘내경’은 어떤가.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천민이 되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집안을 예전의 영화로운 상태로 되돌리고 싶고, 똑똑한 아들을 번듯하게 기르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한양에 올라와 처음에는 연홍에게 속아 고생하지만, 기지를 발휘해 김종서 대감과 연을 잇는다. 이제 관상으로 알아낸 역적 수양대군만 처리하면 다시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 영리한 수양대군에게 속아 다른 사람을 그로 착각하는 실수도 했지만, 지나간 일이다. 역모만 막으면 세상은 내경 편이다.
‘수양대군’은 역모를 꾀하는 쪽이다. 태조가 어떻게 세운 조선인데, 약한 왕 때문에 김종서 따위의 사대부들에게 넘어가는 꼴은 볼 수 없었다. 단종 독살 계획이 실패하고, 역모를 꾀하려 한다는 것도 그들이 눈치 챘지만, 먼저 치면 승산은 내게 있다.
이들 세 명의 욕망 구조는 시나리오 플롯의 ‘인물의 특징’에 꼭 맞아 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각기 다른 인물이 보여주는 복합적인 욕망이 거슬리지 않는다. 관객에게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작가가 ‘2010년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대상’을 수상한 인물인 만큼 설득력 있는 구성이 대단하고 생각했다.
물론 홍일점 ‘연홍’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내경’과 ‘팽헌’은 이상을 꿈꾸는 인물들이니 제외하고, 현실적 인물들 중에서 ‘연홍’은 여섯 명의 주인공 중에서 가장 평면적인 인물이다. ‘김종서 대감’마저 청렴을 추구하면서도 백표정치로 안으로 곪아 ‘입체적인 인물’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반면 ‘연홍’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류에 영합해서 잘 살아보려는 모습이다. 그녀를 중심으로 한 수양대군 ‘역적 증표 만들기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대군의 이마에 점을 찍는 일. 이것이 그녀가 입체적인 인물로 발돋움할 절호의 기회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변하지 않는다. 거사를 마치고 그들은 각자 볼일(?)을 해결한다. 물론 여자와 남자가 나뉘어서 말이다. 그때 남자들은 자신들끼리 농담을 주고받지만, 그녀는 혼자 생각한다. ‘그런다고 역모를 막을 수 있을까?’ 연홍이라는 인물은 주인공이 되기에는 너무 평면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평범한 소시민인 우리의 삶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삶에 적용해보자. 우리도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어떤 역할을 부탁받는다. 투표가 될 수도 있고, 서명이 될 수도 있고 기부가 될 수도 있다. 그 외에 어느 것이든 가능하다. 동전을 던지면 한쪽 면이 보이듯, 결과 또한 한쪽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과가 어찌되든 ‘연홍’처럼 ‘눈치’를 발휘해, 변한 세상에 영합해 살아간다. ‘연홍’이라는 인물이 의미 있는 이유는 우리의 현재 모습과 가장 가까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상은 변하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눈 내리는 날, 웬 노인네가 두려움에 떠는 장면. 바로 부관참시 당한 ‘한명회’다. 사전 수출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 장면에서「관상」이란 영화가 일단 한국사를 배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 생각했다. 한정된 관객들에게 스크린을 통해 제작진이 말을 걸어온다. “1453년은 끝났소. 그건 우리도 알지만, 당신들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이오.” ‘매경’의 집, 비현실적 세상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며 관객은 어떤 일이 펼쳐질까 상상할 여유를 갖는다. 현실적인 색을 품은 ‘연홍’이 무채색의 풍경에 들어선다. 그리고, 능글맞은 제작진이 다시 말을 걸어온다. “그런데 말이유. 이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 않우?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들더란 말이유. 어찌, 한 번 들어 보겠소?”
「관상」이 배경이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기획의도는 다분히 ‘현실’에 붙잡혀있다. ‘관상에 대한 관심은 과거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제작진은 우리는 예전처럼 ‘어떻게 보이는 가’라는 관상을 중시하며 살아간다고 기획의도에서 밝히고 있다. 이것을 읽으며, 역사가 미래학이란 말이 실감났다. 영화는 이렇게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관상’을 통해 역사적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그들의 노력이 허사로 끝난다는 것을, 허망하리만큼 잘 알고 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모가 끝난 후에, 자신이 왕이 될 상이냐고 묻는 ‘수양대군’에게 ‘매경’이 말한다. “왕이로소이다. 진정 왕이로소이다. 선정을 행해 주시옵소서.” 그 말에 ‘수양대군’의 대답은 매경의 아들인 ‘진형’을 죽이는 것이었다. ‘수양대군’이 말했다. “내 너를 죽여야 마땅하나 네 공이 높아 목숨만은 살려둔다.”(제가 생각나는 대로 옮겨 적은 것이므로 실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매경’과 처남 ‘팽헌’은 무채색의 필부 생활로 돌아간다. 바닷가 마을에 파도가 쉼 없이 올라오지만 이미 색을 잃은 그들의 일상은 바꾸지 못한다. 세상은 언제나 유채색으로 도도히 흐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수양대군’의 이마에 감히 ‘성형수술’을 했던 사건 또한 기억 될 것이다. 공모한 사람들이 살아있는 한, 그 이야기를 들은 이들이 살아있는 한. 15세기 ‘성형수술 사건’ 이것이 진정한 「관상」의 한 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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