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어딘가 미친 구석이 있어야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예술가, 발음해보면 이 말이 얼마나 어색하게 들리는 지 알 수 있다. 가수나 작가, 화가가 아닌 예술가는 책이나 잡지 같은 활자 매체 속에서만 존재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 마음 속 깊이 와 닿는다. 그런 의미에서 자비에 돌란이란 배우도 찰스 비나메란 감독도 이 단어의 의미를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눈빛을 보면, 둘 다 반쯤 광기가 들어차 있다. 


가끔 생각한다. 폭력성이 강한 자녀에게 경찰을 권하는 부모도 있지만, 내향성이 다분한 자녀에게 예술을 권하는 부모도 있지 않을까. 마이클은 자신의 성향을 이해받을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영화를 보면서 연극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알고보니 원작이 연극이었다. 연극에서라면 아마 올리비아 역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보여주는 게 더 그럴 듯하지만, 그린이 “집에 올리비아가 있어. 난 늦게 들어가도 될 것 같아.”라고 말하고 피터슨이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한 배역이었다.(역할 비중에 비해 배우가 아까웠다) 


영화는 참으로 복고풍이다. 취조실의 녹음기나 만년필도 피터슨의 간호사복도 그린 박사의 자동차도 정신병원 자체도. 지난세기의 중후반이 아닐까 생각해 보지만 정확히 어느 시대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것보다 배경을 충실히 느끼게 해주었던 건, 마이클의 어머니가 쿠바에서 잘 나가던 성악가라는 사실과 남아공에서 마이클의 아버지와 만났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이나 영국, 오스트리아가 아니다. 영화의 배경은 내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세상에서 조금 다른 곳에 위치했다.


그것은 인물들이 주는 위화감에서도 드러난다. 처음부터 남자들에게만 색기를 철철 흘리지만 꼭 동성애자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마이클이나(내게는 그랬다)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 어울리지 않기도 한 피터슨과 그린은 이 세계가 진실인지 허상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올리비아(캐리 앤 모스)가 예전에 종횡무진 쏘다녔던 매트릭스의 세계처럼. 관객인 나는 물론, 감독이 만들어낸 허상임을 알고 있다. 피터슨의 눈물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영화에서 한 장면을 꼽으라면 휴게실에서 피터슨과 마이클이 피터슨의 딸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부분이다. 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이클에게 피터슨은 말한다. “그건 너와 내가 나눌 이야기가 아니란 걸 너도 알지 않니?” 그때 피터슨의 애가 다 닳은 듯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은 마이클이 바라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영화를 보며 눈물이 흘릴 만큼 내 마음은 움직였지만, 영화를 모두 이해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다음에 보게 된다면 ‘정신과, 이혼, 자녀’ 이 세 가지 키워드를 염두에 두고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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