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피넛 1
애덤 로스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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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과 전쟁」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검은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평생 사랑으로 함께할 것을 서약한 부부가 서로를 죽일 듯이 증오하며 머리 터지게 싸우다가 급기야 이혼 법정에까지 이르게 된 실제 사례를 극화한 실화 드라마였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는 상우(유지태)가, 이제 그만 “우리 헤어지자!”고 단호하게 말하는 은수(이영애)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무기력하게 항변한다. 하지만 황홀한 사랑도 끔찍한 전쟁으로 변한다는 것을 한번 경험한 적이 있는 은수는 상우의 물음을 단박에 자르고 야멸치게 “헤어져!”라고 자신의 말을 한다. 네 사랑은 아직 변하지 않았어도 내 사랑은 이미 변했으니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는 불멸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너의 현재형 마음은 아직 변하지 않았어도 너를 사랑했던 나의 과거형 마음은 이미 변했으니까.

애덤 로스는 『미스터 피넛』에서 ‘사랑해서 결혼했습니다. 하지만……’의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여 세 남자로 하여금 아내의 죽음을 꿈꾸게 한다. 아내를 여전히 사랑할 뿐만 아니라 아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아내의 죽음은 결혼으로 들씌워진 의무와 속박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를 되찾아 과거의 인생을 청산하는 동시에 새로운 인생을 도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처럼 느껴진다. 황홀한 사랑이 ‘결혼’이라는 현실을 거치기만 하면 도대체 왜 끔찍한 전쟁으로 변질되는 것일까?

사랑이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변해도 결혼의 법적, 사회적 구속력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연인이라면 서로의 사랑이 변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상처받은 마음만 보듬으면 되지만, 부부라면 갈가리 찢긴 마음을 달래는 외에 결혼 제도로 얽히고설킨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간성의 밑바닥까지 내보이는 진흙탕 싸움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결혼을 선택했어도 결혼이라는 사회제도의 속성상 일단 결혼 이후의 사랑에는 법적, 사회적, 관습적, 도덕적 강제성이 부여된다. 아무리 사랑이라도 강제성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것은 나의 자유를 구속하는 굴레로 옥죄여든다. 어쩌면 나를 강제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본능일지도 모른다.

결혼은 대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서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더욱 가깝게 밀착되고 싶은 마음 외에는 다른 무엇도 계산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야 결심하게 된다. 법적, 사회적 구속력으로 연인을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엮어주는 결혼을 통과하면 언제까지나 장밋빛 ‘봄날’이 이어지리라고 전망한다. 자잘하게 다투는 일도 있겠지만 그야말로 사랑싸움일 테니 그것도 두 사람 사이에 권태가 감히 깃들지 못하도록 사랑의 긴장감을 유발하기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불꽃 튀는 사랑의 불멸과 불변을 믿는 뜨거운 열정의 계절이 지나고 나면, 사랑도 변한다는 냉정한 판단 아래 사랑의 대상을 가늠하는 차가운 이성의 계절이 돌아오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고 마음먹었지만, 이제 내가 무엇을 감수하고 있는지 조목조목 따져보게 된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나의 인생을 짓누르는 짐인 것만 같다. 그리고 내가 살았을 수도 있으나 살아보지 못한 다른 인생들이 달콤하게 나를 유혹한다.

애덤 로스는 처음부터 앨리스 페핀의 죽음을 들이밀면서 서스펜스와 미스터리 형식을 빌려 마치 동전의 양면 같은 사랑과 결혼의 비극적인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미혼의 잘생긴 의사를 약혼자로 둔 수잔 헤이스는 자신의 불륜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한다. “나는 결혼하고 싶었어. 하지만 나는 사랑에 빠지고 싶었어.” 마치 사랑과 결혼은 별개라는 듯이, 일단 결혼하면 사랑은 끝장난다는 듯이. 애덤 로스는 이 소설에서 결혼 이후 사랑이 왜 그렇게 변질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수긍이 가는 모든 문장들을 이용한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는 데이비드 페핀도, 그런 그를 조사하는 형사 샘 셰퍼드와 워드 해스트롤도 사실은 모두 아내의 죽음을 꿈꾸며 전쟁을 치른 전력이 있는 인물들이다. 그들 중 두 사람은 어쩌면 전쟁 끝에 정말로 아내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연민과 환멸과 절망과 인내를 지긋지긋하게 오가는 사랑이, 급기야 죄책감과 의무감밖에 남지 않은 사랑이 순전히 결혼 탓일까?

애덤 로스는 세 부부 가운데 유일하게 워드와 한나 해스트롤 부부에게만 희망적인 미래를 제시한다. 한나의 고통은 애매모호하게 그려져 독자들에게 충분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다소 부족하지만(사실 부부 사이에 벌어진 일은 무엇이 진실인지 그 부부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워드는 아내의 마음을 뼈저리게 이해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침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아내를 밖으로 끌어내려고 온갖 방법을 처절하게 동원하던 워드는 급기야 홀로 절망적인 울음을 터뜨린다. 어떤 묘책을 강구해도 요지부동이던 한나가 그제야 침대를 떠나 그에게로 왔을 때, 워드는 “견딜 수가 없어.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라고 흐느낀다. 그리고 “이제야 드디어 당신이 이해했네.”라는 한나의 말.

앨리스와 데이비드, 한나와 워드, 마릴린과 셰퍼드 그들이 끊임없이 서로에게 했던 말은 ‘당신은 절대 이해 못해’였다. 그것은 ‘제발 나를 이해해 줘’의 반어적인 표현일 것이다. 체로키 인디언들은 ‘나는 너를 사랑해’ 대신 ‘나는 너를 이해해’라고 마음을 표현한다. 이해할 수 있으면 사랑하지 못할 것은 없으니까. 사랑이 변하는 이유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감정 호르몬의 짧은 유효 기간 탓도, 결혼 탓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한없이 너그러웠던 마음이 차츰 옹졸해지자 몰이해라는 이기적인 괴물이 사랑까지 망각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임

1. 이 소설의 제목이 왜 ‘미스터 피넛’인지를 알게 됐을 때 눈물이 났다. 앨리스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땅콩이기도 하지만, 앨리스가 유산으로 잃어버린 땅콩 모양의 태아들이기도 하다. 앨리스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대목이었다.

2. 처음에는 앨리스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타살이라면 앨리스를 살해한 범인이 정말로 데이비드인지에 집중하게 됐는데 사실 이 소설에서 누가 진범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진다. 특히 알프레드 히치콕의 맥거핀 효과(사건을 전개하기 위해 중요한 역할로 도입하지만, 막상 도입된 다음에는 그 역할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장치)를 차용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말이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회상되는, 앨리스와 데이비드가 사랑에 빠졌던 시절에 함께 들었던 영화 강의 ‘결혼과 히치콕’이 내내 소설의 주제와 오버랩된다. 이쯤 되면 애덤 로스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는 생각도 든다. 히치콕을 훌륭하게 오마주하는 동시에 자신의 주제도 근사하게 형상화해 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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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예술을 꿈꾸다 - 상자유와 방황의 야누스 예술과 생활 4
쉬레이 지음, 이영주 옮김 / 시그마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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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랗게 탁 트인 하늘을 마음껏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을 올려다보며 부러운 마음이 한 번도 들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어디, 사람뿐일까. 대지에 맞닿아 살아가는 모든 동물들에게는 지구의 중력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게 되는 순간이 수시로 찾아올 것이다. 원숭이가 어쩌다 나무에서 떨어질 때, 닭 쫓던 개가 지붕만 쳐다봐야 할 때, 생쥐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고 싶을 때, 하룻강아지가 호랑이에게 반격하고 싶을 때, 새우가 고래 싸움에 잘못 끼어들었을 때, 개구리가 깊은 우물 안에 갇혔을 때…… ‘날개만 있었더라면’이라는 바람은 더욱 간절해진다. 날개만 있다면 땅에 들붙어서는 불가능했던 꿈도 너무나 편리하게 가능해진다.

비행의 꿈은 날개가 없는 이 땅의 모든 것들이 영원히 꿈꾸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그 꿈의 프리즘을 통해 단 한 번도 나의 자연스러운 공간으로 온전히 가져보지 못한 하늘과 허공을 자유롭게 누빈다. 쉬레이가 엮은 『비행, 예술을 꿈꾸다』에는 비행과 날개를 향한 꿈의 모든 파편들이 혼재되어 있다. 생텍쥐페리부터 천사와 악마, 도교의 우인(羽人),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카로스, 하늘을 나는 양탄자,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의 하늘을 나는 천공의 섬 라퓨타, 이탈로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 코지모 피오바스코 디 론도, 자크 앙리 라르티그의 사진, 『서유기』의 손오공, 연날리기까지 비행과 날개라는 프리즘이 굴절시키는 꿈들의 환상적인 이미지는 이토록 다채롭게 변주된다.

불멸의 어린 왕자를 탄생시킨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지구별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가 중 한 사람이지만 비행 자체를 사랑한 비행사이기도 했다. 전쟁(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우편 비행사로, 전쟁 중에는 전투기 조종사로 하늘을 누볐다. 그 비행에 대한 열정적인 경험이 『인간의 대지』, 『야간 비행』, 『남방 우편기』에 아름답게, 강렬하게, 치열하게, 고결하게, 사랑스럽게 녹아 있다. 비행으로 인간의 마음을 생텍쥐페리만큼 뒤흔든 사람은 없었다.

그의 실종사로 이어진 마지막 비행조차 신비스럽기 그지없는데, 그는 1944년 7월 31일 전쟁 중 마지막 정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비행에 나섰다가 하늘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프랑스 남부 상공에서 항공 촬영 임무 수행 중. 아직 귀대하지 않음.”이라는 짤막한 비행 기록과 “나는 죽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정말로 죽는 것은 아니야.”라는 동화만 남긴 채 말이다. 생텍쥐페리가 사라진 그날 아침에 독일군이 그가 비행했던 지역에서 단 한 대의 비행기도 격추하지 않았다는 공식 기록에 의하면 그의 실종은 더욱 불가사의하다. 게다가 비행기의 추락에 따른 잔해도 줄곧 발견되지 않아 생텍쥐페리의 죽음을 둘러싼 전설만 무성해졌다. 이 책에는 장 폴 마리의 「생텍쥐페리의 마지막 비행」이라는 인상적인 글이 실려 있는데, 1998년에 생텍쥐페리의 팔찌가 발견됐고 2003년에 그가 마지막으로 탔던 비행기의 잔해 일부가 인양됐다고 한다.

결국 어린 왕자처럼 자신의 별로 돌아간 줄 알았던 생텍쥐페리는 추락을 했던 것이다. 쉬레이는 비행의 이중성에 대해 말한다. “무거움과 가벼움, 생과 사, 자유와 속박, 이승과 저승, 쾌락과 우울……” 하늘로 날아올라도 언젠가는 다시 땅으로 내려앉아야 한다. 영원히 하늘에 머물 수는 없다. 비행기가 아무리 높이 비상해도 연료가 바닥나기 전에 땅에 착륙하지 않으면 추락이 예정되어 있다. 두 날개를 가진 새조차도 그 날개를 쉬어 가기 위해 발 딛을 땅을 찾아야 한다. 생텍쥐페리도 날아올랐으니 내려앉았을 뿐이다. 하지만 대지로 내려앉은 것은 무거운 육신일 뿐, 그의 영혼은 새털같이 가볍게 더욱 높은 곳으로 날아오르고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끈질기게 비행을 꿈꾼 인물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을 그린 화가로 유명하지만 조각가, 건축가, 음악가, 해부학자, 수학자, 식물학자, 과학자, 천문학자, 무기 기술자 등 다재다능한 그의 천재성을 수식하는 말은 수없이 많다. 무엇보다도 그는 탁월한 발명가였는데, 그가 평생 매달린 발명품은 바로 날개였다. 「비행은 영혼의 일이다」에서 타오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날개에 대해 이야기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비행의 꿈을 이루기 위해 새의 날개에 집중한다. 그는 진정한 비행은, 비행기 같은 비행기구를 이용한 기계 비행이 아니라 새처럼 두 날개를 펄럭여 공기를 유연하게 가르며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타오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인공 날개를 만드는 데는 실패했지만, 만약 비행기 제작에 힘썼더라면 라이트 형제 이전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실패 요인을 본능과 모방의 차이에서 찾는다. 원래 날개가 있으니 날아야 하는 본능을 가진 새와는 달리, 날개 없이 태어난 인간에게는 새의 날갯짓을 모방하는 능력이 있을 뿐이다. 인간이 아무리 모방을 해도 궁극적으로 새의 비행 본능과 완벽하게 동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가 아니니까.

프랑스 사진작가 자크 앙리 라르티그의 흑백사진들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공중에 잠시 떠 있는 찰나를 포착한 사진을 즐겨 찍었다. 공중에 높이 떠 있는 공은 곧 땅으로 떨어질 테고, 계단에서 뜀박질을 하느라 잠시 두 발이 전부 허공에 뜬 사촌 여동생도 곧 안전하게 착지할 테고, 높은 다리에서 우산을 펼친 채 뛰어내리느라 잠시 허공에 머문 형도 곧 강물로 첨벙 떨어질 것이다. 그들이 모두 곧바로 추락할지라도 라르티그의 사진 속에서는 비상의 순간에 영원히 멈춰 있다.

인간은 기계의 힘으로 중력을 극복하기 전에도, 극복한 후에도 여전히 비행을 꿈꾼다. 비행기를 타면 하늘을 날며 자그마한 창으로 구름밭을 내다볼 수 있고 우주선을 타면 하늘 밖 달나라까지 여행할 수 있지만, 그런 물리적인 비행이 언제나 불가능을 꿈꾸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날개가 완성되어 인간이 새처럼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다면 비행을 향한 꿈은 잦아들까. 어쩌면 비행의 불가능한 꿈은 영혼의 날개만이 이루어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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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있어준다면
게일 포먼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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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남은 사람에게 신경이 쓰였다. 그것이 죽음의 자리라면 더더욱 저세상으로 떠나간 사람들보다 홀로 이 세상에 남겨진 사람이 가여워 견딜 수 없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한꺼번에 잃고서 혼자 살아남은들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다시 살아갈 의지를 마음에 품으려면 얼마나 큰 용기를 내야 할까? 근원적인 상실감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과 사무치는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라는 것이 과연 있기나 할까? 그래서 ‘일가족 사고’ 뉴스를 보면 가슴부터 덜컥 내려앉고 그중에서 누군가 홀로 생존하면 안도의 마음에 앞서 눈물이 왈칵 솟아난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가 슬프게 각인된 것은 수잔 때문이었다.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는 아슬란으로 하여금 나니아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우리 세계에서 어린아이를 불러내게 하는데, 아슬란은 나니아의 탄생을 지켜보았던 디고리와 폴리 다음으로 페번시가의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도 불러들였다. 그러나 나니아의 멸망 이후 진짜 나니아에는 수잔을 빠뜨렸다. 수잔은 나니아를 까맣게 잊어버린 채 어른이 되려고 안달하느라 오지 못했다고 다른 형제들이 대신 말했다. 피터와 에드먼드와 루시가 진짜 나니아로 오게 된 것은 우리 세계의 대형 열차사고 때문이었다. 그 아이들의 부모도 같은 열차를 타고 있다가 죽고 말았다. 결국 페번시가에는 수잔만 남게 되었다. 수잔이 ‘나니아를 까맣게 잊은 어른’은 나니아에 초대받지 못한다는 비유의 희생양일 뿐임을 잘 알지만, 또 이 이야기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남은 수잔의 외로움에 집중한다는 것은 『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중심 주제를 흐리는 일임은 더더욱 잘 알지만,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맴돌았다. 수잔은 얼마나 외로울까?

『네가 있어준다면』의 열일곱 살 소녀 미아도 그렇게 홀로 ‘남은’ 또 한 명의 수잔이었다. 평범하고 행복한 미아네 가족의 평화로운 일상에 어두운 그림자 따위는 깃들 틈이 없을 것 같지만, 대상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교통사고는 미아와 가족의 생사도 불시에 갈라놓고 만다. 그 참혹한 사고로 육체에서 이탈된 미아의 영혼은 엄마와 아빠의 처참한 주검을 목격하고 간신히 숨만 붙은 채 끔찍하게 망가진 자신의 육체도 내려다본다. 어린 남동생 테디는 사고 현장에서 찾지 못했지만 곧 자신만 남겨둔 채 엄마, 아빠와 함께 죽음의 나라로 떠나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엄마와 아빠, 남동생까지 모두 잃은 미아에게 남겨진 것은 ‘가족 없이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가족과 함께 죽을 것인가’를 홀로 선택하는 일뿐이다.

간신히 살아남는다고 해도 앞으로의 인생에는 가장 가까이에서 끝까지 나를 위해 응원해 줄 가족이 없는데 자신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은 어떤 선택을 하든 사무치게 외롭고, 지독하게 무섭고, 끔찍하게 슬프고, 다른 무엇보다도 가혹한 일이다. 나라면 생사의 결정권을 포기할 것이다. 그게 홀로 남겨지는 것보다 덜 힘들고 더 쉬울 테니까. 미아도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실과 중환자실을 긴급하게 오가며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자기 육체를 지켜보면서 비로소 죽음보다 삶이 두려울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다. “죽는 건 쉽다. 사는 게 어렵지.”

미아를 죽음보다 두려운 삶으로 이끄는 것은 생기 없는 자신의 육체를 찾아와 그래도 남아달라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이 세상의 사람들과, 미아와 미아네 가족이 그들과 함께했던 추억과, 미아가 가장 좋아하는 첼로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래도 미아에게는 남겨진 것이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모와 삼촌, 사촌들, 미아가 깨닫기도 전에 먼저 미아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주는 단짝 친구 킴, 장르는 달라도 미아의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미아가 어떤 모습이어도 세상에서 가장 펑키한 여자로 봐주는 록밴드 보컬 남자친구 애덤, 그리고 첼로. 무엇보다 “재수 없는 계집애!”라는 말을 들으면 “그건 그냥 페미니스트의 다른 이름일 뿐이야.”라고 우쭐해하는 엄마나, “누구나 그냥 떨면서 버티는 거란다.”라고 무대 울렁증을 느끼는 미아를 안심시키는 아빠나, “12월이 되면 나도 여덟 살이야! 그럼 나도 어른이니까 ‘테디’가 아니고 ‘테드’라고 불러야 돼. (단짝 여자친구) 케이시 카슨이 그랬어!”라고 꼬맹이이길 거부하는 테디는 미아가 살 수 있다면 죽음을 선택하길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미아를 홀로 남겨두지는 않았을 것임을 미아는 알고 있다. ‘그래도 살아!’와 ‘그래도 남아줘!’라는 절실한 외침에 미아는 마지막 힘까지 그러모아 화답한다.

미아는 어려운 선택을 했다. 잘했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미아에게 말해 주고 싶은데 그 말이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미아의 선택을 지켜보고도 미아 같은 상황에 처하면 언제든 쉬운 선택을 포기하지 않을 나의 그 말은 섣부른 격려와 어설픈 위로로 미아를 아프게 하기만 할 것이다. 언제든 미아일 수 있지만 아직은 미아가 아닌 사람의 너무나 이기적인 마음일 테니까. 미아의 선택은 ‘사무치게 외롭고 지독하게 무섭고 끔찍하게 슬픈 이야기’의 진정 행복한 결말일까? 나는 여전히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다. 그래서 게일 포먼의 『네가 있어준다면』은 줄곧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삶의 희망을 한 자락 남겨두는 듯하고, 또 줄곧 삶을 이야기하면서도 죽음이 곳곳에 유혹의 덫을 놓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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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텐의 엘레오노르 - 중세 유럽을 지배한 매혹적인 여인
앨리슨 위어 지음, 곽재은 옮김 / 루비박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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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세계를 지배하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다’라는 말은 남성중심사회가 된 역사에서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여성들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항상 밝은 쪽이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현재도 물론 어느 정도는 통용될 수 있는 것 같지만―의 역사에서 여성이 도드라지게 활약한 것은 주로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정치의 희생양이 되거나 왕의 배후를 조종한 악명 높은 것이었을 경우가 많다. 중국의 미녀들과 전면에 등장한 여왕들을 보고 있노라면 여성들의 권력에 대한 욕망이나 야망 등이 남자와 전혀 다를 것 없으며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치열하고 더 극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앨리슨 위어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중세를 지배한 에레오노르의 삶을 재조명한 이야기다.

12세기 유럽, 중세의 봉건 유럽에서 여성의 위치는 말 그대로 남성의 피지배자이자 정숙함의 표본이 되어야 했다. 귀족 가문이라 할지라도 여성이 교육을 받는 것은 드물었고 기껏해야 수도원에서의 신부수업이 전부였다. 이런 시대에서도 엘레오노르는 아버지 기욤 공작의 도움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똑똑하고 아름답게 성장했다. 그뿐만 아니라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왕실령보다 더 큰 영지를 물려받을 상속녀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와 결혼했지만 수많은 염문을 뿌리고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면서 구설수에 휘말린 그녀는 자의로 이혼한 후 루이 가의 라이벌이었던 앙주 가의 앙리와 재혼하게 된다. 이후 앙리는 전쟁을 통해 잉글랜드의 왕 헨리 2세가 되며 그녀의 영토 때문에 이후 백년전쟁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후 엘레오노르는 왕자들 간의 세력 다툼에도 개입하여 자신의 아들에게 남편을 공격하게 하여 결국 리처드 1세와 이후 존을 왕좌에 앉힌다. 이 리처드 1세가 바로 사자심왕 리처드였다.

과거의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정확하거나 자세한 사료들이 없기 때문에 현재의 평가는 사람에 따라 엇갈리게 마련이다. 악명 높았던 인물들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다. 엘레오노르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잔혹했던 인물이나 낭만적인 여주인공 정도의 평가를 받던 엘레오노르를 앨리슨 위어는 놀라운 능력과 수완―물론 자신의 매력을 무기화하는 성적인 부분까지도 포함해―을 지닌 유능한 통치자로 보고 있다. 당연하게도 이런 평가가 백 퍼센트 정확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앨리슨 위어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수많은 사료나 가문의 문장이나 벽화 등을 통해 시대를 고찰한 가장 공들인 엘레오노르의 이야기다. 이는 또한 엘레오노르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현명한 조력자, 철의 모습을 지닌 어머니와 같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훌륭한 전기인 동시에 잘 쓰인 중세 유럽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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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베이커 자서전 : 성장
러셀 베이커 지음, 송제훈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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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자서전은 딱 두 종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성공―물질, 권력, 아무것이나― 후에 잘난 체하고 싶어서 쓴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말이다. 놀랍게도 전자의 자기 자랑식 자서전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는데 무엇보다 제목이 굉장히 화려하다는 것이다. 역경, 고난, 용기, 희망, 세계 같은 단어들이 들어간 자서전이라면 조금 의심을 해도 좋을 정도로 화려하게 제목을 짓는다. 또한 내용도 천편일률적이다. 어렵지만 올바른 어린 시절을 겪었으며 청년 시절에 무언가에 도전해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하게 되었다는 보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의 자화자찬이 가득 넘친다. 자서전 내내 비장미가 흐르다가 찬가가 터져 나오는 식이다. 자서전을 찍어내는 매뉴얼이라도 있는지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들의 전기를 살짝 각색한 듯한 느낌의 자서전이 수도 없이 많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기계발서식 자서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역시 이런 이유로 나는 자서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굉장히 색다르다. 『성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자서전은 마치 꽤나 유쾌한 성장소설 같은 그런 느낌이다. 20세기 후반 미국 언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칼럼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성장』으로 평전/자서전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수상한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은 과연 어떻게 다를까?

러셀 베이커는 여덟 살에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아들에게 갔어야 할 모든 적극성은 여동생인 도리스가 가져가버렸고 러셀 베이커는 반짝이는 빈 병과 깡통을 좋아해서 고물상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소극적인 소년이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자신감을 키워 주고자 신문을 파는 일을 시켰고, 이것이 러셀 베이커가 언론계에 입문하게 된 경위였다. 어머니의 강요로 3년 동안 신문을 팔게 된 러셀 베이커에게 비즈니스적 자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아들의 작문 실력을 눈여겨보고 작가가 될 것을 권한다. 적극성 따위는 없어도 되고 이야기를 좋아하던 러셀 베이커는 결국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처럼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은 기존 자서전과는 이야기하는 방식이 크게 다르다. 어린 시절의 고난과 역경이 이후의 성공을 이야기하기 위해 던져놓은 밑밥이 아니라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진지한 어린 시절의 삶 자체다. 어디 그뿐인가?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은 자신이 풋내기 기자가 되어 좌충우돌하다 결혼식을 치르는 이야기까지가 전부다. 시간이 제법 지난 마지막 장의 짧은 이야기도 어머니의 이야기로 끝맺는다. 자서전이지만 성공한 이야기나 자신을 드러내는 데 관심이 없는 성장소설 같은 느낌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자서전이 자신이 이루어놓은 것―물질이건 권력이건 명예건―에 관심이 없을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자서전이 러셀 베이커 같은 이야기여야 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겠지만 자서전이 이렇게 유쾌하고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좋은 이야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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