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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베이커 자서전 : 성장
러셀 베이커 지음, 송제훈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10월
평점 :
이 세상에 자서전은 딱 두 종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성공―물질, 권력, 아무것이나― 후에 잘난 체하고 싶어서 쓴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말이다. 놀랍게도 전자의 자기 자랑식 자서전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는데 무엇보다 제목이 굉장히 화려하다는 것이다. 역경, 고난, 용기, 희망, 세계 같은 단어들이 들어간 자서전이라면 조금 의심을 해도 좋을 정도로 화려하게 제목을 짓는다. 또한 내용도 천편일률적이다. 어렵지만 올바른 어린 시절을 겪었으며 청년 시절에 무언가에 도전해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하게 되었다는 보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의 자화자찬이 가득 넘친다. 자서전 내내 비장미가 흐르다가 찬가가 터져 나오는 식이다. 자서전을 찍어내는 매뉴얼이라도 있는지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들의 전기를 살짝 각색한 듯한 느낌의 자서전이 수도 없이 많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기계발서식 자서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역시 이런 이유로 나는 자서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굉장히 색다르다. 『성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자서전은 마치 꽤나 유쾌한 성장소설 같은 그런 느낌이다. 20세기 후반 미국 언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칼럼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성장』으로 평전/자서전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수상한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은 과연 어떻게 다를까?
러셀 베이커는 여덟 살에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아들에게 갔어야 할 모든 적극성은 여동생인 도리스가 가져가버렸고 러셀 베이커는 반짝이는 빈 병과 깡통을 좋아해서 고물상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소극적인 소년이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자신감을 키워 주고자 신문을 파는 일을 시켰고, 이것이 러셀 베이커가 언론계에 입문하게 된 경위였다. 어머니의 강요로 3년 동안 신문을 팔게 된 러셀 베이커에게 비즈니스적 자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아들의 작문 실력을 눈여겨보고 작가가 될 것을 권한다. 적극성 따위는 없어도 되고 이야기를 좋아하던 러셀 베이커는 결국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처럼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은 기존 자서전과는 이야기하는 방식이 크게 다르다. 어린 시절의 고난과 역경이 이후의 성공을 이야기하기 위해 던져놓은 밑밥이 아니라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진지한 어린 시절의 삶 자체다. 어디 그뿐인가?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은 자신이 풋내기 기자가 되어 좌충우돌하다 결혼식을 치르는 이야기까지가 전부다. 시간이 제법 지난 마지막 장의 짧은 이야기도 어머니의 이야기로 끝맺는다. 자서전이지만 성공한 이야기나 자신을 드러내는 데 관심이 없는 성장소설 같은 느낌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자서전이 자신이 이루어놓은 것―물질이건 권력이건 명예건―에 관심이 없을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자서전이 러셀 베이커 같은 이야기여야 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겠지만 자서전이 이렇게 유쾌하고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좋은 이야기임에는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