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 하이웨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31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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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가 모리미 도미히코를 좋아하는 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판타지를 거침없이 끌어들여 현실에서도 이질감 없이 가능해지도록 뻔뻔하게 펼쳐 보이는 그의 천연덕스러움 때문이었다. 도무지 언제 어느 곳 어디쯤에서 뚱딴지같은 판타지가 불쑥 튀어나올지 종잡을 수 없는 예측 불허의 전개 방식도 그를 특별히 아끼는 데 한몫했다. 모리미 도미히코는 머릿속에 어른의 계산법은 통용되지 않는 어린아이의 즉각적인 순수한 세계를 아직도 간직한 사람 같았다.

그러니까 책 읽은 감상을 지극히 개인적으로 남기는데도 이리저리 궁리하고 앞뒤를 재어보며 잔머리를 굴리는 나와는 달리, 그는 자기 이야기가 남에게 어떻게 비춰질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자신도 자기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모른 채 머릿속에 제멋대로 떠오르는 대로 손끝에서 단어가, 문장이,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뭔가 심오한 의미를 간직한 척하는 허세를 부리지 않아 그의 이야기들은 유쾌하게 즐기면서 마음껏 사랑스러워하기에 그만이다.

『펭귄 하이웨이』는 다른 소설들에 비해 좀더 머뭇거리면서 어른의 생각이라는 것을 시도한 듯하다. 여전히 모리미 도미히코 최강의 매력인 귀엽고 엉뚱하고 아기자기한 장면들이 넘쳐나지만 말이다. 세계의 끝, 세계의 종말, 혹은 캄브리아기의 바다, 태초의 바다, 세계의 시작, 혹은 미지의 세계라는 거대하고 심오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려니 이전처럼 천진난만한 자세만을 고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먼저 주제를 떠올리고 그 주제를 형상화할 이야기를 구상한 후 자신의 매력적인 개성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맹랑한 ‘초등학생’ 아오야마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열한 살인 아오야마는 “나는 초등학교 4학년밖에 안 됐지만 벌써 어른에 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하루하루 세계에 대해 배워 나가면 나는 어제보다 조금씩 훌륭해진다. 어른이 되는 날이 왔을 때 내가 얼마나 훌륭해져 있을지는 짐작도 못 하겠다”고 진지하게 정색하는 꼬마 녀석이다. 같은 반에서 가장 힘세고 싸움 잘하는 친구의 권력 구도와 속성을 연구하는가 하면, 자신이 살고 있는 소도시의 곳곳을 탐험하여 지도를 그리기도 한다. 게다가 아오야마는 사소하고 잡다한 연구부터 우주, 혹은 세계의 끝과 시작이라는 거대하고 심오한 연구까지 갖가지 연구들을 진행하면서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노트에 꼼꼼히 기록하는 메모의 달인이다. 아오야마는 이 메모 습관이 어른만큼, 제 또래의 대다수 아이들보다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아오야마가 날마다 하나씩 배우는 만큼 훌륭해질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장담하는 바람에 아무리 애어른처럼 생각하고 행동해도 역시 아이구나 싶었다. 하나를 배우면 하나는 잊어가게 마련인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어제 알게 된 것들을 모두 내일까지 가져가지 못하게 하는 기억력의 한계는 모든 사람들을 ‘날마다 조금씩 훌륭해지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그래서 어른이 된 내가 시간이 흘러 성인의 육체를 가지게 된 데 반해 여전히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해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해서 앙앙 우는 아이처럼 철없고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옹졸한가 보다고 말하면 그건 민망한 변명에 불과할까? 아오야마처럼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열심히 메모했더라면 ‘짐작도 못할 만큼 훌륭한 어른’이 됐을까? 어제 읽은 책도 가물가물한데…….

아무튼 그런 아오야마가 열중하는 연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치과 간호사 누나이다. 열한 살배기 아이 주제에 아오야마는 누나의 봉긋한 가슴에 열중한다. 그런데 아오야마는 소위 야동에 침을 꿀꺽 삼키는 성인 남자들과 달리 여자의 가슴을 엉큼하지 않게 순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의 진수를 보여준다. 엄마 가슴이나 누나 가슴이나 봉긋하기는 다를 바가 없는데 왜 누나 가슴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바라보게 되는지, 왜 언덕만 바라봐도 자동적으로 누나 가슴을 떠올리게 되는지 수수께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오야마가 해결해야 할 수수께끼는 누나 가슴뿐만이 아니다. 남극도 아닌 일본의 소도시에 난데없이 출현했다가 증발해 버린 펭귄들, 좁은 수로와 강에 출몰하는 흰긴수염고래같이 생긴 재버워크들, 재버워크의 숲속 초원에 자리 잡은 ‘바다’는 현실 세계의 아오야마에게는 비상식적이고 비현실적인 미지의 존재들이다. 그리고 『펭귄 하이웨이』의 그 모든 수수께끼는 누나를 향한다. 아오야마의 풋풋한 첫사랑으로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였던 치과 간호사 누나는 아오야마가 수수께끼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점차 현실성을 잃어가다가 급기야 펭귄, 재버워크, ‘바다’처럼 신비로운 미지의 존재로, 가장 비현실적인 존재로 변한다.

콜라 캔을 던져서 펭귄을 불러내고(콜라 캔이 허공에서 펭귄으로 변신한다니 모리미 도미히코다운 발상이라고 한참 웃었다. 특히 가장 압권인 것은 누나가 초록색 우산을 돌리자 그 우산 위로 꽃과 식물들이 앞다퉈 피어나고 자라나다가 열매들에 날개가 돋아 펭귄으로 변신하는 장면이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환상적인 장면이라 모두 인용하고 싶지만 무려 세 페이지나 할애되어 있으므로 124~126쪽이라는 것만 표시해 둔다), 꿈속에서 재버워크를 만들어내고, ‘바다’의 크기에 따라 건강 상태가 달라진다면, 누나는 더 이상 ‘인간도, 지구인도(365쪽)’ 아니다. 그렇다면 누나는 외계인? 그러나 모리미 도미히코는 누나의 정체에 대해 궁금증만 가득 부풀린 채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미지의 존재로 남겨두었다. 누나를 무엇으로 생각하든 그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여겨도 될까?

누나가 태어난 곳은 ‘바다’이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SF 소설 『솔라리스』의 바다와 닮아 있지만(『솔라리스』에서 ‘바다’를 착상했음을 “스타니스와프 증후군(23쪽)”이라는 깜찍하고도 끔찍한 병으로 드러낸다), 이 ‘바다’는 캄브리아기의 바다, 즉 태초의 바다로 자기 영역을 확대하여 자신이 집어삼키는 모든 세계를 무로 되돌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사실 『펭귄 하이웨이』를 일본SF대상을 받았다고 해서 ‘SF’로 한정 짓고 싶지 않은 만큼 아오야마의 ‘성장’에도 방점을 찍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매번 미지의 세계를 만나 지금껏 나를 이루었던 세계를 끝내고 앞으로 나를 이루어갈 새로운 세계를 시작하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특히 열한 살 아오야마에게는 아직 세상은 온통 미지의 세계일 것이다.


덧붙임
1. “우리 세계에 있을 수 없는 것, 존재하면 안 되는 것, 하느님이 만들다가 실패한 곳, 세계의 찢어진 균열, 망가진 구멍” 같은 것으로 ‘바다’의 정체를 결론짓는 것은 ‘바다’를 너무나 일차원적인 역할로 단순화하는 것 같다.

2. 모리미 도미히코는 『펭귄 하이웨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펭귄 하이웨이』는 쉽게 말하면, 교외 주택가를 무대로 미지와의 조우를 그린 소설입니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SF 소설 『솔라리스』를 무척 좋아해서, 이 소설이 아름답게 건축했던 것처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경계선을 그려보려 했습니다. 교외에 사는 소년이 온 힘을 다해 세계의 끝에 도달하려는 이야기입니다. 어렸을 때 생각했던 근원적 의문과 욕망, 그리고 꿈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쏟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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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혼비의 노래(들) - 닉 혼비 에세이
닉 혼비 지음, 조동섭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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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려고 읽은 책을 뒤적이는 중 박주영의 아스날 입단 소식이 전해졌다. 물론 당연하게도 닉 혼비 역시 이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닉 혼비는 이제 두 명의 Park을 기억할 것이다. 번번이 자신의 팀 아스날에게 골을 넣으며 굴욕을 맛보여준 박지성과 이제 자기 팀의 공격수가 된 박주영. 축구가 아닌 노래를 주제로 한 에세이에 이렇게 축구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뻔하다. 영국(잉글랜드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겠지만)의 사람들에게 축구와 음악을 빼놓는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리버풀을 응원하고 비틀즈를 사랑하거나 맨체스터시티와 오아시스를 함께 사랑하는 곳이다. 이것이 그들의 삶이고 닉 혼비야말로 아스날의 영원한 추종자 아니던가.

작가로 유명해진 닉 혼비이지만 실제 글쓰기는 음악 평론으로 먼저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닉 혼비의 노래(들)』은 평론이 아닌 음악에 대한 에세이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곡과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평범한 구성의 에세이로 다행(?)하게도 축구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피버 피치』에서 축구광으로서의 닉 혼비의 모습을 봤다면 『하이 피델리티』에서는 그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었고 이 책에서는 아예 음악을 말한다. 음악을 평론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에세이일 뿐이다. 가사가 없는 음악을 싫어하고 흔해 빠진 팝뮤직에 빠져 자꾸 듣게 된다는 솔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물론이고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당연하게도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음악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다. 섹스의 사운드트랙으로 가장 좋다는 카를로스 산타나의 삼바파티(Samba Pa Ti)를 들어보지 않고 어떻게 그가 하는 이야기에 공감을 할까. 다행히 인터넷 덕에 쉽게 음악을 찾아 들을 수도 있으니 그의 글을 읽기 전에 유튜브에서 한 번쯤 검색해 보시는 것도 좋으리라. 책의 첫 곡인 틴에이지 팬클럽이라는 60년대스러운 이름을 가진 밴드의 노래가 모던록이라는 사실에 놀라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음반 <Born to Run>의 <Thunder road>에 대한 닉 혼비의 이야기는 고해성사에 가깝게 들린다. 마지막 음악인 로스 로보스의 <El Cancionero>는 어떠한가. 음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박스셋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음반 가게와의 인연 이야기 같은 평론가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저 음악을 듣고 음반을 사는 음악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에 마음을 풀고 공감하며 집중할 수 있다.

닉 혼비의 이야기에 노래들을 더 깊은 감동으로 이끈다는 책 소개의 공치사는 제쳐두고라도 작가 자신의 개인적이고 솔직한 이야기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각 이야기를 읽기 전에 해당되는 노래를 들어본다면 더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고 좋아하던 노래가 등장한다면 훨씬 더 즐거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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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 세계문학의 숲 4
바진 지음, 김하림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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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은 아는 만큼 바꿀 수 없을 때 무기력한 고통으로 몸부림친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실 앞에 제대로 한번 저항해 보지도 못한 채 관념 속을 헤매다가 상처 받고 좌절하는 지식인의 자화상은 조금도 낯설지 않다. 학창 시절, 일본이 우리나라를 부당하게 침략하고 파렴치하게 압제했을 때 지식인의 좌절과 방황을 그린 시와 소설 들을 필독서니 교과서 지문이니 수능 언어 영역 지문이니 어디에서고 무수히 반복해서 토막토막 마주했다. 그때마다 정답은 언제나 따로 정해져 있었지만, 나는 무용지물처럼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지식이, 그 지식을 처음에는 열렬히 신봉했을 지식인이 딱하기만 했다.

지식은 오히려 독처럼 스며들어서는 잠자는 정신을 깨워 잔인한 진실을 가리는 현실의 달콤한 거짓을 분별케 하고, 무지로 굳어 있던 양심을 펄떡이게 하여 퀭하게 핏발 선 두 눈을 부릅뜬 채 분노에 휩싸이게 한다. 세상에 이런 법은 없어! 분기탱천한 외마디를 내지르며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본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다 알고 있어도 세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작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을 일삼는다.

그러나 그게 어디 특정한 시대에만 국한된 이야기이던가? 지금 우리나라의 위정자들도 별다르지 않다. 공직의 최고 자리를 차지하고는 개인의 이익에 유리하도록 어제는 그렇게 말했어도 오늘은 이렇게 말하면서 내일은 저렇게 말한다. 어제 내가 무슨 말을 했든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냥 라디오로든 TV로든 그때그때 나 자신의 이익에만 부합한 말들에 적당히 당의를 입히면 된다. 어차피 국민 한 사람이 청와대로든 국회로든 정부 부처로든 직접 찾아와 조목조목 따질 일은 좀처럼 없을 테니 그저 철옹성에서 모르쇠로 일관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밑바닥에서 국가와 역사를 떠받치는 모래 알갱이 같은 사람들은, 일찌감치 권력과 지배력에 눈뜬 소수의 사람들이 세계를 휘젓는 대로 마구 휩쓸려 스러진다.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아도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지,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저 묵묵히 감내하면서 살아 있는 한 열심히 아등바등 살아갈 수밖에.

바진의 『차가운 밤』은 모래 알갱이들의 이야기이다. 1944년에 쓰기 시작하여 1947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의 1945년 충칭을 배경으로 한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과의 전쟁이 벌어져 충칭으로 피난한 왕원쉬안의 고단한 가족 이야기가 전부이다. 왕원쉬안과 그의 아내 청수성은 전쟁 이전에는 이상적인 교육에 대한 신념을 공유하면서 함께 대학 교육을 받은, 열정적이고 전도유망한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지탱해 주었던 그 지식이, 그들의 심장을 뜨겁게 두드렸던 그 지식이, 평화와 안락한 생활을 담보하던 가산을 뒤로한 채 피난 온 충칭의 전시 생활에서는 한낱 무용지물인 액세서리로 전락해 버렸다. 그들의 미래이고 꿈이고 희망이었던 지식은 한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현실 앞에 모든 가치를 빼앗긴 채 환멸과 체념과 절망을 남긴다. 급기야 당장 필요한 것은 장사 수완과 아부와 연줄과 돈인 현실에 굴복하여 왕원쉬안과 그의 어머니는 지식을 후회한다.

   
  “어머니처럼 배우신 분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당초 내가 공부를 한 것이 후회스럽다. 더욱이 아범에게 공부를 시킨 것도 후회스럽고. 내가 아범의 일생을 망쳤구나. 나 자신도 망치고. 사실 나는 어미 자격도 없다.”
“이런 시대에는 누구라도 방법은 있어요. 단지 우리 같은 사람만 쓸모가 없을 뿐이지요.”
 
   

어쨌든 당장 먹고살기 위해 왕원쉬안은 쥐꼬리만큼도 안 되는 박봉을 바라며 출판사에서 자기 생각에 반하는 허섭스레기 같은 원고를 교정하고, 청수성은 말단 은행원으로 취직하여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주임의 호의를 완강하게 거부하지 못한다. 이제 그들의 희망은 오로지 전쟁이 끝나는 것뿐이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기만 하면 모든 것을 예전처럼 되돌릴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다고 해서 지키지 못한 가정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어머니와 아내의 갈등이, 죽음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는 폐병이, 잃어버린 꿈과 신념이, 가난이 단숨에 해결될까? 바진은 환상 따위는 허용하지 않은 채 무섭도록 현실을 꿰뚫어본다. 내가 전쟁을 끝내지 못한다면 누군가 대신 전쟁을 끝내줘도 그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고. 가정은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리고, 폐병은 마지막 남은 생명까지 가차 없이 갉아먹고, 꿈과 신념은 산산이 흩어지고, 가난은 더욱 지독해지고, 밤은 더더욱 차갑게 얼어붙는다고. 그렇게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바진은 자기 소설 『차가운 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본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곧 붕괴할 구사회, 구제도, 구세력이 뒤에서 그들을 지휘하고 있다. 그들은 반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희생자가 되고 만 것이다. 나는 세 명의 주인공을 모두 동정하지만, 그러나 그들 모두를 비판한다.” 개인의 ‘반항’이 개인의 통제력이 닿지 않는 거대한 힘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지 잘 알았을 텐데도 바진은 이토록 혹독하다. 그 무서운 절망에 휩싸여 자기 연민에만 빠져 있다면 단 하루도 살아 있을 수 없다. 그런 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거대한 힘이 금지하고 통제하는 지식을 파고들어 무모하게 반항하는 개인들의 발자취가 무수히 겹쳐져 세상은 변화하고 역사는 나아간다. 여전히 세상이 혼탁한 오물로 가득해 보여도 그런 희망이 없이 어떻게 앞으로 살아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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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소설가의 고백 - 세상의 모든 지식을 읽고 쓰는 즐거움
움베르토 에코 지음, 박혜원 옮김 / 레드박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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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움베르토 에코라면 기호학자나 철학자보다는 소설가로 더 익숙하다. 『푸코의 추(진자가 아닌)』로 처음 접한 그의 소설은 중세 기독교, 성당기사단, 암호와 기호학 등이 버무려진 지적이고 백과사전식 추리소설로 개인적인 취향과도 맞아 그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구해서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의 정교한 세계관과 지적인 내용에 매료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소설가로서의 에코도 궁금할 터, 할아버지가 다 된 에코의 『젊은 소설가의 고백』이란 어떤 것일까?

추리소설을 읽다 보면 간혹 사건의 현장 같은 간단한 도면이 등장할 때가 있다. 삽화 같은 것들이 아닌 말 그대로 도면의 일부인데 이런 것들을 보다 보면 그야말로 작은 세계 속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에코의 경우 『장미의 이름』에서 턱없이 많던 각주보다 기억에 남았던 것은 베네딕트 수도원의 도면이었다. “서사는 우주가 탄생하는 사건이며, 그 세계는 최대한 정밀하여 스스로가 일말의 의심도 없이 돌아다닐 수 있어야 한다”는 자기 자신의 말처럼 에코의 소설 속 세계는 한없이 정교하다. 이런 세계 속에서 독자는 해석의 무한한 확장을 거듭하며 소설가가 구축해 놓은 세계를 덧칠하는 것,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소설 읽기의 즐거움일 것이다.

이처럼 소설 읽기는 해석의 문제기도 하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현실과 일치시키려는 사람들이 많다. 에코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경험적 시청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악역을 연기한 배우가 실제 생활에서도 욕을 먹는 이유는 이야기의 시청자들이 드라마 속 세계를 현실의 감정이나 경험과 동일시하려는 것 때문이다. 소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흔한 예로 베이커 가의 셜록 홈즈를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이처럼 작가가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소설이 대중에게 공개된 이상 수많은 해석들과 오해가 뒤따르게 된다. 또한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은 현실의 독자에게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소통하지 못한다. 항상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햄릿은 ‘불구’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불완전한 세계 속에 사는 햄릿을 인정해야만 한다.

소설가로의 인생이 28년밖에 되지 않고 다섯 편의 소설밖에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젊은 소설가의 고백』이라는 제목을 지은 에코의 허풍과 함께하는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한 에코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기회다. 에코가 만들어 놓은 우주는 발을 들여놓기가 쉽진 않지만 빈틈없는 그의 서사 속에서 헤매다 보면 그의 세계를 탐험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에코의 세계에 다시 빠져들고 싶은 기분, 다음 소설이 또 기대된다고 하기엔 너무 이른 재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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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 브론테의 비밀 일기
시리 제임스 지음, 노은정 옮김 / 좋은생각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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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는 나에게 각별한 소설이다. 어릴 적 순수한 몰입으로 방이 어둑어둑해지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책장에 코를 박았던 시절, 그 시절에 나는 나처럼 ‘책을 좋아하는 소녀’와 ‘고아’에 열광했다(일찌감치 결혼하여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는 독립했지만, 삼십 대 중반의 어른 나이로 정신적으로는 아직도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는데도 ‘내가 고아라면’이라는 상상은 왜 그토록 했는지 모르겠다. 뭐, 아무튼……). 『제인 에어』의 책장을 채 몇 장 넘기지 않아 나는 제인에게 매료됐다. 제인은 책을 좋아하는 고아 소녀였다! 게다가 별로 예쁘지도 않고 깡말랐으며 마냥 순둥이가 아니라 고집도 대단했다! 어쩌면 『제인 에어』를 쓴 샬럿 브론테도 제인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다.

시리 제임스의 『샬럿 브론테의 비밀 일기』는 어쩌면 자기 분신인 제인을 꼭 닮았을지도 모르는 샬럿, 그러나 샬럿 브론테의 편지와 그녀의 생애를 다룬 평전 같은 객관적인 사실 자료들을 바탕으로 작가 자신이 상상하는 이미지를 덧보태어 샬럿을 되살려냈다. 시리 제임스는 샬럿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전제한다. 샬럿의 자필 일기가 발견된다면? 샬럿과 결혼한 브론테 집안의 영원한 목사보 아서 벨 니콜스 씨가 사생활 노출을 극히 꺼린 아내를 위해 꽁꽁 숨겨두었던 자필 일기가 백 년도 더 지나서 발견된다면? 그리하여 샬럿을 오마주하며 그녀의 문학적인 인생을 재구성한 이 소설의 제목이 ‘비밀 일기’이다. 시리 제임스는 자신이 샬럿인 것처럼 썼다고 믿는다지만, 그녀의 의도가 얼마나 훌륭하게 구현됐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남는다.

‘일기’라고 하면 기대하게 되는 것은 날짜와 그날 보고 듣고 느낀 것들 중에 유독 마음에 새겨진 사건, 사람, 풍경, 심경이 가장 생생하게 섬세한 숨결로 기록된 문장들의 총집합이다. 같은 대상을 이야기하는데도 하루하루 미묘하게 달라지는 어휘나 분위기는 다른 사람의 일기를 몰래 읽는 묘미를 배가시킨다. 편지로 이루어진 책이긴 하지만, 메리 앤 셰퍼와 애니 배로우즈의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이나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는 그런 점에서 아주 탁월하다. 편지를 주고받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편지를 통해 함께 공유하는 시간과 추억이 쌓일수록 편지의 주인공들은 점점 친밀해지고 농밀한 사랑과 견고한 우정을 나눈다. 그 과정이, 굳이 작가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그날그날의 편지를 읽어 나가는 것만으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일기도 편지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 나는 샬럿 브론테의 진짜 일기가 아니라도 그렇게 잘 가공된 일기를 원했던 것이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일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일기만 전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느끼게 되길 바랐다. 간혹 ‘키티’라는 이름으로 일기장을 부른 안네처럼 “일기장이여”, “일기장아” 하고 가상의 샬럿이 부르긴 하지만 회상 형식으로 쓰인 이 소설에 굳이 ‘일기’라는 제목을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샬럿의 자필 일기가 발견된다면?’이라는 애초의 가정을 성립시키기 위한 궁여지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여하튼 『샬럿 브론테의 비밀 일기』는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 목사의 목사보로 일하던 아일랜드 청년 아서 벨 니콜스의 청혼을 받은 날, 샬럿 브론테가 흥분과 설렘을 억누르지 못한 채 그 소식을 전하면서 아서의 청혼을 받기까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쓰였다. 하지만 샬럿과 아서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문학적인 영혼을 공유한 세 자매 샬럿과 에밀리와 앤이 어떻게 황량한 요크셔의 쓸쓸한 목사관에 틀어박힌 채 『제인 에어』와 『워더링 하이츠』와 『아그네스 그레이』를 쓰게 됐는지, 그 소설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출간됐는지, 그렇게 출간된 이후 영국 사람들의 반응과 그 반응에 대해 그녀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에 주목하면서 그녀들의 성품을 형상화하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 시리 제임스가 재창조한 세 자매는 뚜렷한 개성으로 생동감을 가진다. 왠지 모르게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에서 베스를 닮았을 것 같은 앤을 제외하면, 샬럿과 에밀리는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다소 차이가 있다.

가령 시리 제임스의 샬럿은 제인처럼 예쁘지 않고 깡마른 체형인 데다가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했다. 거기까지는 나의 상상 속 샬럿과 같다. 내가 상상한 샬럿은 좀더 내성적이고 진중한 성격이지만 가슴속에는 뜨거운 영혼을 간직하여 뜻밖의 상황에 아무도 예상치 못한 담대한 용기를 내고 재치 있는 기지를 발휘하는 강단 있는 외유내강의 고집스러운 여인이었다. 그러나 시리 제임스가 그려낸 샬럿에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다가도 생각보다 적극적이고, 생각보다 가볍고, 생각보다 자기 오해에 고집스럽고, 생각보다 외모에 열등감을 가진 모습과 맞닥뜨리게 되면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서 니나일 것만 같았던 에밀리는 지독하게 내성적인 은둔자로 묘사되어 있다.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는 접촉을 극히 꺼렸고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에는 질색했으며 자기가 쓴 글은 자매에게도 철저하게 은폐했다. 모든 것을 순식간에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차가운 빙하 한가운데 한 줌의 열기도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가둬두고서 에밀리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글을 썼던 것이다! 브론테 자매들을 앗아간 폐결핵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도 모든 인공적인 의학 치료를 고집스레 거부한 채 자신의 생사를 자연에 기대었던 에밀리의 마지막은 조금도 생각지 못한 모습이라 감동, 경이, 놀라움을 떠올릴 새도 없었다.

그러나 시리 제임스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브론테 자매와 관련된 자료라면 아서 벨 니콜스에 관한 것까지 모조리 섭렵하여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고 말한다. “극적인 갈등을 높이거나 기록상 공백을 채우는 데 꼭 필요한 이야기들” 빼놓고는 모두 사실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어쩌면 시리 제임스가 그려낸 브론데 자매들의 모습이 실제와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나는 샬럿 브론테와 각별했다는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평전 『샬럿 브론테의 생애』를 간절하게 읽어보고 싶어졌다. 안타깝게도 책장을 넘기기가 무섭게 오탈자들이 눈에 쏙쏙 들어와서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지만, 브론테 자매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니 나는 간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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