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
세르게이 도나또비치 도블라또프 지음, 정지윤 옮김 / 뿌쉬낀하우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커피를 한 잔 옆에 두고 여행 가방을 꾸려본 지가 언제인지 생각해 본다. 직접 몸을 움직이는 여행은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라 엄마를 보러 가는 외에는 가방을 챙긴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나마도 여행 가방이라고 말하기가 머쓱한 게 책 몇 권과 칫솔, 기름기 없는 로션과 스킨 정도만 달랑 챙겨 넣어 갈 뿐이다. 엄마 곁에 있는 동안 읽을 책들을 고르느라 책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것 말고는 내 짐에 추억이 스며들 여지는 별로 없다. 아, 동백꽃을 안은 듯한 붉은 새가 새겨진 자개 손거울은 빼고! 올케를 질투하는 나를 달래려고 엄마가 여행지에서 내 것으로만 하나 사 왔던 선물이다. 유아기적인 마음인 줄 알지만, 엄마의 사랑이 올케에게로 나누어지지 않고 온전히 내 것이라는 증명이라고 생각하고 늘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도 ‘여행 가방’을 생각하면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이 함께 복닥거리는 풍경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지나간 시간 속의 빛바랜 추억과 다가올 시간에 대한 가슴 설레는 계획이 그 여행 가방을 꾸린 주인의 내밀한 개인사를 엿볼 수 있게 해주니까. 세르게이 도나또비치 도블라또프는 소련에서 사회주의 정부가 요구하는 문학과 괴리되어 있는 자신이 더 이상 개인적인 창작 활동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오스트리아 빈으로 망명하여 미국에 이주한다. 『여행가방』은 도블라또프가 소련을 빠져나오면서 서른여섯 해의 인생을 꾸린 가방으로 자전소설이다.

『여행가방』에는 작가와 이름이 똑같은 주인공 ‘도블라또프’가 등장해서 소련을 떠나와 미국에 정착한 사 년 전에 벽장 깊숙이 넣어둔 채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낡은 여행 가방을 그제야 열어보는 것으로 이야기의 시작을 연다. 그 가방 안에는 핀란드산 크레이프 양말, 수출용으로 견고하게 만들어진 특권층 구두, 점잖은 더블버튼 양복, 별이 부조된 장교용 버클 벨트, 페르낭 레제의 낡은 벨벳 잠바, 루마니아산 포플린 셔츠, 가짜 물개 가죽으로 만든 겨울 모자, 손가락 부분이 잘려 있는 운전 장갑이 들어 있다. 과거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 대중없는 물건들은 도블라또프가 소련에서 살았던 서른여섯 해를 압축해 주는 기억의 열쇠들이다. 물건 하나하나는 그것과 얽혀 있는 그의 한 시절 한 시절로 순식간에 돌아가게 해준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여행 가방에 들어 있는 각각의 물건들에 얽힌 추억을 펼쳐 보인다. 도블라또프의 말대로라면, 그 추억들이 “카를 마르크스와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중간에 끼어 있는 구제 불능의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이룬다. 여행 가방 밑바닥에 깔아둔 신문지에 우연찮게 실린 카를 마르크스는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를 상징한다. 여행 가방의 뚜껑 안쪽에 붙여둔 사진을 보고 출국 세관원이 누구냐고 물어봤을 때 먼 친척이라고 둘러댄, 러시아계 미국 시인인 이오시프 브로드스키는 반체제 성향을 띠고 소련에서 강제 추방된 인물로 카를 마르크스와는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도블라또프는 마르크스에게서 벗어나 브로드스키에게로 향하지만 마르크스에 대한 그리움까지는 어쩌지 못한다.

그 그리움은 반평생이 넘도록 부대끼며 살아온 조국 사람들에 대한 본능적인 애틋함 같은 것이다. 겨우 쉰에 하늘로 돌아갔으니 도블라또프가 빠져나온 소련의 서른여덟 해는 그의 인생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새 옷으로 갈아입었어도 그 인생을 헌 옷 벗어던지듯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의 이상향과는 달리 소련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을 냉소하면서도 그 아이러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유머와 연민을 잃지 않는다. 한참 깔깔 웃고 나서 곰곰 생각해 보면 그가 담백한 어조로 초연하게 그려낸 현실이 분명 무거운 무게로 그를 짓눌렀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웃음기가 먼저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것은 그가 비판의 칼날부터 날카롭게 세우지 않고 그 무거운 현실을 연민 가득한 유머로 가볍게 버무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남의 우스꽝스러운 일인 양 웃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켠은 동류의 애잔함으로 서서히 가라앉는다. 켜켜이 무거운 현실과 그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해학적인 사람들의 일상은 비단 도블라또프가 익살스럽게 그려낸 1960~1980년대 소련의 모습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대와 공간과 이념을 뛰어넘어 인간이라는 동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닮은꼴로 존재하는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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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예술을 넘기다 - 아름다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예술과 생활 6
쉬레이 지음, 조용숙 옮김 / 시그마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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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술과 생활’이라는 빨간 시리즈를 기획해서 엮은 중국 사람 쉬레이에 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치밀하고 섬세한 철학과 우아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환상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으며 현대 예술계에 새로운 인문주의적 가치를 선보인 예술가이자 인문학자”라는 소개글에 먼저 마음이 이끌렸다. 인문적인 깊이를 더한 예술서라면 한번 믿고 읽어봐도 속된 말로 밑지는 장사는 아니니까. 게다가 ‘책, 예술을 넘기다’라는 멋진 제목으로 ‘책’과 ‘예술’이라는 먹음직스러운 밑밥을 두 개나 한꺼번에 던져두었으니 어찌 기웃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여자가 책을 지나치게 많이 읽을 때 생기는 위험에 관해서’라는 제목이 달린 엘케 하이덴라이히의 짧은 글이 반짝이는 외에는 대단히 흥미로운 주제에 비해 아쉽기 그지없었던 슈테판 볼만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 대한 보상 심리도 있었다. 책 읽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담은 그림 이야기에서는 아름다운 도판들로 사로잡았지만, 책과 여자가 얽힌 위험한 독서사 내지는 책 때문에 위험에 처하고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불굴의 여자나 여자가 책을 읽어 위험에 빠진 가련한 남자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여자의 독서사와 미술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기를 바랐던 책에서 그림만 남은 것은 작가의 인문적인 깊이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쉬레이가 엮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정보도 제공되지 않은) 여러 중국 전문가들이 참여한 『책, 예술을 넘기다』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책’을 주제로 한 예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책 자체를 예술로 바라보고 책의 모든 것을 조명하면서 책이 예술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것들을 이야기한다. 이쯤에서 ‘책은 예술이다’라는 명제에 나는 과연 동의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책 안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예술이 될 수도 있고 쥐뿔도 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책 안에 예술이 담겨 있으면 그 책은 예술이지만, 책 안에 똥 덩어리가 담겨 있으면 그 책은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까 정작 예술은 책의 내용이고 책은 그 예술을 담는 최고의 그릇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책, 예술을 넘기다』는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을 담는 책의 외형도 예술이어야 책은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책의 외형까지 예술을 위한 예술로 거듭나는 순간, 책의 내용도 마음 놓고 즐기지 못하도록 그 책이 얼마나 불편해지는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를 콕 집어내기는 그렇지만,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특별판의 경우 여러 디자인 분야의 최고 디자이너들에게 책의 장정을 의뢰하여 그들이 영감을 받은 대로 어떤 제한도 없이 마음껏 자신의 예술을 구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뒹굴뒹굴 마음 내키는 대로 읽기에는 더없이 불편하지만 한 권씩 따로 떼어놓아 보기에는 좋은 책이 탄생했다. 온갖 실험 정신을 제약 없이 발휘한 만큼 제작 비용은 높아졌을 테고, 그 비용은 그대로 책의 가격에 반영되어 독자의 부담으로 남았다. 그 터무니없이 비싸진 책에 밑줄을 긋고 책장의 모서리도 접으며 메모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 책을 읽다가 얼룩이라도 남으면 큰일이다. 책의 크기도 제각각이라 책장에 꽂아 넣기도 곤란하다. 신줏단지 모시듯 해야 하니 출판사에서 이번에는 예술성을 전혀 발휘하지 않고 제작한 어설픈 박스 그대로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해 줘야 한다.

책은 읽어야 그 존재 가치가 가장 빛난다. 책의 내용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의 외형을 감상하는 데 그칠 요량이라면 서점에서 책을 살 게 아니라 갤러리에서 책을 주제로 새롭게 창조한 작품을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책의 외형은 책의 내용이 가장 돋보일 수 있도록 도와주어 독자의 마음이 책의 내용에까지 가닿을 수 있다면 그로써 충분하다. 책은 예술을 가장 적절하게 담을 수 있는 실용적인 그릇일 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닐까?

중국은 종이와 인쇄의 역사가 유구한 만큼 『책, 예술을 넘기다』에는 중국의 책 이야기가 많아서 다소 낯설었지만 흥미로운 꼭지들도 있었다. 「청나라 무영전 판각본」을 읽으면서는 판본을 가리키는 이름들이 워낙 다양하고 복잡하여 끊임없이 헷갈렸는데, 황제가 오늘날 출판사의 편집장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떤 책을 발행할지에 대한 최종 결정부터 책의 중요도에 따라 황제가 직접 제목을 정하고 서문이나 발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발행이 결정된 책의 초본을 만들어 황제의 심사를 받아야 했고, 그 후 황제의 명령대로 수정해야 했다. 게다가 황제는 인쇄 부수뿐만 아니라 본문에 쓰일 종이, 표지와 덮개, 면지로 쓰일 비단의 색깔, 책을 묶을 실의 종류, 활자체 등 책을 만드는 데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관여했다. 지금처럼 책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없는 시대였으니 책을 한 권 만드는 공력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고작 책 한 권으로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그만큼 책이 귀하게 대접받은 것이다.

「빛을 발하는 화전」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화전(花箋)은 옛 선비와 묵객 들이 시나 편지를 썼던 아름다운 종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종이에 꽃이나 나비 같은 그림을 그려서 비망록이나 편지지처럼 팔았던 것이다. 다양한 그림들이 다채롭게 그려진 종이들 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종이를 골라 사랑하는 연인에게 연서를 보냈다고 상상하니까, 어두운 밤 어슴푸레한 촛불 아래 남몰래 그 종이를 마주했을 이의 설렘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현재 화전은 실용적인 기능을 거의 잃고 순수한 심미의 대상인 화첩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 외에 동서양의 장서표와 일본 북디자이너 스기우라 고헤이에 관한 이야기,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책의 장정과 디자인에 까다로웠던 루쉰의 안목 부분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책의 만듦새에 대한 고민은 중국도 똑같구나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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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탑 동물원 그리고 거북이
줄리아 스튜어트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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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페리고르의 중매쟁이』에서 고풍스러운 성의 여주인이자 청소부로 살아가는 에밀리에 프레세라는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나를 단번에 사로잡은 영국 작가 줄리아 스튜어트의 두 번째 소설이다. 줄리아 스튜어트가 무슨 대단한 작품성이나 기발한 상상력, 물샐틈없는 이야기 구조, 고밀도의 문체 등으로 독자를 압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마법이나 환상 따위는 끼어들 여지 없이 팍팍하게 돌아가는 현실에서 귀엽고 아기자기하고 평화로운 에피소드들을 만들어내어 메마른 마음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을 줄 안다.

『런던탑, 동물원 그리고 거북이』를 기꺼이 읽은 것은 순전히 그런 그녀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기대가 다락같이 크면 실망도 덩달아 불어나는 법이라 했건만, 이 책은 정말이지 기대 이상이었다. 현실의 냉기에 심장마저 차갑게 얼어붙어서 따뜻한 환상의 온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필독해야 한다!

『런던탑, 동물원 그리고 거북이』가 런던탑 근위병 발사자르 존스와 런던지하철 유실물센터 직원 헤베 존스 부부를 중심으로 ‘런던탑’과 ‘유실물센터’라는 독특한 두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고유의 사건들을 유쾌하고 발랄하게 담고 있다는 지루한 설명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그저 나를 따사롭게 감싸준 환상 몇 가지만 되살리고 싶다.

사랑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환상 두 가지.

키 작고 소심한 남자 아서 카트닙과 경이로운 허리둘레를 가진 여자 발레리 제닝스의 낭만적인 러브 스토리가 그 한 가지다. 런던지하철에서 검표원으로 일하는 아서는 유실물센터 직원으로 일하는 발레리를 짝사랑한다. 사랑에 용기 없는 아서는 유실물을 가장하여 사랑에 자신 없는 발레리만을 위한 그의 마음을 전한다. 아서가 온 마음을 다해 찾아낸 사랑의 선물은 바로 소설책이다. 뚱뚱한 여인이 가공할 만한 지성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그리고 그녀에게 매혹된 수많은 남자들 중에서 키 큰 남자들을 다 제치고 키 작은 남자가 그녀의 선택을 받는. 사랑 앞에 용기 내어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에 관해서만큼 그녀도 자신감 충만하도록 해주는 마법의 선물, 발레리 제닝스의 유실물센터 선반에 쌓여가는 그 소설책들은 실은 유실물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것이다.

   
  아서 카트닙이 소설책을 유실물로 전해 줄 때마다 책 제목을 유심히 살펴보는 발레리 제닝스의 눈길에서 그녀가 문학애호가라는 사실을 간파한 그는 런던 시내의 헌책방들을 돌아다니며 그녀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찾았다. 키 큰 남자 주인공과 늘씬한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문고판 베스트셀러 소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마침내 그는 E. 클러터벅이라는 19세기의 무명 소설가가 쓴 소설을 발견했다. 내용을 읽어보니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은 뚱뚱한 몸매와 가공할 만한 지성을 가진 인물이었고, 그녀에게 구애하려고 길게 줄을 서는 남자들의 키는 크기도 하고 작기도 했다.  
   

흠 잡을 데 없이 매력적인 외모의 남녀가 주목받는 소설은 너무 흔해서 지루하기 짝이 없다. 지독하게 평범한 역할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그 배역에 예쁘고 잘생긴 배우만 주연으로 들이미는 드라마도 진부하다. 가장 낭만적인 사랑은 꼭 잘생긴 남자와 예쁜 여자 사이에서만 화려하게 튀기는 불꽃이란 법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키 작고 왜소한 남자와 뚱뚱한 거구인 여자의 소박한 사랑이 이토록 황홀할 수 있다니 내가 다 행복해졌다.

또 한 가지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책 읽어주는 남자에 관한 아주 감동적인 환상이다. 이 사랑은 노인들의 병실에서 피어난다. 런던탑 목사 셉티머스 드류의 노모인 플로렌스 드류는 병원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밤, 겨우 목숨만 붙은 채로 하늘나라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남편에게로 돌아가겠다는 말만 입에 달고 지내는 플로렌스 곁으로, 맞은편 침대에서 역시 하루빨리 죽기를 기다리던 노인 조지 프라우드풋이 소설책을 한 권 들고 찾아온다. 밤마다 조지가 읽어주고 플로렌스가 듣는 이 이야기는, 물리적인 심장은 아직 뛰어도 영혼을 울리는 심장은 멈춰버린 두 노인에게 마법처럼 사랑을 싹 틔워 눈부신 생기를 불어넣는다. 죽음을 코앞에 둔 플로렌스를 위로한 사람은, 그녀를 두고 잘도 하늘나라로 먼저 가버린 남편이 아니라 자신 역시 고독 속에 죽음과 대면하면서도 그녀의 병상 곁에서 책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들려준 남자 조지였다. 하늘나라에 있는 남편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던 플로렌스는 영면 뒤에도 기꺼이 조지 곁에 머물길 원했다.

   
  조지 프라우드풋은 야간등을 켜고 그의 마지막 옷이 될 예정이었던 새 환자복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문고판 소설 한 권을 꺼냈다. 그러고는 그저 죽기 전에 자기 목소리를 한 번 더 들어볼 작정으로 그녀에게 소설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조지는 매일 밤 플로렌스 드류의 침대 곁으로 와서 책을 읽어주었지만 그녀는 한 번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에 그가 오지 않았다. 플로렌스는 소설의 결말을 듣지 못하고 죽을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어서 조지를 소리쳐 불렀다. 이제 죽을 날이 가까워져 책을 읽을 기운도 없었던 조지는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플로렌스의 회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고독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목소리밖에 없었으므로 그는 책의 결말 부분을 마음대로 지어내서 이야기했다. 아주 독창적인 결말에 감격한 플로렌스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했고, 조지는 매일 밤 찾아와서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주었다. (…)

플로렌스는 더 이상 죽음을 고대하지 않게 되었다. 이야기 하나를 하룻밤 다 끝내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해진 조지가 항상 결말을 다음 날 밤으로 미루기 때문이었다. 조지 역시 하루라도 빨리 데려가달라고 기도하는 일을 중단했다. 그도 플로렌스만큼이나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했고 그걸 생각해낼 시간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몇 주 후의 어느 날 밤, 조지는 자기 침대로 돌아가기 전에 플로렌스가 꽉 잡고 있는 이불을 똑바로 펴주고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런 의식은 그들의 만남에 달린 각주처럼 날마다 계속됐다. (…) 마침내 플로렌스가 세상을 떠나자 조지도 몇 분 만에 그녀의 뒤를 따랐다.
 
   

마지막 인용은 슬픈 장면.

   
  “아빠?”
“그래, 마일로.”
“나도 언젠가 하늘나라에 갈까요?”
“그래, 그렇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일이란다.”
“아빠랑 엄마도 거기 있나요?”
“그럼. 우리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럼 나는 외롭지 않겠네요?”
“그럼. 그럼. 외롭지 않을 게다.”
 
   

이 부분은 근위병 발사자르 존스가 어린 아들 마리오를 뼈아프게 추억하는 장면이다. 존스 부부는 느지막이 귀하게 얻은 어린 아들 마리오를 위해 런던탑으로 들어왔다가 그곳에서 마리오를 영원히 잃고 런던탑에 갇혀버렸다. 엄마도 아빠도 없는 곳에서 홀로 외로워할 아들을 생각하면 발사자르 존스는 숨이 막힌다. 그러나 헤베 존스는 마리오가 병명도 없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후 아들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으려는 발사자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아빠였던 그가 도대체 아들을 사랑하기나 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헤베는 유실물센터로 들어온 석류나무 납골함의 주인을 찾아 돌려주면서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더라도 슬퍼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존스 부부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유난히 마음이 아렸다. “발사자르와 헤베는 불임이라는 가시에 그들의 결혼 생활이 찢겨 나가지 않도록 사랑의 뿌리로 더욱 단단히 감았다”는 문장을 읽을 때는 눈이 따가워졌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애완동물의 죽음에 비유하는’ 것 같지만, 어쩌면 그 문장은 우리 부부의 이야기 같기도 했다. 그는 아이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결혼 팔 년째 우리가 유난히 서로에게 집착하는 것은 유사시에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고리가 부재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겨우 팔 년 가지고 이십 년 불임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아이를 유난스레 사랑하는 엄마를 봐도, 아이에게 저토록 무심할 수 없는 엄마를 봐도 모든 게 상처로 박힌다.

이쯤에서 다시 재미있는 에피소드 두 가지를 소개하면서 두서없이 조각조각 떠오르는 단상들을 접을까 한다. 런던탑에 얽힌 죽음의 역사를 줄줄 꿰고 런던탑 예배당에 사는 쥐들을 단박에 해치울 쥐덫을 개발하는 데 열을 올리는 런던탑 목사 셉티머스 드류가 사실은 영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에로소설 작가였다는 사실, 그리고 ‘두 번째 책 증후군’에 시달리며 살아생전 못다 쓴 책을 집필하기 위해 런던탑으로 돌아온 랄레이 경의 유령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는 이 책을 읽어봐야 안다. 발사자르의 런던탑 동물원 소동을 하나도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이 또한 책으로 읽지 않고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깝다. 그런데 토머스 하디의 심장을 하디가 기르던 고양이 콥웹이 신나게 먹어치웠다는 이야기는 정말 사실일까?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또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구별이 잘 안 된다. 줄리아 스튜어트의 능청은 굳이 구별하지 않아도 기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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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 문학동네 루쉰 판화 작품집
루쉰 지음, 이욱연 옮김, 자오옌녠 판화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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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나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읽기가 까다로운 이유 중 하나―번역 같은 문제는 제외한다고 쳐도―는 특정 작품의 경우 당시의 시대상이나 역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최인훈의 『광장』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는 것과 같다. 루쉰의 『아Q정전』 역시 적어도 신해혁명 전후의 중국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는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아Q의 이야기는 그저 한 인간의 이야기가 될 뿐이지만 당시의 중국을 이해한다면 아Q는 중국 자체의 이야기가 된다.

태어난 곳도 모르고 성도 모르고 이름도 제대로 기록할 수 없는 아Q는 집도 없어 사당에 살면서 웨이좡 마을의 잡일을 해 주는 날품팔이일 뿐이다. 하지만 아Q는 자존심이 강하다. 마을 사람들은 물론 생원시험 준비를 하는 도령들도 무시한다. 아Q는 '옛날에는 잘 살았고' 아는 것도 많은 데다 '완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동네 건달들에게 무시당하고 얻어맞아도 마음속으로 복수하며 스스로 이겼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아Q만의 기묘한 정신승리법이다. 게다가 아Q는 약자에게는 정말 강하다. 결국 아Q는 동네 과부를 희롱했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얻어맞고 성으로 달아난다. 이후 신해혁명의 어수선한 틈을 타서 혁명단에 가입해 한 몫도 잡고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복수하려 하지만 그곳에서도 쫓겨나게 되고 관부에서는 아Q에게 혁명단의 죄를 뒤집어씌워 본보기로 잡아들이게 된다.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인 루쉰의 이야기와 자오옌녠의 거친 판화는 바로 중국인 자신들의 독백이기도 하다. 사실 조금만 넓게 본다면 아Q의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청(淸)이전에 몽골의 원(元) 치하에 있던 중국인이 겪었던 이야기이며, 다시 반복되는 또 다른 이야기일 따름이다. 중화(中華)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중국인들에게는 오랑캐 치하의 삶은 치욕이었지만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현실적인 위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그에 만족하며 강자에게 겉으로는 복종하지만 속으로는 비웃는 정신적 자위를 하는 아Q는 중국인의 숨기고 싶은 모습일 것이다. 루쉰은 『아Q정전』을 통해 신해혁명의 실패 이후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중국인들의 패배주의에 대한 폭로인 동시에 각성을 추구하고자 했다. 루쉰은 혁명을 선동하지는 않았다. 그저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현실에 안주하는 중국인의 이야기를 했을 따름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지독한 좌절감에 젖어야 한다는 것, 그런 좌절감 속에서만 희망을 바라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아Q를 통해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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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
체 게바라 지음, 김홍락 옮김 / 학고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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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에 대해 내가 어렴풋이나마 가지고 있는 인상은 강렬한 붉은색 표지의 그 유명한 책, 장 코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과 체 게바라 티셔츠가 전부다. 그나마도 『체 게바라 평전』은 여러 해 전에 우연찮게 내 책장 한구석에 꽂힌 이후 다시 펼쳐 들지도 못했다. 그저 여기저기 주워들어 그가 자본주의에 반기를 들고 사회주의 가치의 실현을 위해 게릴라 투쟁을 벌였던 혁명가로, 살아서도 영웅이었지만 죽어서는 영원한 ‘혁명의 아이콘’으로 전설화됐다는 것을 대략 알고 있을 뿐이다.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도 전설적인 혁명가의 마지막 기록이라는 데 작은 호기심을 느껴서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되었다. 이렇게 체 게바라의 일기를 처음 읽기 시작한 동기는 다소 가벼웠고 아주 사소했다. 하지만 자필 일기 속에 남겨진 체 게바라는 마치 구경꾼처럼 그의 마지막 모습을 훔쳐보려는 내 보잘것없는 호기심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체가 마지막까지 메고 다녔던 올리브그린 색깔의 배낭 속에는 붉은색의 낡고 변색된 대학노트 한 권과 담뱃불에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는 갈색 인조비닐가죽 다이어리 하나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볼리비아의 게릴라 활동을 위해 첫 본거지로 삼은 냥카우아수에 도착한 1966년 11월 7일부터, 마지막 전투장인 유로 계곡에서 체포되어 라 이게라의 궁벽한 시골 학교에서 총살당하기 전날인 1967년 10월 7일까지 체가 볼리비아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빽빽하게 써 내려간 일기장이다.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는 체의 마지막 행적이 가장 진실되게 기록된 그 두 권의 일기장을 번역한 것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일기의 속성상, 체의 일기는 조금의 과시도, 은폐도 없이 당시 게릴라 활동과 정세에 대한 가장 냉철한 분석과 판단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체 게바라의 본명)는 아르헨티나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엘리트 인텔리였다. 굳이 혁명에 눈뜨지 않아도 한평생 의사로 호의호식할 수 있었던 그가 ‘의사’의 길 대신 ‘혁명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두 차례에 걸친 대학 시절의 남미 여행이었다. 자본주의 열강의 지원을 등에 업은 독재 정권과 소수에 불과한 대지주의 억압과 빈곤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그가 선택한 저항의 길은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일보다 시급한 세계의 모순을 바로잡기 위한 혁명이었다. 1953년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한 이후 1954년 멕시코에서 역시 망명 중이던 쿠바인 피델 카스트로를 만났다.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의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전복시키고 1959년 쿠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다. 그러나 그는 의사이길 포기했던 것처럼 카스트로 정권의 고위직에서 안주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세계 어디에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가 좀처럼 잊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스페인어의 ‘어이, 친구!’라는 뜻의 ‘체Che’라고 부른다. 억압과 빈곤으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 체!

그리하여 “물레방아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지닌 채” 체는 볼리비아에서 남미 전역으로 혁명의 불길을 확산시킬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체의 기대와 달리 다양한 국적으로 구성된 게릴라 부대의 불화, 볼리비아 공산당과의 반목, 볼리비아 농민들의 밀고, 외부와의 연락 두절 등으로 그의 마지막 여정이 될. 게릴라전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 달리 총성과 선혈이 낭자한 전투보다 지루한 중노동의 나날이 이어졌다. 캠프 설치, 물품을 숨겨놓을 땅굴 파기, 정찰, 행군, 식량 확보를 위한 사냥……. 혁명은 영화가 아니라 철저하게 현실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현지 농가나 식료품점에서 식량을 조달할 때나 길잡이로 농민들의 도움을 받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일일이 지불했다는 것이다. 모든 게릴라를 싸잡아 무슨 폭도쯤으로 한참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 창피하기 그지없었다. 정찰과 행군과 야영과 전투, 고된 노동과 극심한 굶주림과 고질병인 천식의 악화와 동지들의 부상과 전사가 고통스럽게 이어지는 와중에도, 가족의 생일을 잊지 않고 챙기는 체의 모습은 강인한 혁명 전사의 굳센 신념 이면에 숨겨져 있는 인간적인 필부의 애틋한 마음일 것이다. 그날의 일기만큼은 가족의 생일이 게릴라 활동의 냉정하고 객관적인 기록에 앞선다. 다른 어느 부분보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아리다.

1967년 2월 11일
노인의 생일이시다. 이제 67세이시다.(*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 체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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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2월 15일
일디타의 열한 번째 생일이다.(*일다 게바라 가데아, 체의 장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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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2월 18일
호세피나의 서른세 번째 생일이다.(*알레이다 마치 레 라 토레, 체의 두 번째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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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2월 24일
에르네스토가 두 살이 되는 생일이다.(*에르네스토 게바라 마치, 체의 막내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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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5월 18일
로베르토와 후안 마르틴의 생일(*체의 두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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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5월 20일
카밀로의 생일이다(*카밀로 게바라 마치, 체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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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6월 14일
셀리타의 생일. 네 살이 되었나?(*셀리아 게바라 마치, 체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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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6월 21일
모친의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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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는 겨우 쉰두 명에 불과한 게릴라 대원들을 이끌고 볼리비아 정부군을 상대로 외로운 투쟁을 벌이며 승리를 거두기도 하지만, 결국 고립무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1967년 10월 8일 마지막 전투를 벌인 유로 계곡에서 생포된다. 그리고 다음 날 재판도 없이 정부군 중 한 명인 마리오 테란이 만취한 채 기관총으로 체를 난사한다. 볼리비아 정부와 미국의 명령으로 체를 처형하라는 임무를 하달받았지만 차마 체를 겨눌 수 없어 술까지 마셨던 마리오 테란도 결국 자신이 살던 집 4층에서 투신한다. 체의 죽음 이후, 체가 처형된 라 이게라의 시골 학교는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순례자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체가 게릴라 활동을 했던 지역은 체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관광 패키지 상품인 ‘체의 길’로 탈바꿈해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볼리비아 사람들을 위해 투쟁했지만 볼리비아 사람들에게 외면당한 채 최후를 맞은 체를 이용해 볼리비아가 배를 불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은 한 주민은 “가난한 계층들을 위해 투쟁한 체가 그의 이름과 희생을 이용해 우리가 조금 이득을 본다고 해서 나무라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 아이러니하지만 체는 나무랄 줄 모르겠지. 친구니까. (그러나 전설적인 혁명가 이전에 사랑이 넘치는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한 남자가 남긴 최후의 기록을 읽은 나는 사소한 것 하나에도 심사가 뒤틀린다. 조금? 정말 조금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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