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책 읽는 시간 -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때
니나 상코비치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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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으면서 목적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책이 내 앞에 들이닥친 현실을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의지가 발가락 하나라도 꼼지락거리는 행동으로 이어질 때뿐이다. 소박한 범인의 세속적인 일상생활에서 현실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굳이 책을 들추지 않아도 그 정답을 자신은 알고 있다. 의지와 행동이 결여되어 있을 뿐 자신도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구구절절 옳은 소리로 젠체하는 자기 계발과 교훈과 훈계의 허명에 기대고 싶지 않았다. 평생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거룩한 대의나 사명을 위해서라면 약빠른 처세술이나 눈 가리고 자랑 식의 성공담 따위가 아니라 나에게 턱없이 부족한 인문학적 공부가 요구될 것이다.

사실 책과 위안의 관계에 대해서도 같은 의구심을 품었다.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슬픔과 절망과 좌절은 어떤 책을 읽어야 위로받고 지독하게 휩싸여버린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자신을 한없이 주저앉히는 감정을 극복하려면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는지 교과서 같은 해답을 이미 머릿속에 이성적으로 떠올려놓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그것을 책으로 또다시 확인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책에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오로지 책은 내가 처한 현실과 잠시 유리될 수 있도록 즐거운 도피처이기만 하면 되었다. 다음에 읽을 책을 고를 때 첫 기준은, 내 책은 가능한 한 내 현실과 동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책이 피난처만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나를 위무해 주기도 한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위안을 받고자 그 책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지는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 책을 읽는 동안, 또한 예기치 못하게 스산해진 마음이 책 속의 단어와 문장과 행간에 조응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서 주문처럼 ‘그래 봤자 불필요한 감정 낭비일 뿐이야’라고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속절없이 거친 마음의 풍랑이 가라앉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책은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의 원인을 조목조목 따져들어 명쾌하게 갈무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차갑고 딱딱한 내 마음에 온기가 돌아 부드러워졌다.


책을 읽는 동안은 즐거워도 책 밖으로 돌아갈 시간을 언제나 예비하고 있어 책을 덮기만 하면 책을 펼치기 직전의 현실이 고스란히, 때로는 비루함이 더해진 채 내 앞에 다시 뚝 떨어졌다. 참으로 기묘한 경험 이후에도 책이 대신 내 현실을 해결해 주는 일은 없지만, 그 현실에 다시 맞서는 나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내가 읽는 책마다 전부 그토록 고마운 경험을 안겨주는 것은 아니다. 위로가 궁해져 일부러 위안이 되어줄 만한 책을 읽어도 좀처럼 찾아들지 않던, 그 조응의 마법은 독서에 아무런 사심이 없을 때 기대하지 않았던 깜짝 선물처럼 일어났다. 책의 내용이 내 현실과 딱 들어맞지 않아도 문득 어떤 장면 하나, 풍경 하나, 문장 하나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도는 순간이 있다. 우연히 찾아드는 그 순간, 책은 고단한 일상에 치인 영혼들을 안쓰러워하며 어루만져주는 것이 아닐까.


니나 상코비치는 하루에 한 권, 365일이면 365권을 읽는 독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녀는 그 일 년 동안 다른 무엇보다 책을 우선하여 몰두했다. 그것은 언니를 죽음으로 잃은 상실감과 언니보다 오래 산다는 죄책감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삶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그녀가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상실감을 메우고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 방법을 알려주는 책들을 골라 읽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단지 언니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서 날마다 자신이 순수하게 읽고 싶은 책을 읽었을 뿐이다. 언니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그림자 한 자락 드리우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모든 책의 모든 문장마다 언니를 되살리고, 언니를 데려간 죽음과도 자신을 남겨놓은 삶과도 화해한다. 그리고 언니가 죽는 순간에 언니의 몫까지 살아내느라 멈춰버린 그녀 생의 시간이 다시 똑딱똑딱 시곗바늘을 돌리기 시작한다.


‘책에 관한 책’, 혹은 ‘독서 에세이’ 정도로 가볍게 치부하고 『혼자 책 읽는 시간』을 읽기 시작했는데, 죽음의 저편으로 언니를 먼저 떠나보낸 슬픔이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짙게 배어 있어 당황했다. 그 통렬한 감정이 너무나 익숙해서 도리어 아팠기 때문이다. 10여 년, 내가 사는 동안 점 셋은 죽었다. 점을 하나씩 포기할 때마다 상실감에 한없이 비어가고 죄책감에 끝없이 꺼져들어도 시간이 제멋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면 나는 다시 살아가고 있었다.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방편으로는 습관적으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책을 펼치면서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내는 것만 한 게 없다. ‘즐거움’ 혹은 ‘도피’ 같은 독서의 혜택은 떠올릴 겨를도 없이 평소처럼 책을 펼치고 그저 글자만 기계적으로 읽었다고 믿었는데, 그렇게 해체된 글자들이 모여서 유의미한 단어로 조합되고 문장을 이루고 이야기를 만들어 고통, 상실감, 죄책감을 덜지 않고도 내 생의 시간은 흘러간다고 속삭였나 보다. 그렇게 ‘로애(怒哀)’뿐만 아니라 ‘희락(喜樂)’까지 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감정들에 골고루 휩싸여 염치없이 살아갈 궁리를 하게 된다고 말이다. 나는 시간뿐만 아니라 책에도 빚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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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55
파트리크 라페르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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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나 상은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문학상인 공쿠르가 남성 작가들로만 구성된 것에 불만을 가진 여성 작가들이 모여 만든 상으로 당연하게도 공쿠르와는 수상작 발표로 인한 이런저런 충돌도 있었으나 현재는 공쿠르와 협의를 거쳐 번갈아 수상작을 내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문학상이기도 하다. 설립 의도나 이름에서 풍기는 뉘앙스와는 달리 이 상은 심사위원들이 여성이라는 것이 공쿠르와의 차이일 뿐 공쿠르와의 차이점을 무엇일까라는 생각―물론 비슷한 수준의 작품이 있다면 페미니즘적이거나 여성 작가 취향의 작품이 지지를 받을 수 있겠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문제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이 바로 파트리크 라페르의 『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를 보며 들었다. 물론 이것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덕분이기도 하다.

루이 블레리오, 그는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죽은 듯이 이 년 동안을 기다리기만 했던 노라의 전화. 그는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머피 블롬데일, 자신의 아파트에 돌아왔을 때 노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심장이 싸늘해지기 시작한다. 노라는 머피를 떠나 루이에게 돌아온다. 자신의 아내를 두고 노라에게 모든 것을 던져 욕망에 젖어드는 루이와 욕망보다는 진실한 무언가를 찾으며 노라에게 헌신하는 머피, 노라는 양쪽을 오가며 둘을 사랑한다. 루이와는 욕망을 채우고 머피에게는 따스함에 기댄다. 흘러가는 대로, 한쪽이 싫증 나면 다른 쪽으로, 연약하고 작은 노라이지만 둘에게 그녀는 스스로 움직이는 태양이다.

남녀의 사랑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 어떤 장르를 막론하고 예술의 주제가 되어왔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만큼 우리들 삶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감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시대가 변해감에 따라 사랑 이야기 역시 시대의 흐름을 따른다는 것이고 과거 남성 위주의 시각에서 벗어난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말할 것도 없다. 파트리크 라페르의 『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 역시 이런 시대의 흐름에 맞는 작품이지만 조금 미묘하다. 편향적인 시각이라 하면 할 말이 없겠지만 만약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性)이 반대가 되었다면 이만큼의 반응은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노라 역이 젊고 매력적인 남성이었고 두 유부녀와 사랑에 빠진다면 이 이야기처럼 프랑스 흑백영화 같은 느낌을 주는 독특한 톤의 이야기가 지금처럼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을까? 심사위원들―특히 여성 심사위원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면―의 눈에는 마초적인 소설이라는 평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뻔하디뻔한 불륜 이야기―매력적인 노라뿐 아니라 서로 비교되는 클리셰 같은 불륜 대상 남성들도 더해서―를 아름다운 톤으로 포장해 주는 것은 주인공이 노라 같은 여성이기 때문에 더 쉬운 것이었다고 생각하면 이것 역시 차별적인 생각일까? 어쩌면 맞는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여성의 사랑은 남성의 그것보다 오래전부터 금기시되어 왔기 때문에 더 파격적이고 더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겠지만 파트리크 라페르의 『인생은 짧고 욕망은 끝이 없다』은 남성에게나 여성에게나 절대로 공평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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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5-07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곰곰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네요. 노라라는 주인공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면... 저 같아도 식상하거나 통속적인 불륜소설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의식은 이중적인 것 같기도 하네요. 어떤 때는 정숙함을 요구하다가, 또 어떤 때는 자유롭고 분방한 여성의 모습에 매혹당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요.
 
소년시대 1 - 봄.여름
로버트 매캐먼 지음, 김지현 옮김 / 검은숲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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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제야 읽었을까 하고 후회하면서도 휙휙 넘어가는 책장이 조바심쳐지고 그만큼 빠르게 줄어드는 책장이 아쉬워지는 소설이 있다. 로버트 매캐먼의 『소년시대』가 딱 그런 소설이었다. 나는 당장 읽지는 못할지라도 곧 읽을 생각인 책들을 화장대 위에 잔뜩 쌓아두는 버릇이 있다. 당연히 그중에는 생각뿐인 책들도 수두룩하고, 어떤 책은 반년이 지나도록 다른 책들 밑에 깔린 채 번번이 ‘다음에는 꼭 읽어야지’ 하고 읽을 순서가 뒤로 밀리기도 한다. 그렇게 더 이상 읽기를 미루기가 미안해졌을 때야 『소년시대』를 본격적으로 탐독했다. 아뿔싸, 재미의 무게를 직감으로 달고서 『소년시대』를 뒤로한 사이에 나는 그보다 재미없는 책들을 얼마나 읽어댔던가.

나는 로버트 매캐먼의 다른 소설도 번역되지 않았을까 허겁지겁 찾아보면서 그의 집필 이력을 눈여겨봤다. 놀랍게도 호러, 스릴러, 판타지, 미스터리, SF 등을 주로 써왔다는 매캐먼의 작가 인생에서 『소년시대』는 유독 다른 빛깔로 도드라지는 작품이었다. 아마도 그가 구축한 책장 속 세계 가운데 가장 천진하고 사랑스럽고 서정적인 세계를 그렸을 것이다.

성별에 따라 소년이든 소녀든 유년 시절은, 그 안전한 경계를 벗어나 이제 스스로를 책임지고 나 아닌 다른 누군가도 함께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라는 것을 불시에 깨닫고서 소스라치는 성인에게 마법의 네버랜드이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머물려고 버둥거려도 결국은 내동댕이쳐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번 지나온 시절로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법칙 앞에 철저히 무기력한 존재이다. 그런데도 시간이 째깍거리는 소리에 단호하게 등 떠밀리며 허둥지둥 삶을 꾸리다가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고 책임의 무게에 압사할 지경에 처하면, 나 대신 나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고 세상이 나에게 상처라도 남길세라 온몸으로 가로막아주는 누군가가 있는 유년으로 가장 먼저 숨어들고 싶어진다. 그곳은 절대적인 보호 아래 냉혹한 현실도 프리즘으로 들여다보며 무지갯빛 미래를 꿈꾸고, 오로지 성장과 모험과 상상에만 몰두하면 되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그 시절에 유독 왕성해지는 호기심과 장난기 때문에 조금 위험해져도 내가 다칠까 봐 노심초사하며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항상 곁에 있고, 아무리 끔찍한 상상을 하다가 잠들어 악몽을 꿔도 꿈에서 깨어나면 누군가의 손길이 내 머리를 쓸어주며 머리맡을 안전하게 지켜준다.


『소년시대』는 로버트 매캐먼이 그리운 유년 시절에 바치는 헌사이다. 매캐먼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셀마 네빌 선생님의 말을 통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을 속삭인다. “아무도 어른이 되지 않는 거란다.” 어른은 없고 ‘시간의 흙이 두껍게 덧씌워진 어른의 가면 뒤에 겁에 질린 아이’가 안간힘을 써서 세상의 관습이 그 나이만큼 요구하는 의무를 다하고 책임을 지고 강요를 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 아이가 의무도, 책임도, 강요도 없이 진정한 자신으로 마음껏 활개 칠 수 있는 시간은 오로지 유년뿐이라고, 어른이 되고 싶어 안달하다가 그 시절을 맥없이 흘려보내도 그토록 아름다운 마법은 더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렇다, 인생에서 어떤 마법이든 허용되는 시간은 유년이 유일하다. 그래서일까, 매캐먼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열두 살 소년 코리 매켄슨에게 유년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친구(데이비 레이 캘런, 벤 시어스, 조니 윌슨), 개, 자전거, 잡지 『유명한 괴수들』에 나오는 온갖 괴물들, 동시 상영 영화, 방학, 캠핑, 풋사랑, 티컴서 강바닥에 사는 전설의 거대한 물고기 올드 모세, 축제단과 트리케라톱스 같은 것들부터 자전거와 개와 선생님과 친구의 죽음까지, 심지어 주로 장르 소설을 써온 작가답게 살인 사건까지 말이다. 코리는 새벽에 우유 배달부 아빠를 도우려고 함께 나섰다가, 끔찍하게 살해당한 남자가 차에 갇힌 채 색슨 호수로 가라앉는 것을 목격한다. 이 사건은 내내 아빠의 꿈속을 드나들며 영혼과 육신을 갉아먹는다. 왜냐하면 그 참혹한 살인이 제퍼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제퍼는 할아버지가 평생 살아왔고, 그 아들인 아빠가 계속 살아갈 것이고, 그 아들의 아들인 코리가 자라고 있는 마을이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그 아이가 유년을 보내는 제퍼에서 아빠는 모든 이웃들이 착하다고 생각해 왔다. 아빠를 더욱 괴롭힌 것은 자신이 선하다고 철석같이 믿어왔던 이웃들 중 한 사람이 범인이기 때문이다. 가장 안전하다고 확신했던 곳이 자신이 지켜야 할 아내와 아들에게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면 그보다 더한 공포가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그러나 매캐먼은 살인자를 추리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만 할 뿐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는 색슨 호수의 불가해한 심연을 이용해 독자의 주의를 분산시킨다. 『소년시대』가 추리소설이나 스릴러소설의 통상적인 범주에 구속되지 않고 성장소설로 분류돼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물론 매캐먼은 어른인 아빠가 아니라 소년인 코리에게 살인 사건을 직시하도록 한다. 그것은 언뜻 잘 수긍되지 않는 처사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캐먼의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곰곰 생각해 보면 단지 이 소설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소년에게 그 역할을 맡기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른보다 소년이 용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더 이상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아이와, 언제나 어디에서나 무슨 짓을 해도 부모가 자신을 굳건하게 지켜준다고 믿는 아이 중에 누가 더 용감할 수 있을까?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자기 자신은 물론 꼭 지키고 싶은 사람이 둘이나 늘어난 아이는 어른의 가면을 쓰고 강해 보이려고 애쓰지만 지켜주지 못할까 봐, 그리하여 잃게 될까 봐 겁에 질려 있을 것이다.


사실 모든 유년이 코리만큼 흥미진진하고 짜릿하고 신비로운 사건들로 가득한 것은 아니다. 평범한 유년은 훨씬 단조롭고 자잘한 일들로 연이어진다. 어쩌면 매캐먼의 실제 유년도 별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나에게는 소중하고 애틋한 추억으로 의미를 되새기게 될지라도 남에게는 무의미하여 지루하고 심드렁하여 하품만 날 뿐이다. 그렇다고 보통의 유년이 코리의 유년만큼 반짝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유년이라도 자신만이 아는 마법을 품고 있다. 코리는 어른의 가면 뒤에 숨겨놓은 유년의 로망이다. 매캐먼은 이제 자신과 세상의 모든 어른들이 잃어버린 마법을 몽땅 코리에게 되돌려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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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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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어딘지 모르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것들이 있다. 집배원도 그런 좋은 기억들 중 하나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물론 요즘에야 택배 차나 오토바이를 끌고 PDA를 들고 다니며 편지보다는 홍보물이나 명세서를 전하기 바쁜 시대가 되었지만 나이를 좀 먹은 사람이면, 특히 시골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빨간 자전거에 황토색 가방을 둘러메고 반가운 소식을 전하러 다니는 집배원의 모습에서 나쁜 기억을 찾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들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집배원 역시 우체국의 직원, 특히 국가에 소속되어 있는 직업의 세계로 들어가면 평범한 사람들의 그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찰스 부코스키의 『우체국』은 그런 의미에 더해 내용 자체도 매우 불건전하며 나쁜 소설이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자신이 집배원이거나 가족 중에 집배원이 있다면 심호흡을 한번 하고 읽을 것을 권한다.

“우체국 소속 직원 모두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정직성과 공익에 대한 완전한 헌신을 원칙으로 행동한다.” “공공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명예롭고 정직하게 행동할 특별한 기회와 책임이 있는 것이다.” ―복무 윤리 강령 중 일부. 미합중국 우정사업본부
“세상에, 집배원들은 편지를 넣고 다니면서 여자들하고 같이 눕기도 하는구나. 이거 나한테 딱 맞는 일인데. 오, 이거야, 이거.” ―헨리 치나스키. 미합중국 집배원


크리스마스에 임시 집배원으로 일을 하게 된 헨리 치나스키는 배달을 나갔다가 우연히 여자와 자게 되고 그것이 마음에 들어 정식으로 보결 집배원이 된다. 하지만 집배원이 된 그에게 좀처럼 그런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고 매일을 술에 찌들어 출근해 고된 노동을 반복하고 가학적인 상사는 늘 자신을 괴롭히기만 한다. 정교하게 짜인 미국의 노동 시스템은 우체국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조직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결국 치나스키는 우체국을 떠나게 되지만 3년 후 다시 돌아와 젊은 시절 내내 우체국에서 반복적인 일상을 하게 되지만 여전히 그는 조직에 저항한다.


현대의 조직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런 조직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공공의 목적을 가진 우체국이야말로 정확한 규율 속에서만이 존재할 수 있는 곳이고 치나스키는 철저히 그에 반하는 인물이다. 그는 항상 조직에 불만을 제기하고 조직의 톱니바퀴가 되는 것을 거부한 유일한 인간이었다. 어차피 소설이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런 치나스키 역시 12년이라는 젊은 시절을 우체국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시스템 속에서 그렇게 발버둥친 것은 그나마 인간적인 모습을 잃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무미건조한 관료주의 시스템만큼이나 특별한 사건이 없이 계속되는 지루한 일상이 반복된다. 심심하고 무미건조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인생 또한 별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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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청부업자의 청소가이드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4
하들그리뮈르 헬가손 지음, 백종유 옮김 / 들녘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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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들어 가장 수치스러운 전쟁이라 불리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세계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참혹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전쟁은 참혹하고 비극적이지만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민간인 학살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인종 청소가 자행된 인간 몰락의 끝까지 보여준 끔찍한 전쟁이었으며 비극의 시기였다. 게다가 이 전쟁은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이 없다는 이유로 국제사회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중재하려는 적극적인 개입마저도 없어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전쟁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참혹한 비극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비극에 동조했던 사람들마저도 결국 깊은 상처를 가지고 살게 만든다.

하들그리뮈르 헬가손의 『살인청부업자의 청소 가이드』는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비극을 소년병으로 참전하며 겪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내면으로는 참혹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토미라는 한 남자의 극적으로 뒤바뀌는 인생을 통해 우리 시대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조명한다. 이런 설명만으로는 아주 무겁고 우울한 느낌의 이야기일 것 같은데 이 이야기는 오히려 유머스럽고 경쾌하다. 주인공 토미슬라브 보크시치의 엉뚱함 속에 숨겨져 있는 전쟁과 상처로 얼룩진 인생이 주위의 환경에 의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감상하는 것은 한편의 블랙코미디이기도 하다.


크로아티아 출신으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소년병으로 참전해 온갖 참혹한 현장을 직접 경험한 토미. 미국으로 건너온 뒤 톰 보식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톡시(독종)로 불리는 토미는 뉴욕의 히트맨, 살인청부업자이다. 토미에게 살인청부업이라는 직업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멧돼지를 쏴 죽이듯 사람을 죽이고 그걸로 밥벌이를 하는 것이다. 별생각 없이 콧수염이 달린 녀석을 죽이고 토미에게는 큰 문제가 생겼다. 그 콧수염 녀석이 바로 FBI였던 것이다. 토미는 어쩔 수 없이 고향인 크로아티아로 피신을 하기 위해 JFK 공항으로 향했는데 FBI의 감시를 피해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자신과 체격과 스타일이 비슷한 사람을 보고 그 사람으로 위장하기 위해 또 죽인다. 하지만 이게 토미에게 더 큰 시련을 안겨줄 줄이야! 죽은 사람은 성직자였다. 데이비드 프렌들리 신부님, 방송에 설교 토크쇼 요청을 받고 아이슬란드로 날아가게 된 토미. 토미의 인생은 추위와 믿음으로 가득한 아이슬란드에서 어떻게 변하게 될까.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전문 킬러가 어쩔 수 없이 성직자 역할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항상 죽음과 함께 살아온 토미에게 아이슬란드는 치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쏴 죽였을 남자를 향해 웃음 짓고 성직자의 역할을 제법 잘 수행한다. 끔찍한 인종 청소가 행해졌던 자신의 전쟁터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외국에서 건너온 다양한 인종의 외국인들과도 어울린다. 토미에게 크로아티아와 뉴욕의 진짜 인생은 죽음의 공간이었다면 아이슬란드의 가짜 인생이 삶의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토미는 다시 진정한 자신의 삶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이겨내야 하는 것은 고향의 삶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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