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피넛 1
애덤 로스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사랑과 전쟁」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검은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평생 사랑으로 함께할 것을 서약한 부부가 서로를 죽일 듯이 증오하며 머리 터지게 싸우다가 급기야 이혼 법정에까지 이르게 된 실제 사례를 극화한 실화 드라마였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는 상우(유지태)가, 이제 그만 “우리 헤어지자!”고 단호하게 말하는 은수(이영애)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무기력하게 항변한다. 하지만 황홀한 사랑도 끔찍한 전쟁으로 변한다는 것을 한번 경험한 적이 있는 은수는 상우의 물음을 단박에 자르고 야멸치게 “헤어져!”라고 자신의 말을 한다. 네 사랑은 아직 변하지 않았어도 내 사랑은 이미 변했으니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는 불멸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너의 현재형 마음은 아직 변하지 않았어도 너를 사랑했던 나의 과거형 마음은 이미 변했으니까.

애덤 로스는 『미스터 피넛』에서 ‘사랑해서 결혼했습니다. 하지만……’의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여 세 남자로 하여금 아내의 죽음을 꿈꾸게 한다. 아내를 여전히 사랑할 뿐만 아니라 아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아내의 죽음은 결혼으로 들씌워진 의무와 속박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를 되찾아 과거의 인생을 청산하는 동시에 새로운 인생을 도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처럼 느껴진다. 황홀한 사랑이 ‘결혼’이라는 현실을 거치기만 하면 도대체 왜 끔찍한 전쟁으로 변질되는 것일까?

사랑이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변해도 결혼의 법적, 사회적 구속력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연인이라면 서로의 사랑이 변하고 말았다는 사실에 상처받은 마음만 보듬으면 되지만, 부부라면 갈가리 찢긴 마음을 달래는 외에 결혼 제도로 얽히고설킨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간성의 밑바닥까지 내보이는 진흙탕 싸움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결혼을 선택했어도 결혼이라는 사회제도의 속성상 일단 결혼 이후의 사랑에는 법적, 사회적, 관습적, 도덕적 강제성이 부여된다. 아무리 사랑이라도 강제성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것은 나의 자유를 구속하는 굴레로 옥죄여든다. 어쩌면 나를 강제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본능일지도 모른다.

결혼은 대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서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더욱 가깝게 밀착되고 싶은 마음 외에는 다른 무엇도 계산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야 결심하게 된다. 법적, 사회적 구속력으로 연인을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엮어주는 결혼을 통과하면 언제까지나 장밋빛 ‘봄날’이 이어지리라고 전망한다. 자잘하게 다투는 일도 있겠지만 그야말로 사랑싸움일 테니 그것도 두 사람 사이에 권태가 감히 깃들지 못하도록 사랑의 긴장감을 유발하기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불꽃 튀는 사랑의 불멸과 불변을 믿는 뜨거운 열정의 계절이 지나고 나면, 사랑도 변한다는 냉정한 판단 아래 사랑의 대상을 가늠하는 차가운 이성의 계절이 돌아오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고 마음먹었지만, 이제 내가 무엇을 감수하고 있는지 조목조목 따져보게 된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나의 인생을 짓누르는 짐인 것만 같다. 그리고 내가 살았을 수도 있으나 살아보지 못한 다른 인생들이 달콤하게 나를 유혹한다.

애덤 로스는 처음부터 앨리스 페핀의 죽음을 들이밀면서 서스펜스와 미스터리 형식을 빌려 마치 동전의 양면 같은 사랑과 결혼의 비극적인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미혼의 잘생긴 의사를 약혼자로 둔 수잔 헤이스는 자신의 불륜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한다. “나는 결혼하고 싶었어. 하지만 나는 사랑에 빠지고 싶었어.” 마치 사랑과 결혼은 별개라는 듯이, 일단 결혼하면 사랑은 끝장난다는 듯이. 애덤 로스는 이 소설에서 결혼 이후 사랑이 왜 그렇게 변질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수긍이 가는 모든 문장들을 이용한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는 데이비드 페핀도, 그런 그를 조사하는 형사 샘 셰퍼드와 워드 해스트롤도 사실은 모두 아내의 죽음을 꿈꾸며 전쟁을 치른 전력이 있는 인물들이다. 그들 중 두 사람은 어쩌면 전쟁 끝에 정말로 아내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연민과 환멸과 절망과 인내를 지긋지긋하게 오가는 사랑이, 급기야 죄책감과 의무감밖에 남지 않은 사랑이 순전히 결혼 탓일까?

애덤 로스는 세 부부 가운데 유일하게 워드와 한나 해스트롤 부부에게만 희망적인 미래를 제시한다. 한나의 고통은 애매모호하게 그려져 독자들에게 충분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다소 부족하지만(사실 부부 사이에 벌어진 일은 무엇이 진실인지 그 부부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워드는 아내의 마음을 뼈저리게 이해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침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아내를 밖으로 끌어내려고 온갖 방법을 처절하게 동원하던 워드는 급기야 홀로 절망적인 울음을 터뜨린다. 어떤 묘책을 강구해도 요지부동이던 한나가 그제야 침대를 떠나 그에게로 왔을 때, 워드는 “견딜 수가 없어.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라고 흐느낀다. 그리고 “이제야 드디어 당신이 이해했네.”라는 한나의 말.

앨리스와 데이비드, 한나와 워드, 마릴린과 셰퍼드 그들이 끊임없이 서로에게 했던 말은 ‘당신은 절대 이해 못해’였다. 그것은 ‘제발 나를 이해해 줘’의 반어적인 표현일 것이다. 체로키 인디언들은 ‘나는 너를 사랑해’ 대신 ‘나는 너를 이해해’라고 마음을 표현한다. 이해할 수 있으면 사랑하지 못할 것은 없으니까. 사랑이 변하는 이유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감정 호르몬의 짧은 유효 기간 탓도, 결혼 탓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한없이 너그러웠던 마음이 차츰 옹졸해지자 몰이해라는 이기적인 괴물이 사랑까지 망각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임

1. 이 소설의 제목이 왜 ‘미스터 피넛’인지를 알게 됐을 때 눈물이 났다. 앨리스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땅콩이기도 하지만, 앨리스가 유산으로 잃어버린 땅콩 모양의 태아들이기도 하다. 앨리스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대목이었다.

2. 처음에는 앨리스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타살이라면 앨리스를 살해한 범인이 정말로 데이비드인지에 집중하게 됐는데 사실 이 소설에서 누가 진범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진다. 특히 알프레드 히치콕의 맥거핀 효과(사건을 전개하기 위해 중요한 역할로 도입하지만, 막상 도입된 다음에는 그 역할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장치)를 차용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말이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회상되는, 앨리스와 데이비드가 사랑에 빠졌던 시절에 함께 들었던 영화 강의 ‘결혼과 히치콕’이 내내 소설의 주제와 오버랩된다. 이쯤 되면 애덤 로스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는 생각도 든다. 히치콕을 훌륭하게 오마주하는 동시에 자신의 주제도 근사하게 형상화해 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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