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브루클린이라 불러주오 디 아더스 The Others 8
에두아르도 라고 지음, 고인경 옮김 / 푸른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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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도 라고의 『나를 브루클린이라 불러주오』라는 총체를 이루는 것은 모든 기록들의 편린이다. 전부 실제 작가인 에두아르도 라고가 창조하긴 했지만 일기, 편지, 신문 기사, 메모, (소설 속 인물이 쓴) 단편소설 등 단편적인 기록으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긴밀하게 맞물리고 엮어져 총체적인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 때문에 독자가 단숨에 읽어 내리기에는 꽤나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에두아르도 라고는 전혀 친절하지 않다. 번역본에는 따옴표만 없을 뿐 마침표와 쉼표가 문장이나마 구분하게 해주지만 원문에는 “모든 문장부호들을 생략했다”니, 독자로서 최대한의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실험 정신’이 강하다고 하겠다. 이야기도 시간순으로 전개되지 않고 시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뒤섞는다. 하지만 시간 죽이기용으로 딱 좋은 엔터테인먼트 일본소설처럼 ‘술술’ 읽히지는 않아도 소설 전체에는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묘하게 스며들어 있다. 처음에는 다소 어지럽게 여겨지는 기록들의 편린도 미스터리의 단서로 집중하다 보면 호기심이 배가되고 흥미가 증폭된다.

『나를 브루클린이라 불러주오』에는 실제 작가 에두아르도 라고를 제외하고 두 명의 작가가 더 등장한다. 그중에 한 사람은 갈 애커먼으로, 그 모든 기록들을 남긴 인물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네스터 올리버 채프먼으로, 그 기록들을 바탕으로 갈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책을 대신 완성하는 인물이다. 갈이 자신의 생애를 바치고 네스터가 자신의 인생이 뒤흔들리는 줄도 모른 채 완성하려 했던 책은 바로 『브루클린』, 즉 『나를 브루클린이라 불러주오』 자체이다. 이 책은 오직 한 여인, 나디아 오를로프를 위해 쓰였다. 갈은 고백한다. “예전에는 내가 왜 글을 쓰는지 몰랐지만 지금은 당신 때문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 오로지 당신을 위해 『브루클린』을 쓸 거야. 『브루클린』은 당신 덕분에, 당신 때문에 태어나는 거야.” 그렇다면 왜 하필 ‘브루클린’일까? ‘브루클린’은 갈과 나디아의 사랑이 시작되고 무르익고 끝나는 곳이다. ‘브루클린’은 갈이 자신을 사랑하긴 하느냐면서 “나와 결혼해 줄래?”라고 애타게 묻고, 나디아가 “제발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질문은 하지 말아요.”라고 어떤 대답도 회피할 때, 갈이 나디아와 딸아이를 낳으면 지어주고 싶어 한 이름이다. 그리하여 ‘브루클린’은 갈이 나디아만을 위해 남긴 책 제목이다.

『나를 브루클린이라 불러주오』는 구체적인 날짜와 함께 페너스포인트의 외진 해안, 검은 암초에 걸려 배가 무수히 난파된 바다를 바라보는 덴마크 선원들의 묘지 한쪽에서 갈의 장례식이 조촐하게 치러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처음부터 주인공의 고독한 죽음을 들이밀었으니 독자는 갈이 죽음에 이른 사연이 궁금해진다. 급기야 이 년 뒤에는 네스터가 갈의 무덤을 찾아와 『브루클린』을 바치면서 당신 대신 소설을 완성하는 동안 자신의 전 존재가 완전히 바뀌고 말았노라고 고백한다. 갈의 죽음과 『브루클린』 사이에 또렷한 연관성을 찾기 어렵지만, 독자는 뭔가 수상한 내막이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때부터 독자는 갈이 남긴 모든 기록들을 네스터가 가려서 재구성하는 대로 『브루클린』을 함께 읽는다. 『브루클린』에는 갈의 인생, 갈과 나디아의 첫 만남과 사랑과 영원한 이별, 술집 오클랜드와 그곳의 언저리를 맴도는 군상들, 그리고 네스터와 이 모든 인물들이 살았던 브루클린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치맛자락이 말려 올라가는 바람에 속옷조차 입지 않아 훤히 드러난 맨살의 음부를 우연히 들여다본 나디아와의 강렬한 첫 만남 이후 갈은 그녀에게 한눈에 매혹당한다. 나디아에게 송두리째 사로잡힌 갈의 영혼은, 갈이 나디아를 사랑하듯 나디아는 갈은 물론 세상의 어떤 남자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도 나디아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심지어 감히 나디아의 사랑을 요구하지 못하는 갈에게 달콤한 위안이 되어준 그런 믿음마저 산산이 부순 채 나디아가 다른 남자들과 사랑하고 결혼할 때도 갈의 영혼은 나디아를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갈은 자기 영혼이 괴로움으로 피폐해져도 나디아를 그를 필요로 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드나들도록 허락했다. 갈의 마음에 동조할 수 없었다. 책장을 거의 다 넘길 때까지 나디아의 매력에 시큰둥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그저 너무나 이기적인 여자일 뿐이었다.

나디아의 어떤 점이 그토록 매혹적이기에 자신을 떠나버린 그녀에게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갈의 인생이 허물어져 내렸을까? 어쩌면 나디아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딱 한 번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 마음을 온통 뒤흔들었던 장면. 누군가 연애편지를 잘게 찢어서 높은 건물의 창밖으로 던졌다. 허공에 흩뿌려진 연애편지의 조각들이 나풀나풀 내려앉자 나디아가 그 종잇조각들을 이어 붙여 연애편지로 되돌린 후 갈에게 건넸다. 누구에겐가 썼던 연애편지를, 혹은 누군가에게서 받았을지도 모를 연애편지를 조각조각 찢어 허공에 흩뿌려야 했던 사람, 또 그 연애편지의 조각조각들을 이어 붙여야 했던 사람의 그 간절한 마음이 나디아를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열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연애편지의 내용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나디아가 다른 남자와 평범한 가정을 꾸린 후에도 오직 갈만이 등장하는 일기를 썼다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싶기만 했다.

갈의 인생에서는 스페인과 브루클린에 대한 에두아르도 라고의 애정을 엿볼 수 있다. 갈에게는 출생의 비밀이 있는데 ‘사실 스페인 엄마와 이탈리아 아빠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너를 낳았단다’라는 이야기가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갈의 친부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파시스트와의 스페인 내전에서 스페인 공화국과, 전 세계에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국제 여단이 민주주의, 공화정,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어떻게 양심을 일깨우고 저항했는지 자세하게 들려준다. 에두아르도 라고는 국제 여단의 일원이었던 갈의 양아버지 벤의 입을 빌려 “아무리 받아들이길 거부해도 네게는 청산할 과거가 있다. 그것은 오로지 마드리드에서 가능해. 그래야 네 인생이 온전히 네 것이 될 거야. 너는 직접 마드리드 땅을 밟고, 엄마와 아빠가 네가 잊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인 그 언어로 말하는 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무엇보다 네 동족들 가운데 있어야 해. 어쨌든 그곳에서 내가 세상에 나왔으니까”라고 말한다. 그것은 아메리카니어드인 작가 자신에게 무수히 들려주는 말일지도 모른다. 존재의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스페인과 함께 브루클린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등장한다. 양할아버지 데이비드의 신문 칼럼을 통해 브루클린의 역사를 되짚는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이야기일지라도 데이비드의 펜을 거치면 브루클린의 매혹적인 내력으로 탈바꿈한다.

마지막으로 빠뜨릴 수 없는 이야기가 술집 오클랜드이다. 지금껏 언급한 인물들 말고도 『나를 브루클린이라 불러주오』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모두 오클랜드 주위를 맴돌며 주저앉는다. 오클랜드는 마치 거대한 중력을 가진 행성처럼 인생의 패배자, 세상의 낙오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그림자를 자신의 궤도 안으로 끌어들인다. 오클랜드의 주인 프랭크를 그들의 보호자로 자처하면서 그들에게 기꺼이 안식처를 제공한다. 인심 좋은 오클랜드의 ‘선의’를, 네스터는 오클랜드에 한번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옥죄는 ‘안전한 그물’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에게 닥친 역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위해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건만, 자신이 주저앉은 그 비극의 자리에서 무기력하게 머물러 있도록 오클랜드의 ‘안전한 그물’이 쳐진다고. 그것이 진짜 독이라고, 갈을 무너뜨린 것도 사실은 나디아가 아니라 오클랜드였다고. 글쎄, 네스터의 생각에 수긍하든 발끈하든 그것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나를 브루클린이라 불러주오』에서 나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온 장소는 오클랜드였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오클랜드의 주술에 걸려든 것일까? 나는 프랭크의 진심을 믿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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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의 아내
테이아 오브레트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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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 일기』를 읽고 있다. 2002년 8월에 그는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의 『킴』을 읽었는데 반가운 이름인 마이클 온다치가, 내가 사랑하는 소설 『잉글리시 페이션트』에 쓰려고 키플링의 어느 소설에 등장하는 누군가의 이름을 자신에게 물은 적이 있다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테이아 오브레트의 『호랑이의 아내』를 읽는 내내 키플링의 『정글북』이 반복되길래 문득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알마시가 키플링의 책을 읽어주는 해나에게 “키플링의 책은 천천히 읽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마이클 온다치가 알베르토 망구엘에게 묻고 해나가 알마시에게 읽어주던 그 책이 키플링의 『정글북』이었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호랑이의 아내』를 읽은 감상을 끄적일 때 다른 무엇보다 이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두 책을 뒤적이다가 키플링은 맞지만 『정글북』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 착각이었다. 그 책은 키플링의 『킴』이었다. 알마시는 해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키플링은 천천히 읽어야 해요. 쉼표가 찍힌 곳을 유심히 살펴야 자연스럽게 숨을 돌리며 끊어 읽는 곳을 찾을 수 있어요. 그는 펜과 잉크를 사용했던 작가이거든요. 한 페이지를 쓰다가도 여러 번 고개를 들어야 했죠. 창밖을 내다보면서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거예요. 혼자 있을 때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러하듯이. 어떤 작가들은 새들의 이름을 모르지만 키플링은 알고 있었어요. 키플링이 펜을 놀렸던 속도를 생각해요.”  
   

알마시의 ‘키플링을 읽는 법’이 늑대 소년 모글리의 모험담 『정글북』에도 어울릴까? 그러나 키플링은 『정글북』을 쓸 때도 종이에서 수없이 고개를 들어가면서 펜과 잉크를 사용했다. 『호랑이의 아내』에는 삽화가 곁들어진 작은 판본의 『정글북』을 평생 호주머니에 넣어 다닌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할아버지는 어린 손녀의 손을 꼭 잡고 동물원에 호랑이를 보러 가서, 수없이 어루만지고 펼쳐 본 탓에 다 낡고 해진 그 책을 읽고 또 읽어주었다.

『호랑이의 아내』는 다 자란 손녀 나탈리아 스테파노비치가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전해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가족을 두고서 아무런 인연도 없는 낯선 산간벽지에서 홀로 죽어간 할아버지의 의문스러운 궤적을 더듬으며 그의 신비로운 일생을 추억한다. 전설로 가득한 할아버지의 생애 속으로 들어가는 비밀 열쇠는 『정글북』과 호랑이와 ‘호랑이의 아내’로 불린 소녀와 죽지 않는 남자이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나탈리아와만 공유한 “너와 나, 오직 우리 둘만의 것”으로 ‘마음속에 간직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전쟁.

먼저 전쟁부터 이야기해야겠다. 작가 테이아 오브레트는 유고슬라비아계 미국인이다. 발칸반도의 유고슬라비아에 대해 찾아보면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옛 나라’라는 정보만 얻을 수 있다. 1991년에 일어난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유고슬라비아는 갈가리 찢겨 현재 일곱 나라로 분리되어 있다고 한다. 인종, 민족, 종교는 달라도 좋은 이웃으로 더불어 하나였던 나라가 난무하는 국경선들로 금이 간 것이다. 무시로 지나다니던 도로가 하루아침에 총을 든 군인에게 막혀 있고, 갑작스레 지어진 국경선 저편에 고향이 있다는 이유로 간첩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잠깐 떠나왔지만 영영 다른 나라가 되어 이제 돌아가지 못하는 집은 암묵적으로 약탈이 허용된다. 그러니까 다른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우리나라의 팔도가 내전에 휩싸여 여덟 개의 국경선과 나라로 반목하는 셈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저 역사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의, 자신들이 현재 처한 상황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아 참담하기 그지없었을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물론 『호랑이의 아내』에는 유고슬라비아나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가리키는 어떤 시간도 공간도 등장하지 않는다. 도시는 ‘도시’이고 시골은 ‘시골’일 뿐 지명이 쓰였다면 그것은 허구의 이름을 가진 미지의 장소이다. 다만 작가의 출생 내력과 함께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 배어 있는 정서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테이아 오브레트는 전쟁을 배경으로 삼았다고 해서 자기 소설이 ‘역사의 무게에 짓눌리고 정치적인 시선에 함몰되길 원하지 않는다’고 했으므로, 이쯤에서 호랑이를 이야기해야겠다. 호랑이는 할아버지가 평생 사로잡혀 있던 대상이다. 어린 시절에 글자를 배우며 읽었던 『정글북』의 시어 칸에게 매료되고 우연찮게 산간벽촌 갈리나로 찾아든 호랑이에게 압도된 이후로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정글북』의 시어 칸과 호랑이 이야기를 무수히 들려주고, 손녀를 데리고 동물원으로 호랑이를 보러 가고, 손녀가 자라서 더 이상 동물원에 관심이 없어진 후에도, 전쟁이 벌어진 이후에도 일종의 의식처럼 혼자 호랑이를 보러 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들 중에서 손녀 나탈리아의 기억에 유독 각인된 이야기는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전설처럼 들었던 호랑이와 ‘호랑이의 아내’라 불린 소녀의 이야기였다.

할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인간의 보살핌에 익숙해져 야성을 잃고 도시의 동물원 우리를 ‘구속’이 아닌 ‘안락한 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자 인간은 나 몰라라 동물들을 우리에 가둬둔 채 동물원을 미련 없이 버렸다. 호랑이는 굶어 죽기 직전에 간신히 탈출하여 본능의 나침반에 따라 울창한 숲으로 향하면서 야성을 되찾아간다. 갈리나에서 멈춘 호랑이는 그곳에서 귀머거리인 벙어리 소녀와 깊은 교감을 나눈다.

귀 먹고 입 닫은 그 소녀는 영리하고 성숙하고 매혹적이고 자유분방한 언니 대신 형부가 될 뻔했던 갈리나 남자 루카에게 거의 팔리는 셈이나 다를 바 없이 시집을 온다. 사로보르의 부유한 터키 상인인 아버지는 처치 곤란한 짐짝을 떠맡겨 홀가분하다는 심정으로 속임수를 써서 루카에게 소녀를 버리고, 루카는 그 언니에게는 구슬라를 연주하며 연가(戀歌)를 바치는 다정하고 섬세한 남자일지라도 소녀에게는 난폭하고 무자비한 폭군으로 돌변한다. 소녀에게는 이름조차 없다. ‘아마나 에펜디’라는 분명한 이름을 가진 언니와 달리 소녀의 이름도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데 아버지라는 사람이 소녀의 이름을 가르쳐주는 일조차 귀찮아 생략해 버렸으니 누구에게 물을 수 있을까?

똑같이 인간에게 버림받고 상처 입은 호랑이와 소녀는 어쩌면 서로에게 이끌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둘 다 갈리나에서는 이방인이다. 호랑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호랑이’인 줄 모르고 ‘악마’라고 두려움에 떨었던 갈리나 사람들은 호랑이는 물론 자신들과 다른 종교를 가진 터키 소녀도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루카가 사라진 집에서 배가 불러오는 소녀에게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호랑이의 아내’라는 전설 속에 소녀를 가두고 금기한다. 나중에 소녀가 생애 처음으로 만들어낸 소리가 호랑이 소리(“윗입술이 들리고 이가 번쩍거리더니 코에 주름을 잡고는 씩씩거리는 소리를 냈다.”)라는 문장을 읽을 때는 『정글 북』의 모글리가 선연하게 겹쳐질 수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에서 죽지 않는 남자와는 어떤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을까? 죽지 않는 남자 가브란 가일레이(가보)도 호랑이나 소녀처럼 모든 인간들에게 반갑지 않은 이방인이다. 가보는 『호랑이의 아내』를 환상적인 분위기로 이끄는 신비로운 존재이다. 그는 특별한 커피 잔으로 다른 사람의 죽음을 내다본다. 며칠, 혹은 몇 시간 후에 죽을 운명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어 생과 이별하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선의를 베풀지만, 그것이 과연 필사의 숙명을 지고 있지만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단 하나도 알지 못해 두려워하는 보통의 인간에게도 선의로 받아들여질까? 이 소설에도 가보에게 죽음의 커피 잔을 건네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결코 선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한 가보를 죽임으로써 그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가보는 죽지 않는 남자이다. 그를 살해하면서까지 발버둥 쳐도 죽을 운명이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보는 무수히 죽임을 당했다가도 되살아나서 사람들에게 커피 잔을 건넨다. 딱 한 번, 한 여인의 죽음을 보았지만 그 여인을 한눈에 사랑하게 되어 그녀에게 건넨 커피 잔을 깨뜨려버렸다. 그녀가 바로 루카와 결혼을 앞둔 아마나 에펜디였다.

그러니까 『호랑이의 아내』에서 지명 하나, 사건 하나, 인연 하나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이 할아버지의 인생이다. 갈리나의 유일한 정체불명 약제사가 선물한 『정글북』을 읽고 호랑이를 한눈에 알아본 아홉 살 소년은 푸주한 집안에 아무것도 모른 채 팔려 온 열여섯 소녀와 호랑이 사이에 따뜻한 이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다. 그리고 소년도 그 깊은 감정을 함께 나눌 수 있길 갈망한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소녀를 위해 난롯가 재 위에 서투른 그림을 그려가면서 『정글 북』을 들려주지만, “인간의 아이가 호랑이의 생명을 어떻게 끝장내는지”는 차마 들려주지 못한다. 소녀를 위한 소년의 이야기에서 호랑이는 언제나 살아남는다.

왜 호랑이여야 했을까? 테이아 오브레트가 『정글북』의 시어 칸에게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유고슬라비아에서 호랑이가 각별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인간과의 어떤 교감도 불허하는, 서로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상징적인 동물로 호랑이를 선택했기 때문인지, 그저 우연찮게 호랑이가 떠올랐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소녀에게 선물받은 강렬한 주황빛 호랑이 털 한 줌을 평생 간직했다가 『정글북』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에 싸서 손녀 나탈리아에게 남겨준다. 시어 칸이 형형하게 그려진 페이지를. 그 페이지가 찢겨 나간 『정글북』은 아마도 죽지 않는 남자와 내기한 대로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가보의 커피를 마시면서 그에게 건넸을 것이다.

『호랑이의 아내』에는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손녀가 자라는 내내 분명한 이유가 설명되지는 않지만 크고 작은 반목과 분쟁과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졌음을 암시한다. 그런데도 참담한 현실을 뒤로한 채 환상적이고 처연하고 아름다운 전설 속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는데, 그것은 날것 그대로인 역사의 비극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날카롭게 베인 상처를 위무해 주고 싶었던 작가의 간절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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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 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김보경 옮김 / 시공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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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창조한 불멸의 어린 왕자가 되어버린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그 이름에 순수하게 공명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어린 왕자』에 얽힌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면.

가쿠다 미쓰요는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라는 연작소설집에서 『어린 왕자』를 각별하게 추억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한 친구가 그림이 있는 작은 책을 선물했는데 단숨에 읽고서는 굉장하다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언젠가 한번 읽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고, 알고 보니 초등학교 2학년 때 병원 침대에서 재미없다고 내던진 책이었다고, 그 책은 바로 중학교 1학년 때 하늘로 돌아간 이모가 선물한 『어린 왕자』였다고, 비로소 “그 책에 쓰인 내용을 이해했을 때 그 이야기를, 이야기의 세계를, 단어 하나하나를 다시 한 번 이모에게 선물 받은 것 같았다”고.

내 추억도 가쿠다 미쓰요와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 나는 초등학교 때 이모네 집에 놀러 갔다가 이모가 옷장 서랍 안에 고이 넣어둔 책을 발견했었다. 그게 『어린 왕자』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모가 직장에 나가서 일하는 동안 몰래 읽었는데, 그때부터 생텍쥐페리의 아름다운 문장들과 어린 왕자에게 푹 빠졌었노라고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절반은 하품을 참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면서 겨우 읽어냈다. 가쿠다 미쓰요처럼 차마 내던지지 못한 것은 다른 읽을거리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훗날 나도 그 책에 쓰인 내용을 이해할 만큼 성장했을 때에야 비로소 이모가 흔한 책 한 권에 지나지 않는 『어린 왕자』를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생텍쥐페리의 편지를 엿본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토록 말간 동화를 쓴 사람의 진심은 얼마나 투명할까. 원래 편지는 다른 누군가가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편지를 받을 대상만을 염두에 둔 글이다.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편지에 담기는 진심의 정도가 달라지겠지만, ‘어머니’라면 진심임을 의심할 여지가 완벽하게 사라진다. 그렇다. 『생텍쥐페리, 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는 생텍쥐페리가 열 살 소년일 때부터 마흔넷의 나이에 영원히 하늘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그의 어머니에게 사랑과 그리움을 담아 숱하게 써 내려간 편지들이다.

이 편지들은, 자신은 그들을 알지 못하지만 자기 글을 읽고 한마디씩 늘어놓을 불특정 다수의 시선에서 놓여나, 오직 자신과 가장 친밀한 엄마라는 유일한 독자를 위해 꾸밈없이 쓰인 글이다. 치부조차 생채기 없이 감싸줄 절대적인 신뢰의 대상에게 토로하는 감정들은 연인을 향한 사랑의 긴장감, 친구에 대한 감정의 절제, 혹은 그들 모두에게 그럴듯하게 보이고픈 과시욕, 그 어떤 과장과 축소의 여과도 없다. 그저 자신이 느끼는 딱 그만큼의 감정들을 엄마한테 털어놓는다. 그 때문일까,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 중 어느 하나의 별에 사는 어린 왕자였던 생텍쥐페리가 인간적인 욕망과 감정과 고뇌로 이루어진 사람으로 내려앉아 나와 눈 맞추는 것 같은 착각이 든 것은.

그래서 엄마한테 보내는 생텍쥐페리의 편지들을 읽고 있으면 세상의 여느 자식들과 다를 바 없는 면면들에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만다. 여기에서는 어느 별나라의 어린 왕자 생텍쥐페리가 아니라 한 어머니의 아들인 인간 생텍쥐페리로 친밀하게 다가왔던 몇 가지만 기록해 두기로 한다.

『생텍쥐페리, 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가 엄마한테 보내는 편지들만 (거의) 모아놓았기 때문인지 생텍쥐페리는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엄마에게 상당히 의지한 것처럼 보인다. 어린 시절의 학교생활부터 여러 번의 입시 실패를 거쳐 잡다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비행사로 자리 잡기까지 생텍쥐페리는 자기 일상을 시시콜콜 전한다. ‘과묵한 아들, 재잘대는 딸’의 공식에서 벗어난 다정한 ‘딸 같은 아들’이랄까. 그리고 어린 시절의 용돈뿐만 아니라 성인으로 경제적인 독립을 도모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아 꽤 자주 돈이 바닥나 곤란한 처지를 토로한다. 이번 편지에서는 곧 구하게 될 직장에 대해 낙관했다가도 다음 편지에서는 냉정한 현실에 부닥쳐 실망스러워하는 모습도 곧잘 보인다. 소설 쓰는 비행사로 세계 독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으면서 소중한 추억의 한 켠에 자리하기까지 생텍쥐페리도 불만에 가득 차서 변변치 않은 직업들을 전전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비행에 대한 사랑만큼은 확고하여 그 순간에는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것이 느껴진다.

생텍쥐페리는 늘 고독과 외로움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수천 미터 상공으로 날아올라서는 홀로인 고독을 만끽하다가도 지상으로 내려앉아서는 외로움에 사무친다. 그는 편지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입 밖으로 고백한 적은 없지만 엄마를 사랑해요!’라고 뜨겁게 고백하면서 ‘엄마의 편지만큼 제게 큰 기쁨을 주는 것은 없어요!’라고 날마다 편지를 보내달라고 어린아이처럼 성마르게 보챈다. 서로의 소식을 알 길이 편지밖에 없어서일까, 그는 엄마의 편지를 보채며 자신의 편지를 쓰는 것으로 지상의 외로움을 달래는 것 같았다. 이미 그동안의 무수한 편지들을 통해 마음으로 수천 번 안아준 엄마를,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비행사로서 마지막 정찰 임무를 나서기 직전에 또다시 마음으로 엄마를 힘껏 안는다. 그리고 이다음에 엄마를 안을 때는 마음뿐만 아니라 자신의 건장한 두 팔로 직접 엄마의 온기를 느끼며 안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는 하늘로 온전히 날아올랐으나 지상으로 무사히 내려앉지는 못했다.

생텍쥐페리의 편지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시작하여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끝난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어른들의 보호 아래 전쟁의 위협을 절감하지 못했던 철부지 소년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몸소 지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그는 마지막 편지에서 엄마에게 고통스레 묻는다. “이 시대는 왜 이토록 불행한 걸까요?” 아들을 놓친 엄마는 “주여, 제 아이를 어디로 데려가셨나요?”라고 울부짖는다. 대중에게는 어린 왕자의 신화를 덧씌워 더욱 신비로운 존재로 가슴에 새긴 생텍쥐페리의 마지막 비행이 아들의 생사조차 몰라 원통했을 엄마의 가슴을 날카롭게 베었을 것을 생각하니, 그동안 ‘불가사의한 행방’ 운운하며 그의 죽음을 가볍게 입에 올렸던 일이 죄스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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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 - 보통의 독자 버지니아 울프의 또 다른 이야기 보통의 독자 2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인용 옮김 / 함께읽는책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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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는 「책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충고는 “자신의 본능을 따를 것,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것, 자신의 결론에 이를 것”뿐이라고 말한다. 독서에 대해 이토록 간명하면서도 모든 핵심을 꿰뚫는 정의라니 감탄을 거듭하게 된다. 그러나 그 세 가지뿐인 것이 얼마나 이상적인 독서를 의미하는지도 잘 안다. 그런 경지에 이르려면 보통 이상의 독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일단 ‘본능을 따를 것’. 이것은 자신이 책을 좋아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자신이 무슨 목적으로 책을 읽으려 하는지, 책에 대한 자기 취향이 어떤지 아직 모르는 사람이나 남의 추천이 아니라면 무수한 책들 중에 어떤 책도 선뜻 고르기가 두려운 사람처럼 아직 책의 문을 열지 않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첫 단계이다. 경제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내 마음이 이끌리는 취향대로 한껏 사들여 빼곡히 채워놓은 책장에서 그때그때의 기분과 변덕에 따라 책을 펼치는 일은 얼마나 황홀한가. 물론 책의 문 안에 들어서면 필연적으로 여기저기에서 얻어듣게 되는 작가의 권위나 작품의 평가 같은 외부적인 영향력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순전히 나의 내재적인 본능에만 따른 선택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책을 선택하면 ‘이성을 사용할 것’. 여기서부터 나는 난관에 부딪힌다. 처음 책장을 펼칠 때부터 내 선택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고무되어 있으니 콩깍지가 씐 시선에 이성이라는 잣대가 끼어들 여지는 좀처럼 없다. 다만 서슬 퍼런 이성을 마구잡이로 들이댈 때가 있으니 그 같은 호의를 끝내 지속시키지 못하고 냉담하게 팔짱을 끼게 될 경우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이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민망해지는데, 이때부터는 급격하게 실망감에 휩싸여 눈에 불을 켜고 트집거리를 찾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버지니아 울프는 또다시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결론에 이를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결론이다. 누구나 책을 읽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의 결론인지 나의 결론인지 모호할 때가 많고,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내가 읽어낸 만큼의 결론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분명 결론에도 독자의 수준에 따라 ‘질’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안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상한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보통의 독자, 또 다른 이야기』는 그녀가 충고한 독서의 세 단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매혹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나에게 버지니아 울프를 읽는다는 것은 절반쯤 겨우 읽어 나간 『세월』의 책장에 책갈피를 끼워둔 채 덮어놓고 여러 해가 지나도록 다시 펼쳐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이상한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을 두려움 없이, 주저함 없이 펼쳐 든 것은 나의 서가 분류법에 따르면 ‘책에 관한 책’으로 분류되고, 그런 책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개인적인 독서에 대한 나의 지독한 관음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제대로 읽어내지는 못했어도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은 별처럼 반짝이니까.

버지니아 울프는 “삼사백 년 전의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이 되는 상상을 하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다”고 이 책을 시작한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그녀의 본능이 시키는 대로 엘리자베스 시대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소개한다. 주로 그들의 산문에 집중했는데, 그녀의 말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시대의 산문에는 아름다움과 불완전함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대에는 아직까지 산문이 사람들의 일상을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령 글 속에서는 하녀도 귀부인처럼 행동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신문 부고조차 “죽음에 대한 명상과 영혼의 불멸성”을 숙고했던 그 시대의 문학 가운데 최대한 화려한 격식과 점잖은 체면을 거두고 진솔한 마음으로 남긴 내밀한 산문들을 찾아내어 행간에 숨어 있는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의 속마음과 일상과 응접실과 사랑과 교육과 음식을 어루만진다. 그러나 그녀의 말처럼 엘리자베스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한 그 시대가 배경인 글을 읽어도 그 시대의 시선을 가질 수는 없다.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시선으로 그 시대를 바라보면서 단지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내가 살아보지 못한 특정 시대를 상상하는 일은 달콤한 기쁨인 것이다.

물론 그나마 이름 정도는 익힌 존 던이나 대니얼 디포, 로렌스 스턴, 토머스 하디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낯선 작가인 데다가 버지니아 울프가 언급하는 작품들도 읽어보지 않아 그녀의 문장들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녀가 섬세한 시선으로 써내려간 지적인 문장들이 매혹적이라는 사실은 절대 부정할 수는 없다.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난해한 것만은 아니라 친절하고 흥미로운 부분들도 가득하다. 도중에 맥락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재미있고, 완독한다면 보람까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다른 작품을 펼칠 용기를 얻는다. 무엇보다 그녀처럼 읽고 싶다는 강렬한 부러움에 휩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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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법칙 민음사 모던 클래식 35
러셀 뱅크스 지음, 안명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흔히들 그 시대의 사회상을 알기 위해서는 역사소설을 읽는 것이 가장 좋다고 이야기하지만 성장소설은 역사소설 못지않게 그 시대를 속속들이 보여준다. 성장소설 하면 당연히 꼽게 되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서도 성장기의 소년에게 비친 그 당시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흑백으로 대표되는 인종문제와 가정의 인습의 파괴가 드러난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주위의 허영과 위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시대를 뛰어 넘어 상실된 가정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탈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모습을 그린 『거리의 법칙Rule of the Bone』이 그것이다. 이처럼 다른 시대의 사회적인 상황에서도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어른들이 붙인 ‘문제아’라는 딱지이다. 그 ‘문제아’들은 스스로 거리로 뛰쳐나간 것이 아니라 내몰린 것이다. 부모의 이혼과 학대와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나오게 된 ‘문제아’들은 그곳에서 그렇게 살아간다.

채피는 집 안을 뒤지고 있다. 마리화나를 사기 위해 팔아먹을 것을 찾기 위해서이다. 엄마가 모아둔 것 같은 옛날 동전들을 발견하고 전당포에 맡겨 마리화나를 핀다. 하지만 양아버지와 엄마에게 들켜 쫓겨나게 되고 아는 형인 러스의 집에서 폭주족들과 함께 살게 된다. 폭주족들이 훔친 물건에 손을 대다 도망간 채피는 스쿨버스에서 아이맨이라는 자메이카인을 만나게 된다. 자신의 삶에서 유일한 안식처였던 마리화나를 제외하고는 채피는 처음으로 어른에게 신뢰를 느낀다. 엄마에게 말할 수 없던 비밀인 양아버지의 성적 학대, 부자들과 주위 사람들의 위선을 보며 환멸을 느낀 채피는 오히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아이맨의 믿음과 충고 속에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채피는 다시 가족의 삶을 꿈꾸지만 복구될 수 없는 그들의 관계에 절망을 느끼고 아이맨을 따라 자메이카로 떠나게 되고 자신의 친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성장소설은 말 그대로 성장소설이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인생에서도, 끝없는 절망과 방황에서도 자신이 느낄 수 있는 행복과 희망을 찾아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성장하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 어른의 삶을 살아도 주위에 조금 더 따뜻한 시선을 갖게 되는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이 성장하는 것이다. 러셀 뱅크스는 이런 대비를 보여주기 위해 극단적인 구조를 만들어낸다. 사회는 언제나 쓰레기통일 뿐이고 어른들은 그 속에 사는 쓰레기일 뿐이라고, 아무런 의식 없이 죄를 짓는 채피의 모습까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 전개는 너무 작위적이기도 하지만 효과는 탁월해 보인다. 결국 채피를 바꾼 것은 자신을 믿어주는 한 사람의 어른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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