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있어준다면
게일 포먼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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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남은 사람에게 신경이 쓰였다. 그것이 죽음의 자리라면 더더욱 저세상으로 떠나간 사람들보다 홀로 이 세상에 남겨진 사람이 가여워 견딜 수 없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한꺼번에 잃고서 혼자 살아남은들 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다시 살아갈 의지를 마음에 품으려면 얼마나 큰 용기를 내야 할까? 근원적인 상실감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과 사무치는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라는 것이 과연 있기나 할까? 그래서 ‘일가족 사고’ 뉴스를 보면 가슴부터 덜컥 내려앉고 그중에서 누군가 홀로 생존하면 안도의 마음에 앞서 눈물이 왈칵 솟아난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가 슬프게 각인된 것은 수잔 때문이었다.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는 아슬란으로 하여금 나니아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우리 세계에서 어린아이를 불러내게 하는데, 아슬란은 나니아의 탄생을 지켜보았던 디고리와 폴리 다음으로 페번시가의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도 불러들였다. 그러나 나니아의 멸망 이후 진짜 나니아에는 수잔을 빠뜨렸다. 수잔은 나니아를 까맣게 잊어버린 채 어른이 되려고 안달하느라 오지 못했다고 다른 형제들이 대신 말했다. 피터와 에드먼드와 루시가 진짜 나니아로 오게 된 것은 우리 세계의 대형 열차사고 때문이었다. 그 아이들의 부모도 같은 열차를 타고 있다가 죽고 말았다. 결국 페번시가에는 수잔만 남게 되었다. 수잔이 ‘나니아를 까맣게 잊은 어른’은 나니아에 초대받지 못한다는 비유의 희생양일 뿐임을 잘 알지만, 또 이 이야기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남은 수잔의 외로움에 집중한다는 것은 『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중심 주제를 흐리는 일임은 더더욱 잘 알지만,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맴돌았다. 수잔은 얼마나 외로울까?

『네가 있어준다면』의 열일곱 살 소녀 미아도 그렇게 홀로 ‘남은’ 또 한 명의 수잔이었다. 평범하고 행복한 미아네 가족의 평화로운 일상에 어두운 그림자 따위는 깃들 틈이 없을 것 같지만, 대상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교통사고는 미아와 가족의 생사도 불시에 갈라놓고 만다. 그 참혹한 사고로 육체에서 이탈된 미아의 영혼은 엄마와 아빠의 처참한 주검을 목격하고 간신히 숨만 붙은 채 끔찍하게 망가진 자신의 육체도 내려다본다. 어린 남동생 테디는 사고 현장에서 찾지 못했지만 곧 자신만 남겨둔 채 엄마, 아빠와 함께 죽음의 나라로 떠나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엄마와 아빠, 남동생까지 모두 잃은 미아에게 남겨진 것은 ‘가족 없이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가족과 함께 죽을 것인가’를 홀로 선택하는 일뿐이다.

간신히 살아남는다고 해도 앞으로의 인생에는 가장 가까이에서 끝까지 나를 위해 응원해 줄 가족이 없는데 자신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은 어떤 선택을 하든 사무치게 외롭고, 지독하게 무섭고, 끔찍하게 슬프고, 다른 무엇보다도 가혹한 일이다. 나라면 생사의 결정권을 포기할 것이다. 그게 홀로 남겨지는 것보다 덜 힘들고 더 쉬울 테니까. 미아도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실과 중환자실을 긴급하게 오가며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자기 육체를 지켜보면서 비로소 죽음보다 삶이 두려울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다. “죽는 건 쉽다. 사는 게 어렵지.”

미아를 죽음보다 두려운 삶으로 이끄는 것은 생기 없는 자신의 육체를 찾아와 그래도 남아달라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이 세상의 사람들과, 미아와 미아네 가족이 그들과 함께했던 추억과, 미아가 가장 좋아하는 첼로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래도 미아에게는 남겨진 것이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모와 삼촌, 사촌들, 미아가 깨닫기도 전에 먼저 미아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알아주는 단짝 친구 킴, 장르는 달라도 미아의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미아가 어떤 모습이어도 세상에서 가장 펑키한 여자로 봐주는 록밴드 보컬 남자친구 애덤, 그리고 첼로. 무엇보다 “재수 없는 계집애!”라는 말을 들으면 “그건 그냥 페미니스트의 다른 이름일 뿐이야.”라고 우쭐해하는 엄마나, “누구나 그냥 떨면서 버티는 거란다.”라고 무대 울렁증을 느끼는 미아를 안심시키는 아빠나, “12월이 되면 나도 여덟 살이야! 그럼 나도 어른이니까 ‘테디’가 아니고 ‘테드’라고 불러야 돼. (단짝 여자친구) 케이시 카슨이 그랬어!”라고 꼬맹이이길 거부하는 테디는 미아가 살 수 있다면 죽음을 선택하길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미아를 홀로 남겨두지는 않았을 것임을 미아는 알고 있다. ‘그래도 살아!’와 ‘그래도 남아줘!’라는 절실한 외침에 미아는 마지막 힘까지 그러모아 화답한다.

미아는 어려운 선택을 했다. 잘했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미아에게 말해 주고 싶은데 그 말이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미아의 선택을 지켜보고도 미아 같은 상황에 처하면 언제든 쉬운 선택을 포기하지 않을 나의 그 말은 섣부른 격려와 어설픈 위로로 미아를 아프게 하기만 할 것이다. 언제든 미아일 수 있지만 아직은 미아가 아닌 사람의 너무나 이기적인 마음일 테니까. 미아의 선택은 ‘사무치게 외롭고 지독하게 무섭고 끔찍하게 슬픈 이야기’의 진정 행복한 결말일까? 나는 여전히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다. 그래서 게일 포먼의 『네가 있어준다면』은 줄곧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삶의 희망을 한 자락 남겨두는 듯하고, 또 줄곧 삶을 이야기하면서도 죽음이 곳곳에 유혹의 덫을 놓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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