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
최성일 지음 / 연암서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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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관한 책은 눈에 띄는 대로 모조리 사게 된다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인 기억이 남아 있는데 지금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시키기』를 뒤적이니 도무지 어느 책장 사이에 숨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 또 내 편집된 기억의 착각일까. 아무튼 이 책을 찬찬히 다시 읽어가며 그 구절을 기필코 찾아내리라는 결심을 해두고, 최성일의 『한 권의 책』을 읽은 감상을 남기는 일로 돌아온다. 그러나 최성일이라면 이런 나의 무책임한 태도를 마뜩지 않아 했을 것이다. 그는 사소한 인용 하나도 허투루 간과하지 않고 그 정확한 출처를 확인하는 일에 철저했다. 그러니 자신이 평하는 책의 부정확한 출처에도 눈감을 수 없었으리라. 그는 잘못된 출처를 정확하게 바로잡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도, 자신이 읽은 책에도 엄격하고 성실한 전문 서평가였다.

『한 권의 책』에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앤 패디먼(?)이나 “책을 다룬 책을 워낙 좋아한” 최성일처럼 책에 관한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마추어 독자의 욕심 덕분이다. 세상의 무수한 책들 중에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진흙 속 진주’ 같은 책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다른 사람은 무슨 책을 읽는지, 혹은 같은 책을 읽고서 어떤 느낌을 받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엿보고 싶은 호기심은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것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만국 공통의 뻔한 이유일 뿐이다. ‘최성일’이라는 이름이 『한 권의 책』을 펼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전에 그의 책 하나 변변히 읽지 못한 채 이름자 정도만 귓결에 얻어듣고서 이제야 남편을 대신한 아내의 감동적인 머리말에 이끌린 나의 얄팍한 동기(아내는 『한 권의 책』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문장부호 하나하나에서 남편의 소중한 숨결을 찾았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분신이나 다를 바 없는 그 하나하나를 얼마나 무수히 어루만졌을까)가 고인에게 부디 누가 되지 않길 바란다.

『한 권의 책』은 최성일이 생전에 여러 매체에 기고했으나 미처 책의 형태로 묶여 나오지 못한 ‘서평’들을 이 한 권의 책에 담은 모음집이다. 그는 두 쪽 남짓의 짧은 분량으로 어떤 책이든 그 책의 알맹이를 개관하고 자신의 분명한 호오(惡好)와 시비(是非)로 장점은 칭찬하고 단점은 지적하여 바로잡으면서 자기 견해까지 명확하게 드러낸다. 감정의 낭비도, 쓸데없는 사족도 끼어들 여지없이 그 책을 매개로 다른 책과 작가뿐만 아니라 출판 뒷이야기도 두루 언급하면서 이해와 판단의 스펙트럼을 넓힌다. 전문가의 ‘서평’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전문 서평가가 아니지만, 나도 책을 읽고 나면 개인적인 기록을 남긴다. 그저 책을 소비하는 독자로서 책을 읽은 그때 불현듯 떠오른 나의 느낌과 생각을 좀더 오래 간직하고 싶은, 지극히 사적인 되새김질이다. 1999년 겨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난쟁이가 하는 말』부터였다. 다섯 줄 남짓으로 책에 대한 인상만 간략하게 남기던 버릇은 십여 년이 흐른 후 나 홀로 과잉된 감정과 나에게만 애틋한 추억과 무심결에 곁가지로 흐르는 사념으로 쓸데없이 말만 길어졌다. 어차피 공식적이 아니라 자족적인 기록에 불과하므로 전문가의 책임을 나에게 적용하는 것은 너무 엄격하다고, 내 취향에 기반한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판단과 그에 따른 내용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 왔다. 어차피 호오를 드러내고 시비를 ‘판단’하는 일에 ‘100퍼센트 객관성’을 담보하기란 불가능한 법이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는 걷어내긴 하지만, 인터넷의 개인 공간에 그 기록을 흩뿌리기 시작한 후 단 한 명이라도 그것을 읽을 가능성이 있다면 책임의 정도에 대해 다시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전문 서평가의 잣대를 아마추어 독자에게 똑같이 들이대는 것은 글의 목적에 따른 자유를 침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최성일의 서평을 읽다 보면 자기 판단을 뒷받침하는 폭넓은 근거들이 욕심나고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자신감과 책임 의식이 부러워진다. 정혜윤의 책 이야기는 감각적이고 세련되고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잡혀 있어 독자의 감성을 자극하고 마음을 울리지만 때론 그녀의 모호한 감정선을 따라잡기 힘들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종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에 비해 최성일의 책 이야기는 자기감정에 함몰되지 않은 채 책을 소개하는 데 가장 적절하고 명확한 단어를 선택하고 쉬운 문장을 구사하며 어떤 판단을 내린다면 그의 박식한 지식과 식견이 엿보이는 근거를 제시하여 훨씬 설득력 있다. 책임을 전제한 설득력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힘인가. 지금까지도 구구절하긴 했지만, 이것은 최성일의 성실한 서평을 직접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끝없이 이어질 사념은 그만 늘어놓고, 『한 권의 책』을 읽는 동안 흥미롭게(?) 다가왔던 사실들만 몇 가지 더 기록하겠다.


『몬테크리스토 백작』(민음사) 완역본은 무려 다섯 권에 이르는데 알렉상드르 뒤마가 “그의 문하생들에게 작품의 일부를 나눠 쓰게 했다”(136쪽)고 한다. 『지적 생활의 발견』(위즈덤하우스, 『지적 생활의 방법』(세경멀티뱅크)의 개정판)은 ‘나만의 도서관’을 이야기해서 읽고 싶었지만 이 책의 저자인 와타나베 쇼이치가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인사”(240쪽)라는 것을 알고서 그럴 마음이 싹 달아났다. 코난 도일은 “강직한 식민주의자”였다(241쪽). 마리아 몬테소리는 교육학자로 추앙받고 있지만 “롬브로소의 선천적 범죄이론을 지지했다”(325쪽). 그가 소개한 책들 중에서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책광석 번역, 페이퍼로드)은 몹시 읽고 싶어졌다. 그가 다른 책을 소개하면서 언뜻 이야기한 ‘웬델 베리’가 떠올라 지금 그의 『온 삶을 먹다』를 읽고 있다. 법에 대한 그의 의견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나는 법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법질서나 법과 원칙은 힘 있는 자, 돈 가진 자, 연줄 닿는 자들이 제멋대로 살기 위한 방편의 성격이 짙다. 나는 실정법의 구체적 내용에도 관심 없으며, 내 억울함을 법에 호소하고 싶지 않다. 그렇지만 법에 당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172쪽).” 요사이 국회의 어이없는 날치기 통과를 생각하면 그의 생각은 결코 과하지 않다. 이런 일은 ‘힘 있는 자, 돈 가진 자, 연줄 닿는 자’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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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레빌라 연애소동
미우라 시온 지음, 김주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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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달리는 ‘개인의 달리기’가 아니라 함께 달리는 ‘우리의 달리기’로 심장을 뜨겁게 두드리는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를 읽고서 단박에 미우라 시온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녀의 책들 중 내 흥미를 돋우는 『로맨스 소설의 7일』과 『월어』를 급히 사들였고, 이제 『고구레빌라 연애소동』과 인연이 닿아 무서운(?) 속도로 책장을 넘겼다. 이전에 읽은 책이 1부를 제외하고 대체로 재미있었지만 제법 두껍거니와 그 내용도 만만하지는 않았던 터라, ‘역시 이런 300쪽 내외의 일본 소설은 끝내주게 잘 읽힌다니까!’ 하고 가벼운 호흡으로 머릿속을 비워내자는 심산이었다.

『고구레빌라 연애소동』은 70대 주인 할아버지 고구레 씨의 낡은 목조 빌라를 중심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연애와 섹스를 담백하게 유머와 위트로 버무린다. 원제는 ‘고구레 빌라 이야기(物語, ものがたり)’로 소박하지만 번역본의 제목은 ‘연애 소동’으로 경쾌하고 ‘섹스’로 도발적인 유혹까지 한다. 사실 독자의 은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것이 터무니없는 과장만은 아니다. 일곱 편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주제어이기 때문이다.

‘고구레 빌라 이야기’에 주연 혹은 조연으로 출연하여 긴장시키기도 하고 이완시키기도 하면서 각각의 에피소드를 이끌어가는 인물들의 신상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고구레 빌라에 사는 101호 고구레 할아버지, 102호 여대생 미쓰코, 201호 외식업계 남성 직장인 간자키, 203호 꽃집 아가씨 마유, 그리고 한동네에 살면서 고구레 빌라의 지저분한 개에게서 눈길을 돌리지 못하는 애견 미용사 미네, 마유가 일하는 꽃집 겸 카페의 주인 부부, 마유의 전 애인인 사진작가 니미키와 수수께끼 같은 여인 니지코(음식 맛으로 거짓말과 불륜을 알아내는 이 여인을 평범의 범주에 넣기는 약간 무리가 따르지만)로 이보다 더 평범할 수 없다. 이토록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과 연애와 섹스 이야기가 얼마나 흥미로울까 싶지만, ‘알고 보면 다른 사람’의 속성을 떠올려야 한다.


고구레 할아버지는, 죽음과 인사하면서도 “우리 마누라가 나하고 섹스하기 싫대.”라고 투덜거리는 친구의 병문안을 다녀온 후 어떡하면 “이름만 들어보고 먹어보지 못한 요리” 같은 ‘섹스’를 할 수 있을까에 골몰한다(※「심신」). 마유는 삼 년 동안 바람결에도 소식 한 자락 전하지 않은 채 증발했다가 갑자기 돌아온 과거의 남자 니미키와 현재의 남자 아키오를 양옆에 끼고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Simply Heaven」). 회사에 있을 때는 멀쩡한 직장인인 간자키는 고구레 빌라로 돌아오기만 하면 102호 여대생의 복잡한 섹스뿐만 아니라 일거수일투족을 몰래 훔쳐보느라 여념이 없다(※「구멍」). 사춘기에 불임 판정을 받은 이후 밥 먹듯이 섹스를 해온 미쓰코는 오히려 간자키의 관음증을 반긴다(※「Piece」).


죄의식으로 이어지는 첫 섹스의 트라우마에 갇힌 미네는 출퇴근길 전철역의 나무 기둥에서 남근 모양으로 자라나는 정체불명의 하늘색 돌기에 집착한다(※「기둥에 난 돌기」). 아내는 흙탕물 맛으로 변한 남편의 커피를 의심하고 남편은 밤마다 아내가 잠들기를 기다려 외출한다(※「검은 음료수」). 니지코는 단지 정기적으로 장미꽃을 사러 들르는 꽃집 점원 마유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여전히 마유 주위를 서성이는 니미키를 자기 집으로 들이고, 니미키는 방세마저 거절하는 니지코가 방세 대신 섹스를 원하는 게 아닐까 고민한다(※「거짓말의 맛」).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은 지루하고 식상한 나날의 연속일 것 같지만 웬걸, 한 꺼풀 벗겨보니 괴상하기 짝이 없다. 그런 그들의 행동이 속속들이 소문나면 분명 동네 사람들의 언짢은 입방아에 오르내릴 만하다. 그러나 미우라 시온은 이쯤에서 또다시, 색안경을 끼고 부정적인 낙인을 찍어도 과하다 탓할 수만은 없는 그들의 행동에 대한 속사정을 풀어놓는다. 드디어 평범한 신상과 괴상한 탐닉 아래 감춰져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부모도, 아내도, 남편도, 연인도 이해하려들지조차 않은 그들의 투명한 속내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면 독자는 미우라 시온이 이끄는 대로 그들이 그럴 만했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누구에게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그들의 외로운 사정이 ‘섹스’로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너무나 담백하게 진행되는 것은 다소 헛헛하게 느껴진다. 그 덕분에 불편한 마음 없이 재미있게, 유쾌하게, 산뜻하게 책장을 넘기긴 했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섹스가 이처럼 가벼운 중량으로 이야기돼도 좋은지 찜찜했다. 미우라 시온의 표현대로 섹스는 ‘점막과 점막의 접촉’으로 서로의 체액을 나누는 일이다. 침이 더럽게 느껴지지 않는 순간은 사랑하는 연인과 키스를 할 때가 유일하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피붙이와도 공유하지 않는 일이다. 이것은 아무나와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내 입 밖으로 나온 침도, 내 몸 밖으로 나온 분비물도 불결하기 짝이 없는데 ‘사랑’이 빠지면 상대의 점막도, 체액도 불쾌하기 그지없는 것은 자명하다. 내 입 밖으로 나온 침을, 내 몸 밖으로 나온 분비물을 더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유일하다. 그래서 섹스는 사랑의 행위이고, 그 행위의 무게와 책임은 끝없이 무거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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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바 마을 이야기
베르나르도 아차가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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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읽어야 책으로 분류하여 서랍장 위에 쌓아둔 책 더미 사이에서 『오바바 마을 이야기』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낯선 이름을 가진 작가 베르나르도 아차가의 『오바바 마을 이야기』가 궁금했던 것은 ‘오바바’라는 상상의 공간을 둘러싼 연작소설이라는 점, 또 소수민족인 바스크족이 사용하는 ‘바스크어’라는 생소한 문자로 쓰였다는 점, 무엇보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 소설집 자체가 독서의 세 단계를 암시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문학에서는 상상의 장소를 공간적인 배경으로 삼는 일이 드물지 않으므로 특별히 매혹적인 장치로 내세우기가 다소 빈약할지 모르지만, 『오바바 마을 이야기』에서 ‘오바바’는 단지 인물들을 수식하는 배경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의 상징으로 생동한다. 『오바바 마을 이야기』는 모두 3부 26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외지인의 생경한 시선으로 오바바를 바라본다. 오바바에 대한 애정이 깃들지 않은 이방인의 눈길은 편견과 몰이해로 코팅된 색안경을 거친다. 그들에게 오바바는 거칠고 원시적이고 비상식적인, 그리하여 춥고 외롭고 위험한 오지 지역일 뿐이다. 그들은 오바바에 살고 있으면서도 오바바를 벗어날 기회만 노리면서 오바바를 이해하고 사랑할 기회조차 갖지 않으려 한다. 그래선지 1부에서는 좀처럼 소설에 몰입하기 힘들다. 아름다운 꽃노래도 한두 번이면 시들해지는데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그려졌으니 오죽할까. 이것은 아직 소설의 매력을 제대로 깨닫기 전에 낯선 시선으로 탐색하는 독서의 1단계와 마찬가지이다.

2부는 오바바 인근의 마을인 비야메디아나를 1부처럼 외지인의 시선으로 들여다보지만 1부와 달리 그 시선에는 호의적인 애정이 배어 있다. 황량하고 쓸쓸하고 공허한 첫인상은 점차 마을 곳곳에서 추운 겨울날을 견디는 사람들의 정겨운 수런거림으로 채워진다. 투박하고 무지하고 촌스럽지만 따스한 사람 냄새 나는 그들은 오만한 지식이 아니라 인생의 깊이와 세월의 연륜으로 다져진 지혜로 우정과 사랑과 질투와 연민과 자부심을 나눈다. 2부에는 ‘비야메디아나 마을을 기리는 아홉 마디의 말’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아주 흥미롭다. 베르나르도 아차가의 분신으로 짐작되는 ‘나’는 비야메디아나를 ‘기억’하는 데 “많지도 않게 적지도 않게 아홉 단어”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여기에 ‘논리’ 같은 것은 끼어들지 못한다고 서두를 뗀다. 그리고 그 아홉 단어를 포함한 아홉 가지 에피소드를 하나씩 이야기해 나간다. 아홉 단어는 ‘나’의 기억 속으로 여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티켓이나 다름없지만, 작가는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단어 아홉 개를 콕 짚어주지는 않는다. 에피소드 속에 보물찾기처럼 아홉 단어를 숨겨두었으니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 행간을 읽어내어 직접 찾아보라고 독자를 부추기는 듯하다. 작가와의 보물찾기를 하려면 독서의 2단계로 진입하여 소설에 좀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낯설기만 했던 이야기가 친밀해지기 시작하면 ‘공감’이라는 매혹적인 마법이 일어나 소설에 빠져들게 된다.

3부에서는 좀더 직접적으로 문학, 혹은 이야기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면서 독서의 3단계에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가르쳐준다. 친숙하지 않은 것(소설이든 무엇이든)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심을 풀고 애정과 이해와 공감으로 친밀해지고 난 다음 그 과정에서 새로이 알게 된 단편적인 진실들을 통합하여 그것의 본질에 투명하게 가닿는다. 3부는 마치 문학 강의라도 하듯이 오바바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와 친구, 그리고 오바바에 사는 몬테비데오의 아저씨를 등장시켜 ‘훌륭한 이야기’의 기준은 무엇인지, 표절이 문학적인 유산을 쌓아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떻게 바스크 문학의 빈약한 현실을 디디고 풍성한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안톤 체호프, 기 드 모파상, 이블린 워 등의 단편소설과 바스크 문학의 대가들을 예시하면서, 그리고 ‘나’와 친구와 아저씨가 썼다는(그러나 베르나르도 아차가가 의도적으로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썼음이 분명한) 짧은 작품들을 퍼즐처럼 제시하면서 이야기한다.

이쯤에서 ‘바스크 문학’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오바바 마을 이야기』는 번역본이라 작가나 책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고 ‘옮긴이의 말’도 미리 훑어보지 않는다면 이 소설이 ‘바스크어’라는 소수민족의 비주류 언어로 쓰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을 것이다. 어차피 바스크어라는 언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고, 설혹 그런 언어가 지구의 어디에선가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도 번역본으로밖에 읽을 수 없다면 무슨 언어로 쓰였던 그게 왜 중요하냐고 시큰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어는 민족의 얼과 정서와 정체성을 대변한다. 민족의 정신적인 유산이 오롯이 언어에 배어 있는 것이다. 한 언어에 어떤 표현이 유난히 풍요로운지, 어떤 단어가 눈에 띄게 반복적으로 사용되는지, 어떤 말이 무슨 말로 대체되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다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이해하는 데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될 것이다.

게다가 스페인 북부의 바스크 지방에서만 고립되어 쓰인다는 바스크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우리의 한글도 분명 소수 언어이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다룬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보면서 지금 내가 당연하게 쓰고 있는 이 글자가 얼마나 고귀한 뜻을 품고 뼈아픈 진통을 감내하며 탄생했는지 절감할수록 가슴이 어찌나 저릿저릿한지. 베르나르도 아차가는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언어(바스크어)로 쓰는 것을 배울 수 있는, 바스크어로 쓰인 책을 읽는 독서 습관을 형성할 만한 선례가 부족하기 때문에’ 바스크어로 문학 활동을 한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내 가슴을 두드렸다. 한글이 풍성해지고 우리 문학이 탄탄해지려면 이 고백의 의미를 끊임없이 떠올려야 할 것이다.

나는 독서의 3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 스물여섯 편의 이야기들이 여전히 연결 고리를 찾지 못한 채 조각조각 나뉘어져 단편적으로 머릿속을 배회한다. 다만 오바바에 도착하려면 탐스러운 눈이 흩날리는 것처럼 수많은 흰나비 떼들이 날아다니고 박하 향이 진동하는 나비 도로를 지나 울창한 숲속의 굽잇길을 127개나 지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베르나르도 아차가는 오바바의 본질에 다다르는 과정을 ‘마지막 단어’를 찾는 여정에 비유한다. 물론 그 단어도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도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고 의뭉을 떤다. 어쩌면 그 단어는 각자 자신이 찾아야 할 몫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독서의 3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미련도, ‘마지막 단어’에 대한 답답함도 한 켠에 밀쳐두게 만드는 도마뱀의 미스터리는 어찌할 것인가.

3부에서 ‘나’는 우연히 어린 시절의 오래된 단체 사진 속에서 이스마엘의 손에 쥐인 도마뱀을 발견한다. 그런 이스마엘 앞에는 가장 똑똑‘했던’ 알비노 마리아가 서 있다. ‘했던’이라고 과거형을 쓴 이유는 알비노 마리아가 어느 날 갑자기 가장 멍청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이 풀밭에서 함부로 잠자지 않도록 ‘도마뱀이 귓속으로 들어가 사람의 뇌를 파먹는다’고 겁준 엄마들의 지어낸 이야기가 어쩌면 알비노 마리아에게 실제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에 사로잡힌다. 이 의구심은 잔혹한 악동 이스마엘이 개과천선하여 도마뱀을 구조하는 환경보호운동가가 됐다는 것으로 어느 정도 풀리는 듯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핵심을 흐리게 만드는 장치일 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스마엘의 수상쩍은 도마뱀 임시 보호소에 갇힌 이후 ‘나’도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다. 도마뱀 이야기가 무엇을 암시하는지, 이스마엘과 도마뱀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나’의 변화로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하지만, 뭐랄까, 방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듯한 기분을 떨쳐버리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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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총사 1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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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도 알렉상드르 뒤마 (Alexandre Dumas)의 소설은 나이를 먹은 후에는 어쩐지 기피하게 되는 경우를 자주 접하게 된다. <삼총사>나 암굴왕으로 알려진 <몽테 크리스토 백작> 같은 경우만 봐도 어린이용 축약본이나 애니메이션을 통해 접해 버린 후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라고 은연중 생각해 버려 어른이 되어 관심을 끊는다. 결국 다르타냥(달타냥)이 삼총사중의 하나가 아닌 데다가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며 <삼총사>가 그저 단순하게 정의롭기만 한 모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야 자신이 어린이용 <삼총사>를 읽고 봤음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다시 <삼총사>에 대한 관심이 살아났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올 가을은 그야말로 <삼총사> 풍년이다. 국내에서 대형 뮤지컬로 공연이 되는가 하면 해외에서는 3D영화로 만들어지고 민음사에서는 영화 커버를 씌워 책을 재출간했다. 그리고 시공사에서 김석희의 번역으로 <삼총사>를 출간했다. 민음사판과 시공사판의 번역의 취향 문제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이번의 시공사판에는 모리스 르루아르의 삽화가 곁들여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삽화가 들어간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또한 외국 소설의 경우 역사적 사실이나 낯선 지명 때문에 곤란한 경우가 있는데 뒷부분의 자세한 각주는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클래시컬한 표지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지만 말이다.

다르타냥은 삼총사를 접하면서 가장 익숙한 이름이고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는 거의 주인공급 인물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삼총사 중 한사람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다르타냥이 삼총사(아토스, 아라미스, 포르토스)가 아니었음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왜 사총사가 아닌거지? 흔히들 같이 붙어 다니는 친한 세 명의 친구들을 삼총사라고 하지만 삼총사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소설의 원제이기도 한 <세명의 총사>를 일본에서 <삼총사>로 번역한 것이 그대로 굳어진 것이다. '총사'는 총신이 긴 머스킷 총(조총)을 사용하는 근위대(士)를 의미한다. 다시 삼총사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후에 다르타냥 역시 총사가 되긴 하지만 다르타냥에게 삼총사는 항상 동경과 존경의 대상이었고 항상 그들 속에 있고 싶어했지만 사총사가 될 수는 없었다. 결국 삼총사는 다르타냥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다르타냥이 보는 삼총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삼총사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르타냥은 물론 삼총사들도 정의롭고 위엄 가득한 모습보다는 자유롭고 불량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추기경 리슐리외와의 대결구도 역시 복잡한 권력투쟁의 모습이 얽혀 있어 흥미진진하다. 어린 시절 삼총사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독자라면 그 환상이 깨질 수는 있겠지만 또 다른 어른의 삼총사를 읽는 느낌이 들 것이다. 그 재미 또한 각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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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의 루브르
박제 지음 / 이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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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박제'라는 이름을 기억해 둔 것은 어디선가(아마도 출판 잡지 『기획회의』였을 것이다) 읽었던 그의 또 다른 책 『그림 정독』에 대한 출판 뒷이야기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가 얼마나 세밀하게, 섬세하게, 꼼꼼하게 그림을 읽어내는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화가가 화폭에 담은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디테일일지라도 무심히 간과하지 않고 그것이 그림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되찾아준다고 말이다. ‘정독’이라는 제목이 결코 부끄럽지 않다는 편집자의 진심 어린 자부심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림 정독』이 도대체 어떤 책인지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단 여섯 점의 명화를 이야기하는 데 무려 496쪽에 이르는 분량을 할애했다. 명화들에 대한 감각적인 감성 에세이나, 시대와 사조별로 되도록 많은 명화들을 보여주기 위해 얕게 훑어보는 예술서들이 흔했던 만큼 『그림 정독』은 특별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염두에만 두었을 뿐 아직 그 책을 읽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오후 네 시의 루브르』에서 ‘박제’라는 이름을 발견했을 때 반갑고 기뻤다. 그의 진가는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나리라. 먼저 그의 이력부터 살펴봤다.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것으로 독자의 기부터 꺾지 않는, 달랑 세 줄에 불과한 그의 소박한 이력이 마음에 든다. 프랑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미술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파리에 살면서 딸아이를 데리고, “오후 네 시만 되면 하루도 빠짐없이 같은 길을 산책한 칸트”처럼 루브르 박물관에 들른다는 사실을 서문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부당한 경로로 예술품을 입수한 과거의 오점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모두 44만여 점에 이르는 예술품을 소장하고 지금도 새로운 컬렉션을 수집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발굴․보수․복원에 힘쓰고 있으니 루브르 박물관은 가히 세계 최고의 보고(寶庫)라 할 만하다.

짧은 일정의 프랑스 여행으로는 루브르 박물관의 먼지조차 다 돌아볼 수 없다고 했던가. 박제는 분명 루브르 박물관을 무수히 들락거렸을 테지만 루브르 박물관이 전시하고 있는 방대한 그림들을 욕심껏 일별하고 말기보다, 이 책에는 그의 영혼을 울리고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감동의 눈물을 쏟게 한 명화들을 초상화, 풍속화, 풍경화, 누드화를 포함하여 에로티시즘이 강렬하게 배어 있는 그림, 성화(聖畵)로 분류하여 소개한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부터 생경한 화가의 낯선 그림까지 44만여 점 가운데 그가 직접 보고 읽고 느낀 그림들 중에서도 단지 67점만을 고르고 또 골랐으니 『오후 네 시의 루브르』를 펼치는 일은 큐레이터 박제가 친절하고 성실하게 작품을 설명해 주는 작은 루브르에 들르는 일이나 다를 바 없다.

박제의 꼼꼼한 성실성은 과히 놀랍다. 그는 역시 이 책에서도 그림에 그려져 있다면 여린 풀포기 하나, 작은 돌멩이 하나, 모자를 장식하는 깃털, 그리고 그것들의 색채와 그림자, 붓질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설명해 주는데, 실망스럽게도 조악한 품질로 인쇄된 이 책으로는 그의 디테일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그가 이 책에 실린 그림들을 모두 원화로 직접 마주했으리라는 것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박제 특유의 성실한 정독과 사유와 통찰로 가슴 벅차게 느꼈을 감동을 온전히 공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면서 심히 절망스러워진다. 심지어 극심한 질투심에 사로잡히기까지 한다. 허나 내가 루브르 박물관 바로 앞에 산다 한들 그림을 정독하는 그의 섬세한 눈과 깊이 사유하는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가질 수 있을까? 이렇게 그를 만난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이제 『그림 정독』을 당장 만날 때이다. 그에게 그림 읽는 법을, 그리하여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보련다. 그것이 어설픈 흉내에 그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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