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와 아메리카인 김영사 모던&클래식
존 스타인벡 지음, 안정효 옮김 / 김영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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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인터넷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말 중에 천조국이라는 것이 있다. 원래 의미대로라면 제후의 나라가 천자(天子)의 나라를 가리켜 부르는 말이었겠지만 인터넷상에서의 천조국은 미국을 말한다. 국방 예산이 천조가 넘는다―실제 천조가 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엄청난 금액이다―는 것을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이다. 얼핏 세계 경찰국가임을 자임해 왔던 미국을 바라보는 시선 중 하나이겠지만 다른 것에서도 미국, 아메리카에 대한 세계의 동경―현재는 많이 줄어든 것 같지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최대의 다민족, 다문화 국가이자 세계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미국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는 바로 미국 그 자체이다. 아름다운 나라가 아닌 아메리카 합중국인 미국이 만들어지면서 흘린 피의 역사를 아는 것, 즉 미국의 과거를 이해해야만 미국의 현재 모습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 조드의 삶은 그 형태만 바뀐 채로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미래에도 일어날 수 있는 약속의 땅 아메리카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메리카와 아메리카인』은 과거 아메리카의 역사로 현재를 알 수 있으며, 또한 아메리카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록 이 책이 50여년전에 쓰여졌을지라도 현재의 미국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책의 첫 장 ‘E Pluribus Unum(여럿에서 하나)’는 아메리카의 모습을 가장 명확하게 알려준다.

“아메리카는 그냥 생겨나지 않았다. 400년에 걸친 고된 노동과, 피 흘림과, 외로움과, 공포가 이 땅을 창조했다. 우리들은 아메리카를 생산해 냈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들은 온갖 인종에 뿌리를 박고, 온갖 피부 빛깔로 얼룩지고, 겉으로 보기에는 인종상의 무정부 상태를 이루는 새로운 종족 아메리카인으로 태어났다. () ‘여럿에서 하나’라는 새로운 사회를 이룩했다.”


아메리카의 역사는 투쟁과 피의 역사다. 토착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피를 흘렸고, 연합체의 국가가 만들어진 이후에는 남과 북이 흘린 피 위에 세워진 것이 아메리카다. 현재의 모습이라고 다를까. 인종에 상관없이 총을 든 아메리카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지고 진행되는 역사 속에서 아메리카인들은 서로 힘을 모으면서도 경계하고, 평등을 외치지만 어떤 민족보다도 차별이 심하고 넘치는 풍요 속에서도 빈곤은 극심하다. 존 스타인벡은 아메리카를 이야기하지만 여기에 우리나라를 대입해 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피의 역사, 불평등, 차별. 과거의 아메리카나 현재의 아메리카나 현재의 한국이나 본질적인 모습이 다를 것이 무얼까. 작가는 여전히 사람들 속에서 희망을 찾는다. 서로에게 피를 흘리고 실수를 할지라도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사람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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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 - 원시의 자유를 찾아 떠난 7년간의 기록
제이 그리피스 지음, 전소영 옮김 / 알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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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라는 것에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에 묶여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좀더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평범한 사람의 여행과 여행자의 여행이다. 평범한 사람의 여행은 우리에게 친근한 그것이다. 삶에 쫓기다가 겨우 며칠 동안의 휴가를 얻어 지친 육신과 마음을 쉬려고 계획하는 것, 그래서 결국 유명하거나 경치 좋은 곳이거나 가끔은 꼭 가보고 싶던 곳을 찾아 열심히 사진 찍고 먹고 돌아오게 되는 것이 어쩌면 우리들의 평범한 여행이다. 여행자의 여행은 조금 더 원시적이다. 때로는 충동적이거나 오지 같은 사람들이 전혀 찾지 않을 곳을 향하기도 한다. 그저 세계를 방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여행자의 여행일지도 모르겠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것은 여행의 좋고 나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여행을 떠난다고 해도 무언가 볼만한 것들을 찾을 것이고 맛있는 것을 찾을 것이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고 지친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여행을 떠날 테니까. 여행자의 여행은 그 자체가 삶이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삶을 이어가는 것이고 그 기록은 여행자의 삶이 녹아 있는 직접적이면서 호소력 짙은 목소리이기도 하다. 제이 그리피스의 『땅, 물, 불, 바람과 얼음의 여행자』 역시 단순한 여행기라기보다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유나 통찰에 대한 담론에 가깝다.

제이 그리피스는 원시의 자유를 찾아 지도 바깥으로 모험을 떠난다는 책 소개는 저자를 돋보이게 할 수는 있지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지도의 여백에 탐닉한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지도에도 제대로 드러나 있지 않은 원시의 자연―땅, 얼음, 물, 불, 공기, 정신―을 방랑하며 인간의 정신을 탐색하고 그런 인간이 자연에 저지를 파괴의 현장을 증언한다. 제이 그리피스는 “인간의 영혼은 야생성이 가장 뚜렷하게 구현된 형태”라고 말한다. 자연에 순응하고 더불어 사는 인간―원시부족 등―은 자연의 일부로 인정하지만 지식(종교)을 가진 인간에 대한 분노는 날카롭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자연에 맞서려는 인간은 자연을 황무지(도시)로 바꾸는 야만적인 존재일 뿐이라 고발한다.

현대의 삶 속에서 제이 그리피스의 책은 이상론(理想論)에 가깝다. 머리로는 그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지만 몸은 그럴 수가 없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을 훼손하며 문명에 매인 채 살아왔고 살아갈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서 어떻게 아마존의 삶을 강요할 수 있을까. 문명의 지식이 원시 자연의 삶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처럼 반대도 마찬가지가 되어버린 테두리 속의 삶이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전원의 삶을 꿈꿀 뿐이고 이것도 원시의 삶과는 거리가 있다. 지식과 종교에 의해 야생성을 거세당해 클로로포름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그곳의 통조림 같은 삶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자연을 파괴해 조금 더 안락한 삶을 누리려는 인간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야생성은 어쩌면 머릿속밖에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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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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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무심코 엄마 손을 내려다봤다. 코끝이 시큰하게도 내가 알던 손이 아니었다. 내가 어른으로 성장한 시간만큼 엄마 손에는 거역할 수 없는 세월이 불시에 내려앉은 것 같았다. 내가 철없이 깨닫지 못한 그 세월이 훌쩍 지나도록 가중된 노동의 고된 흔적도 오롯이 아로새겨졌다. 엄마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면 손을 감추느라 여념이 없다. 거무튀튀하게 그을고 까칠까칠하게 메마르고 손마디마다 옹이가 져서 뒤틀린 손이 남부끄럽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손은 가족을 먹이고 씻기고 입히느라,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지으며 집안을 일으키느라, 두 어머니를 모시고 한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느라 안 해본 일이 없다. 얼굴에 짙게 팬 주름은 화장으로 옅어지게 위장할 수 있지만, 손에 새겨진 삶의 이력은 감출 수 없다. 자기 손이 그토록 거칠고 앙상해지는 줄도 모른 채 엄마가 고단하게 감당해 온 생을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얼굴이 미처 다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드러내는 손은, 그래서 슬프고 가엾고 마음의 뿌리까지 뒤흔든다.

『16인의 반란자들』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을 사비 아옌이 인터뷰하고 킴 만레사가 그 장면을 흑백사진으로 남긴 책이다. 이 책이 훌륭한 점은 사비 아옌의 인터뷰가 공식적, 형식적, 의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작가의 생활에 밀착하여 작가가 한 개인으로 머무는 공간에서 작가의 일상을 뒤따르며 인간적인 면모는 물론 작가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어떻게 문학적인 배경을 형성했는지, 작가가 자기 문학을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무엇인지, 작가의 문학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인터뷰집의 한계 내에서 충실하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 책이 감동적일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손을 담아낸 킴 만레사의 흑백사진 덕분이다. 작가의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포착한 양질의 사진들 중에서도 손 사진은 유난히 마음을 울린다.

작가들마다 특유의 무의식적인 손짓이 그 순간 영원히 멈춘 듯 흑백사진의 어두운 배경 속에서 어렴풋하게 떠올라 망막에 또렷하게 각인된다. 그 손은 반지를 끼고 있기도 하고, 술잔을 들기도 하고, 담배를 쥐기도 하고, 깍지를 끼기도 하고, 얼굴을 쓰다듬기도 하고, 기도하기도 하고, 주름으로 자글하기도 하고, 푸르스름한 정맥이 드러나 있기도 하고, 까만 털북숭이이기도 하다. 어쩌면 별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손일지 모른다. 하지만 엄마 손처럼 작가들도 그 손으로 마침내 자기 문학을 언어로 형상화했을 것이다. 문학의 자양분이 되어준 인생의 모든 일도 그 손으로 기꺼이 겪어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손을 들여다본다고 용한 점쟁이처럼 손 임자의 다사다난한 삶을 단번에 읊어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어떤 손 앞에서 마음이 절로 울리는 경험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리라. 손에는 낙인처럼 지울 수 없는 인생 편력이 올올이 새겨져 있다. 손은 그 삶의 지문을 감추지 못한다.


열여섯 작가들의 손끝에서는 삶의 신념이 거침없이 흘러나온다. 한때 작가 지망생으로 단편 몇 편을 끼적거리곤 했다. 그동안 읽고 보고 들었던 소설, TV 드라마, 자극적인 스캔들의 그림자가 구태의연한 신파로 드리워진.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여기서 한 문장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은 절실하게 쓰고 싶은 이야기가 나에게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전하고 싶어 하는지 자각하고 있었다. 그 방법으로 문학을 선택한 그들은 어떤 형태의 이야기에 담아야 할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이야기가 세상을 변화시키길 기대했다. 그들을 위대한 작가라고 칭송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존재에 미치는 영향력이 문학의 가장 강력한 힘이다. 문학을 읽는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작가의 충만한 재능이나 기발한 상상력, 화려한 기교에 기대지 않는다. 존재를 울리고 흔들어 변화시키는 것은 문학이 담고 있는 진실, 즉 작가의 진심이다.


작품만 문학적으로 빼어나다면 작가의 삶과 이력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훌륭한 글을 썼다고 그 글을 쓴 사람의 인격까지 훌륭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일례로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나라 신문학과 근대문학을 배우면서 몇몇 작가들의 파렴치한 친일 이력에 대해서는 일말의 비판도 품지 못한 채 그들이 이룩했다는 문학적 성과를 주입받았다. 그러나 작가의 진심이 '약'이 아니라 '독'으로 스며 있는 작품은 아무리 그럴듯한 당의를 입혀놓아도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행간에 스민 작가의 진심이 약인지 독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기서 '실천'이 중요한 잣대가 된다. 자기 신념을 말이나 글로만 떠벌리는지, 행동으로도 실천하는지는 작가가 이제껏 걸어온 인생을 들여다보면 자명해진다. 『16인의 반란자들』의 열여섯 작가들이 크고 대단한 사람으로 다가온 것은 노벨문학상의 세속적인 권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책장을 뛰쳐나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끊임없이 맞서는 실천가였기 때문이다. 세상이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세상에 반하는 용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에 길들여지고 안주하여 제자리걸음으로 고꾸라지고 있을 때도 세상의 거짓 논리와 불합리한 이면에 반기를 들어 목청껏 일깨우고 격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느릿느릿하게라도 나아진다고 믿는다. 우리를 현혹하고 기만하는 목소리를 걷어내고 진실된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애쓰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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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eee 사랑하고 싶다
타오 린 지음, 윤미연 옮김 / 푸른숲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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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 린의 『Eeeee 사랑하고 싶다』는 오랜만에 나를 당황시킨 소설이다. 무기력한 청춘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찬 파괴적인 망상은 고작 200여 쪽에 불과한 소설 한 편을 오래도 끌게 했다. 이럴 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소설과 진득하게 놀아주기’ 신공뿐이다. “아무리 괴상망측하고 이해 불가능해 보여도 상대의 세계에 들어가 재미있게 즐길 것”을 다짐하고 나니 내 머릿속에서 ‘공감 불능’ 주의보가 조금은 해제되는 듯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도미노 피자 배달원으로 일하는 앤드류의 나날은 따분하고 우울하기만 하다. 그가 별 볼일 없는 자신의 청춘을 탈출시키는 방법은 틈나는 대로 날리는 썩소, 옛 여자친구 새러를 추억하는 일, 말로는 수십 번도 더 밴드를 결성한 입버릇뿐이다. 당연히 최저임금을 받기 위해 피자 박스나 접어대는 현실은 그런 것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미 절망과 무기력증과 권태에 짓눌린 앤드류가 현실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을 향해 욱하여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걸리는 대로 두들겨 패고, 나 자신도 죽여가며 광란의 살인극을 한 판 푸지게 벌이는 상상을 할 수 있을 뿐. 그런데 무턱대고 치솟는 자조적인 망념이 낯설지만은 않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깨달은 삶의 방법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머릿속을 터뜨리는 생각을 멈추고 무슨 행동이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내 앞에 떨어진 현실이 아무리 버겁고 남루해도 어떻게든 안간힘을 다해 행동을 시작해야 한다. 행동 없는 생각만으로는 현실의 먼지 한 톨 흩어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진리를 그때는 몰랐다.


돌이켜보면 좀더 어렸을 때는, 꿈은 더없이 찬란하게 반짝거리는데 현실은 끝없이 비루하고 너절해 보여서 내 머릿속은 현실을 뛰어넘어 꿈에 가닿기 위해 온갖 관념과 이상들로 부풀어 올라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렇다 한들 행동이 없는 꿈과 현실의 간극이 고스란하니 절망스러워지고, 그 절망이 깊어지면 무기력증이 엄습하고, 끝내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도록 권태의 무게가 가중된다. 사지가 권태에 꽁꽁 묶인 채 머릿속으로 번잡하게 오가는 생각들이 헝클어진 털실 뭉치처럼 얽히고설키면, 뭔가에 스치기만 해도 눈물이 툭 비어져 나오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미친 듯이 화내게 된다. 세상을 향해, 자신을 향해 맥락 없는 야유와 조소와 욕설을 퍼붓는 것이다. 거기에 이성적인 이유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그냥 모든 게 화나는 것이다.


앤드류는 이미 이 단계도 뛰어넘었다. 이제 그는 자기 처지라고는 믿고 싶지 않을 만큼 꿈과 멀어진 현실에서 자신을 유리시킨다. 실제 현실이 어떠하든 자기와 무관하다는 양 무의미한 인생에 대해 농담하고 미래까지 낭비하며 그런 일들로 자신이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일 따위는 없다고 쿨한 척한다. 어차피 한 인간의 삶이란 게 무가치하고 보잘것없으니까. 진정성 같은 것은 아무래도 소용없으니까. 아무리 작가가 되고 싶었어도 앤드류는 도미노 피자 배달원으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죽이고 있으니까. 작가가 되고 싶었던 꿈은 그의 옹색한 현실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그는 자기 꿈에 대해서도 별다르지 않은 태도를 취한다. 유독 ‘줌파 라히리’가 끊임없이 언급되는데, 타오 린은 왜 그녀를 콕 집었을까? 사실 이 소설 자체에 완벽하게 집중하지 못했던 것은 앤드류의 단조로운 하루에 예고 없이 시시때때로 끼어드는 염세적인 몽상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데 한눈을 팔았기 때문일 수 있다.


어린 시절 침실에서 기타와 드럼 반주에 가사를 붙인 슬픈 노래를 인터넷에 올렸어야 했다. 노래 제목은 ‘줌파 라히리’로 붙이고. 그녀가 받은 퓰리처상은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면서 차에 부딪혀 박살이 났다. (28p)


 

"줌파 라히리는 대왕고래나 뭐 그런 걸 죽이고 싶게 만들어. () 그 여자 이름은 꼭 총기 난사극 같은 느낌이야.”
“우리가 그 여자를 쏴 죽이자.” 스티브가 말한다. “쥐도 새도 모르게.”
“그 여자는 퓰리처상을 받고 다이아몬드 보트에 살고 있다지. 아마.” (55p)

 

쇠파이프를 들고 TV에 나온 스티브 : 난 저년을 죽일 거야.
기자들 :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스티브 : 줌파 라히리 (65p)

 

줌파 라히리가 그를 사랑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까? 딱 잘라 거절할까? 줌파 라히리는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크루즈에서 산다. 그녀가 받은 퓰리처상이 그녀를 두려워한다. (74p)

줌파 라히리, <뉴요커>지. 줌파 라히리의 소설 중에 <섹시>라는 작품이 있다. 섹시. 새러는 섹시하다. 섹시하게 웃는 새러. (76p)

 

등등.

 

“줌파 라히리의 얼굴에 생식기 그려 넣던 새러”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기고 미래가 없어진 앤드류 같은 청춘들은 <나는 내가 싫다>라는 노래를 듣고, 차창 밖으로 “이 개새끼들아!”라고 고함치며 세상을 엿 먹이고, “어떻게 해야 즐겁니?”를 공허하게 내뱉는다. 청춘은 어찌어찌 그 시절을 통과하여 뒤돌아볼 때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그러나 그 시절의 한가운데에서는 청춘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해 버릴 것만 같다. 그 시절을 호되게 앓으면서 숨이 턱에 닿도록 운동장을 돌고 또 돌던 친구는 이제 편안해 보인다. ‘그때는 그렇게도 절실했니? 미래 따위는 오지 않을 것처럼 자신을 학대할 만큼’이라는 물음에도 빙긋 웃을 여유를 찾은 걸 보면 말이다. 『Eeeee 사랑하고 싶다』는 하고 싶은 열망만큼 할 수 없다는 한계가 고압적으로 다가오는, 그리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에서 더더욱 무기력해지는 청춘의 호된 신고식을 아직도 치르고 있는 사람이 부르짖는 영혼의 소리로 가득 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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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아날로그 책공간 - 오래된 책마을, 동화마을, 서점, 도서관을 찾아서
백창화.김병록 지음 / 이야기나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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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창화는 3천여 권의 책으로 처음 어린이 도서관을 열었다. “모두가 감동하면서 책을 함께 읽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그동안 애지중지 소장했던 책들을 남에게 공개하기로 했다.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지만, 무심한 사람들은 “(도서관이라면서) 책이 이거밖에 없어요?”라고 그녀의 포부에 돌멩이를 던졌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분통을 터뜨렸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집에 책이 많으면 좀 내놓으시지. () 그 많은 책을 혼자 싸안고 있는 걸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백창화의 분노는 나를 겨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가 당신의 책을 내놓으라고 종용한 것은 아니잖아요? 지레 뜨끔하여 미약하게 항의해 보지만 그런 나 자신이 구차스럽기만 하다. 그녀의 도서관이 타의가 아니라 순전히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었다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책을 남과도 나누고 싶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된다. 어떤 물욕이든 마찬가지이겠지만, 내가 집착하는 것은 단 하나도 내주고 싶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나의 경우에는 그것이 책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빠듯한 예산 내에서 마음속으로 열두 번도 더 찜한 이후 겨우 구매 목록에 올려 내 품으로 들인 책이다. 옷도, 가방도, 신발도, 화장품도 모두 포기하고 때론 식욕까지 억제하며 사들인 책인지라 그에 대한 집착은 도저히 내려놓을 길이 없다. 책장에 다 꽂히지 못한 채 집 안 구석구석 쌓여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그 책을 남의 손에 들릴 수 없다. 책에 대한 애정이 그녀가 나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책에 대한 소유욕을 과감히 밀쳐두다니 그녀가 놀랍고 대단하게 여겨진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은 자기 책을 선뜻 내놓지 않는다고 억울해하거나 자기 책을 혼자 독점하는 짓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비난할 자격이 그녀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단지 책을 사랑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유럽의 아날로그 책공간』은 이제 도서관을 넘어 책마을을 꿈꾸는 백창화, 김병록 부부가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영국의 도서관, 서점, 동화마을, 책마을을 돌아보면서 책마저도 디지털화되어가는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일깨운다. 자발적인 의지로 사재를 털어 책과 사람이 더불어 행복한 공간인 도서관을 꾸린 열정은 유럽의 책공간을 여행하는 동안에도 숙을 줄 모른다. 오히려 유럽과 비교될수록 백창화는 한국이 처한 아날로그 책 문화의 위기가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른다.


장서 수보다 칸막이 좌석 수를 자랑하는 도서관의 열악한 환경, 인터넷의 발달과 거대 자본의 독식으로 사라진 동네의 작은 서점들, 그리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 이런 문제들은 사실 어제오늘 제기된 담론이 아니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이를 경계하지 않고 낯선 이가 불편하지 않은 공간에서 책을 통해 따뜻한 이웃과 아름다운 삶을 나누길’ 열렬하게 꿈꾸는 그녀의 진심과 맞닥뜨리고 나면 그 간절함에 함께 조바심치게 된다.


유럽도 종이책이 근간을 이루는 전통과 문화의 몰락을 근심하고 있지만, 그녀가 느끼기에 유럽은 여전히 책의 천국이다. 유럽에는 아직도 책 읽는 전통이 살아 있고, 유서 깊은 도서관이 건재하며 새로운 도서관도 조성되고, 도시의 골목마다 작은 서점들이 반기고, 그들이 대대로 사랑한 동화와 작가들의 흔적을 마을 단위로 보존하고 계승한다. 게다가 책이 예술과 문화가 집중되어 있는 도시가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자리 잡으면서 쇠락한 농촌까지 되살리는 책마을이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다.


백창화는 사람들이 점점 책을 읽지 않는 이유를 ‘결핍’에서 찾는다. 여가를 보낼 만한 거리가 책 이외에 달리 없었던 시절과 달리 TV, 컴퓨터, 인터넷, 게임기, 스마트폰 등이 책을 대체하고 있는 현실만 탓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욕망하는 법이다. 그런데 요즘은 책이 넘쳐나다 못해 발에 채는 세상이다. 책은 더 이상 사람들의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지금 내가 이렇게 책에 집착하는 것은 나도 그 목마름을 알기 때문이다. 서점이라곤 구경도 못해 본 어린 시절, 책 읽고 싶은 갈증을 해소해 줄 만큼 책이 충분했던 적이 없었다. 처음 책에 대해 흥미를 느낀 것도 내가 가지지 못한 책을 가진 친구를 질투했기 때문이다. 다 읽기나 할지 장담하지 못할 만큼 책을 바리바리 싸안고 있는 것은 그 시절의 결핍이 아직도 나에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또한 결핍은 그리움을 낳는 법이다. 내가 풍족하게 가지지 못한 것은 그만큼 소중해지고, 그것과 관련된 기억은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져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리워진다.


백창화는 풍요롭다 못해 낭비되는 물질의 세례 속에 살아가는 21세기 아이들에게 ‘결핍 없이도’ 책을 읽히려면 ‘책이 있는 추억’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가 아이들이 책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할 수 있도록 책과 함께 뛰노는 책마을을 꿈꾸는 이유이다. 또한 이것이 유럽의 책공간을 탐방하면서 그녀가 찾은 대안이다. 유럽의 모든 책마을이 성공적인 것도 아닐뿐더러 그녀가 앞으로 극복해야 할 현실적인 여건들이 녹록지 않지만 그녀는 끝내 희망을 부여잡는다. 그녀의 용감한 첫 행보가 행복한 책마을의 건강한 초석이 되길 바란다.

책과, 책이 있는 공간과, 책을 읽는 사람에 대한 백창화의 열렬한 애정에 절로 전염되지만, 『유럽의 아날로그 책공간』이 ‘책공간’이라는 전문적인 주제에 좀더 집요하게 접근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프롤로그」 중 「그렇게나 먼 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으려 하나」라는 제목 아래에는 ‘무엇’에 대한 언급 없이 여행 코스를 선택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닥친 어려움과, 그 여행에 동행해 준 사람들에 대한 소개와 감사의 표시, 그리고 배낭여행의 팁 등만 풀어놓았다. 본문 속에서도 이 책의 주제와 별 상관없이 여행 중 겪은 우여곡절에 대한 소회가 길게 이어지곤 했는데, ‘책공간’ 자체에 집중했던 나에게는 그 내용이 읽기의 흐름을 방해했다. 유럽의 책공간을 찾아 떠난 여행의 모든 것을 담으려 했던 저자의 욕심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마지막으로 ‘다이제스트 세계 명작’에 대한 실망을 토로하면서 “심지어 다섯 권인”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대해서도 성토하는데, 그녀는 알까? 알렉상드르 뒤마가 “그의 문하생들에게 작품의 일부를 나눠 쓰게 했다(『한 권의 책』(최성일), 136쪽)”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나의 놀라움과 배신감도 다르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완역본을 옹호하긴 하지만, 어린 시절에 읽은 ‘다이제스트’의 흥분과 감동이 완역본에서 고스란히 재현되지는 않는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로 인해 내가 걸작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내 유년은 그것으로도 충분히 풍족했으니. 더구나 ‘세계 명작’이라는 이유로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일찍 읽고서 더는 읽지 않아도 된다는 자만에 빠진 걸작이 얼마나 많던가. 이번 기회에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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