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 하이웨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31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소설가 모리미 도미히코를 좋아하는 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판타지를 거침없이 끌어들여 현실에서도 이질감 없이 가능해지도록 뻔뻔하게 펼쳐 보이는 그의 천연덕스러움 때문이었다. 도무지 언제 어느 곳 어디쯤에서 뚱딴지같은 판타지가 불쑥 튀어나올지 종잡을 수 없는 예측 불허의 전개 방식도 그를 특별히 아끼는 데 한몫했다. 모리미 도미히코는 머릿속에 어른의 계산법은 통용되지 않는 어린아이의 즉각적인 순수한 세계를 아직도 간직한 사람 같았다.

그러니까 책 읽은 감상을 지극히 개인적으로 남기는데도 이리저리 궁리하고 앞뒤를 재어보며 잔머리를 굴리는 나와는 달리, 그는 자기 이야기가 남에게 어떻게 비춰질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자신도 자기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모른 채 머릿속에 제멋대로 떠오르는 대로 손끝에서 단어가, 문장이,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뭔가 심오한 의미를 간직한 척하는 허세를 부리지 않아 그의 이야기들은 유쾌하게 즐기면서 마음껏 사랑스러워하기에 그만이다.

『펭귄 하이웨이』는 다른 소설들에 비해 좀더 머뭇거리면서 어른의 생각이라는 것을 시도한 듯하다. 여전히 모리미 도미히코 최강의 매력인 귀엽고 엉뚱하고 아기자기한 장면들이 넘쳐나지만 말이다. 세계의 끝, 세계의 종말, 혹은 캄브리아기의 바다, 태초의 바다, 세계의 시작, 혹은 미지의 세계라는 거대하고 심오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려니 이전처럼 천진난만한 자세만을 고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먼저 주제를 떠올리고 그 주제를 형상화할 이야기를 구상한 후 자신의 매력적인 개성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맹랑한 ‘초등학생’ 아오야마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열한 살인 아오야마는 “나는 초등학교 4학년밖에 안 됐지만 벌써 어른에 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하루하루 세계에 대해 배워 나가면 나는 어제보다 조금씩 훌륭해진다. 어른이 되는 날이 왔을 때 내가 얼마나 훌륭해져 있을지는 짐작도 못 하겠다”고 진지하게 정색하는 꼬마 녀석이다. 같은 반에서 가장 힘세고 싸움 잘하는 친구의 권력 구도와 속성을 연구하는가 하면, 자신이 살고 있는 소도시의 곳곳을 탐험하여 지도를 그리기도 한다. 게다가 아오야마는 사소하고 잡다한 연구부터 우주, 혹은 세계의 끝과 시작이라는 거대하고 심오한 연구까지 갖가지 연구들을 진행하면서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고 노트에 꼼꼼히 기록하는 메모의 달인이다. 아오야마는 이 메모 습관이 어른만큼, 제 또래의 대다수 아이들보다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아오야마가 날마다 하나씩 배우는 만큼 훌륭해질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장담하는 바람에 아무리 애어른처럼 생각하고 행동해도 역시 아이구나 싶었다. 하나를 배우면 하나는 잊어가게 마련인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어제 알게 된 것들을 모두 내일까지 가져가지 못하게 하는 기억력의 한계는 모든 사람들을 ‘날마다 조금씩 훌륭해지도록’ 놓아두지 않는다. 그래서 어른이 된 내가 시간이 흘러 성인의 육체를 가지게 된 데 반해 여전히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해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해서 앙앙 우는 아이처럼 철없고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옹졸한가 보다고 말하면 그건 민망한 변명에 불과할까? 아오야마처럼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열심히 메모했더라면 ‘짐작도 못할 만큼 훌륭한 어른’이 됐을까? 어제 읽은 책도 가물가물한데…….

아무튼 그런 아오야마가 열중하는 연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치과 간호사 누나이다. 열한 살배기 아이 주제에 아오야마는 누나의 봉긋한 가슴에 열중한다. 그런데 아오야마는 소위 야동에 침을 꿀꺽 삼키는 성인 남자들과 달리 여자의 가슴을 엉큼하지 않게 순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의 진수를 보여준다. 엄마 가슴이나 누나 가슴이나 봉긋하기는 다를 바가 없는데 왜 누나 가슴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바라보게 되는지, 왜 언덕만 바라봐도 자동적으로 누나 가슴을 떠올리게 되는지 수수께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오야마가 해결해야 할 수수께끼는 누나 가슴뿐만이 아니다. 남극도 아닌 일본의 소도시에 난데없이 출현했다가 증발해 버린 펭귄들, 좁은 수로와 강에 출몰하는 흰긴수염고래같이 생긴 재버워크들, 재버워크의 숲속 초원에 자리 잡은 ‘바다’는 현실 세계의 아오야마에게는 비상식적이고 비현실적인 미지의 존재들이다. 그리고 『펭귄 하이웨이』의 그 모든 수수께끼는 누나를 향한다. 아오야마의 풋풋한 첫사랑으로 지극히 현실적인 존재였던 치과 간호사 누나는 아오야마가 수수께끼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점차 현실성을 잃어가다가 급기야 펭귄, 재버워크, ‘바다’처럼 신비로운 미지의 존재로, 가장 비현실적인 존재로 변한다.

콜라 캔을 던져서 펭귄을 불러내고(콜라 캔이 허공에서 펭귄으로 변신한다니 모리미 도미히코다운 발상이라고 한참 웃었다. 특히 가장 압권인 것은 누나가 초록색 우산을 돌리자 그 우산 위로 꽃과 식물들이 앞다퉈 피어나고 자라나다가 열매들에 날개가 돋아 펭귄으로 변신하는 장면이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환상적인 장면이라 모두 인용하고 싶지만 무려 세 페이지나 할애되어 있으므로 124~126쪽이라는 것만 표시해 둔다), 꿈속에서 재버워크를 만들어내고, ‘바다’의 크기에 따라 건강 상태가 달라진다면, 누나는 더 이상 ‘인간도, 지구인도(365쪽)’ 아니다. 그렇다면 누나는 외계인? 그러나 모리미 도미히코는 누나의 정체에 대해 궁금증만 가득 부풀린 채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미지의 존재로 남겨두었다. 누나를 무엇으로 생각하든 그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여겨도 될까?

누나가 태어난 곳은 ‘바다’이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SF 소설 『솔라리스』의 바다와 닮아 있지만(『솔라리스』에서 ‘바다’를 착상했음을 “스타니스와프 증후군(23쪽)”이라는 깜찍하고도 끔찍한 병으로 드러낸다), 이 ‘바다’는 캄브리아기의 바다, 즉 태초의 바다로 자기 영역을 확대하여 자신이 집어삼키는 모든 세계를 무로 되돌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사실 『펭귄 하이웨이』를 일본SF대상을 받았다고 해서 ‘SF’로 한정 짓고 싶지 않은 만큼 아오야마의 ‘성장’에도 방점을 찍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매번 미지의 세계를 만나 지금껏 나를 이루었던 세계를 끝내고 앞으로 나를 이루어갈 새로운 세계를 시작하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특히 열한 살 아오야마에게는 아직 세상은 온통 미지의 세계일 것이다.


덧붙임
1. “우리 세계에 있을 수 없는 것, 존재하면 안 되는 것, 하느님이 만들다가 실패한 곳, 세계의 찢어진 균열, 망가진 구멍” 같은 것으로 ‘바다’의 정체를 결론짓는 것은 ‘바다’를 너무나 일차원적인 역할로 단순화하는 것 같다.

2. 모리미 도미히코는 『펭귄 하이웨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펭귄 하이웨이』는 쉽게 말하면, 교외 주택가를 무대로 미지와의 조우를 그린 소설입니다. 스타니스와프 렘의 SF 소설 『솔라리스』를 무척 좋아해서, 이 소설이 아름답게 건축했던 것처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경계선을 그려보려 했습니다. 교외에 사는 소년이 온 힘을 다해 세계의 끝에 도달하려는 이야기입니다. 어렸을 때 생각했던 근원적 의문과 욕망, 그리고 꿈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쏟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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