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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 ㅣ 세계문학의 숲 4
바진 지음, 김하림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지식인은 아는 만큼 바꿀 수 없을 때 무기력한 고통으로 몸부림친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실 앞에 제대로 한번 저항해 보지도 못한 채 관념 속을 헤매다가 상처 받고 좌절하는 지식인의 자화상은 조금도 낯설지 않다. 학창 시절, 일본이 우리나라를 부당하게 침략하고 파렴치하게 압제했을 때 지식인의 좌절과 방황을 그린 시와 소설 들을 필독서니 교과서 지문이니 수능 언어 영역 지문이니 어디에서고 무수히 반복해서 토막토막 마주했다. 그때마다 정답은 언제나 따로 정해져 있었지만, 나는 무용지물처럼 아무 힘도 쓰지 못하는 지식이, 그 지식을 처음에는 열렬히 신봉했을 지식인이 딱하기만 했다.
지식은 오히려 독처럼 스며들어서는 잠자는 정신을 깨워 잔인한 진실을 가리는 현실의 달콤한 거짓을 분별케 하고, 무지로 굳어 있던 양심을 펄떡이게 하여 퀭하게 핏발 선 두 눈을 부릅뜬 채 분노에 휩싸이게 한다. 세상에 이런 법은 없어! 분기탱천한 외마디를 내지르며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본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다 알고 있어도 세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작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을 일삼는다.
그러나 그게 어디 특정한 시대에만 국한된 이야기이던가? 지금 우리나라의 위정자들도 별다르지 않다. 공직의 최고 자리를 차지하고는 개인의 이익에 유리하도록 어제는 그렇게 말했어도 오늘은 이렇게 말하면서 내일은 저렇게 말한다. 어제 내가 무슨 말을 했든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냥 라디오로든 TV로든 그때그때 나 자신의 이익에만 부합한 말들에 적당히 당의를 입히면 된다. 어차피 국민 한 사람이 청와대로든 국회로든 정부 부처로든 직접 찾아와 조목조목 따질 일은 좀처럼 없을 테니 그저 철옹성에서 모르쇠로 일관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밑바닥에서 국가와 역사를 떠받치는 모래 알갱이 같은 사람들은, 일찌감치 권력과 지배력에 눈뜬 소수의 사람들이 세계를 휘젓는 대로 마구 휩쓸려 스러진다.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아도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지,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저 묵묵히 감내하면서 살아 있는 한 열심히 아등바등 살아갈 수밖에.
바진의 『차가운 밤』은 모래 알갱이들의 이야기이다. 1944년에 쓰기 시작하여 1947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의 1945년 충칭을 배경으로 한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과의 전쟁이 벌어져 충칭으로 피난한 왕원쉬안의 고단한 가족 이야기가 전부이다. 왕원쉬안과 그의 아내 청수성은 전쟁 이전에는 이상적인 교육에 대한 신념을 공유하면서 함께 대학 교육을 받은, 열정적이고 전도유망한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지탱해 주었던 그 지식이, 그들의 심장을 뜨겁게 두드렸던 그 지식이, 평화와 안락한 생활을 담보하던 가산을 뒤로한 채 피난 온 충칭의 전시 생활에서는 한낱 무용지물인 액세서리로 전락해 버렸다. 그들의 미래이고 꿈이고 희망이었던 지식은 한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현실 앞에 모든 가치를 빼앗긴 채 환멸과 체념과 절망을 남긴다. 급기야 당장 필요한 것은 장사 수완과 아부와 연줄과 돈인 현실에 굴복하여 왕원쉬안과 그의 어머니는 지식을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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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처럼 배우신 분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당초 내가 공부를 한 것이 후회스럽다. 더욱이 아범에게 공부를 시킨 것도 후회스럽고. 내가 아범의 일생을 망쳤구나. 나 자신도 망치고. 사실 나는 어미 자격도 없다.”
“이런 시대에는 누구라도 방법은 있어요. 단지 우리 같은 사람만 쓸모가 없을 뿐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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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당장 먹고살기 위해 왕원쉬안은 쥐꼬리만큼도 안 되는 박봉을 바라며 출판사에서 자기 생각에 반하는 허섭스레기 같은 원고를 교정하고, 청수성은 말단 은행원으로 취직하여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주임의 호의를 완강하게 거부하지 못한다. 이제 그들의 희망은 오로지 전쟁이 끝나는 것뿐이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기만 하면 모든 것을 예전처럼 되돌릴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다고 해서 지키지 못한 가정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어머니와 아내의 갈등이, 죽음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는 폐병이, 잃어버린 꿈과 신념이, 가난이 단숨에 해결될까? 바진은 환상 따위는 허용하지 않은 채 무섭도록 현실을 꿰뚫어본다. 내가 전쟁을 끝내지 못한다면 누군가 대신 전쟁을 끝내줘도 그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고. 가정은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리고, 폐병은 마지막 남은 생명까지 가차 없이 갉아먹고, 꿈과 신념은 산산이 흩어지고, 가난은 더욱 지독해지고, 밤은 더더욱 차갑게 얼어붙는다고. 그렇게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바진은 자기 소설 『차가운 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본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곧 붕괴할 구사회, 구제도, 구세력이 뒤에서 그들을 지휘하고 있다. 그들은 반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 희생자가 되고 만 것이다. 나는 세 명의 주인공을 모두 동정하지만, 그러나 그들 모두를 비판한다.” 개인의 ‘반항’이 개인의 통제력이 닿지 않는 거대한 힘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지 잘 알았을 텐데도 바진은 이토록 혹독하다. 그 무서운 절망에 휩싸여 자기 연민에만 빠져 있다면 단 하루도 살아 있을 수 없다. 그런 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거대한 힘이 금지하고 통제하는 지식을 파고들어 무모하게 반항하는 개인들의 발자취가 무수히 겹쳐져 세상은 변화하고 역사는 나아간다. 여전히 세상이 혼탁한 오물로 가득해 보여도 그런 희망이 없이 어떻게 앞으로 살아나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