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권영주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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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단편집까지 겨우 세 편만 읽고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영 내키지 않지만, 오가와 요코는 고요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동화풍 이야기에서 따뜻한 감동의 밀도를 높여야 한다는 강박을 얼마쯤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 나를 완전하게 감싸던 감동의 자연스러움은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에서 재현되지 못하고 오히려 과도한 설정으로 억지 감동을 자아내려는 부자연스러움만 다소 거북하게 아쉬움을 남겼다. 『바다』에 이르러서는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가 충분히 매혹적인 소설인데도 읽는 내내 알게 모르게 나를 불편하게 했던, 그 인위적인 부자연스러움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특히 이 단편집의 표제작인 「바다」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악기 ‘명린금’의 신기한 이미지로 만들어낸 신비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만 있다. 명린금(울 鳴, 비늘 鱗, 거문고 琴)은 혹등고래의 부레 안에는 날치 가슴지느러미 현을 넣고 겉에는 물고기 비늘을 빽빽하여 붙인 상상의 악기이다. (명린금의 기본 재료로 왜 하필 ‘혹등고래’를 선택했을까 궁금해서 찾아봤다. 혹등고래는 고래들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아름다운 노래로 암컷에게 구애한다고 한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딱 한 사람, 이 악기를 발명한 ‘꼬마 동생’이 유일하다. 해변에서만, 그것도 바닷바람이 불어야 명린금이 소리를 낸다. 번역본 표지의 환상적인 그림은 명린금을 부는 소년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일 게다.

명린금의 존재가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이 단편에서 아쉬운 것은 명린금이 아니다. 작가 인터뷰에서 오가와 요코도 꼬마 동생과 명린금의 생생한 이미지가 떠올라 이 단편을 썼다고 말했다. 단지 명린금이라는 특별한 장치를 마련했다면 다른 인물이나 배경은 과도한 설정 없이 좀더 일상적으로 자연스러워야 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무슨 사연인지 결혼을 약속하기까지 좀처럼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이즈미 씨, 완벽하지만 수상하기 그지없는 분위기 속에서 어색하게 환영하는 이즈미 씨 가족과의 인사 자리, “독이 있을지 모르니까 주의하시구려” 하고 의미심장한 귓속말을 건네는 치매 할머니, 거대한 몸집으로 사이다를 마시는 꼬마 동생의 존재(왜 하필 ‘사이다’일까도 곰곰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모르겠다) 등 애매한 미스터리만 뭉게뭉게 피워 올리고는 이야기는 뜬금없이 꼬마 동생의 명린금 연주로 끝나버린다. 아무에게나 들리지 않는다는, 순수하게 믿는 자에게만 들린다는, 너무나 모호하고 감상적이고 황급한 결말로 말이다.


「향기로운 바람 부는 빈 여행 6일」은 「바다」보다 훨씬 완성도 높은 단편이지만 생의 아이러니로 마련해 놓은 반전이 제법 익숙하여 신선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열아홉에 오스트리아 남자와 사랑한 고토코 씨는 꼭 돌아오겠노라던 약속을 믿었지만, 이런 이야기에서 대개 그렇듯이 그는 제 나라의 가정을 지키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나, 앳되고 어여뻤을 소녀는 예순넷의 뚱뚱한 미망인이 되고, “황색 사탕처럼 맑은 눈동자와 민들레 솜털처럼 부드러운 금발”을 가졌던 남자는 양로원 병상에서 앙상하게 죽어가는 노인이 되었다. 사랑한 사람들은 청춘의 생기로 찬란했으나, 재회한 사람들은 세월에 볼품없이 사그라져간다.


자신에게 등 돌리고 45년 동안 소식 한 번 없었던 남자가 직접 연락한 것도 아니고 양로원 직원의 형식적인 연락에, 알파벳도 모르는 어수룩한 아줌마가 결연하게 낯선 나라행을 결심하고 한달음에 노쇠한 남자의 머리맡으로 달려온 것은, 그를 잊지 못해 미치도록 보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45년이라는 시간은 아무리 대단하게 사랑했어도 그 강도와 밀도 그대로 사랑을 지켜내기에는 너무나 길고 거세고 모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기적이거나, 대상이 변질되어 그렇게 사랑하는 모습의 자신을, 혹은 영원한 사랑을 사랑하고 있을 뿐일지 모른다. 고토코 씨도 세속적인 시간이 파괴하는 첫사랑의 환상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첫사랑과 확실하게 결별하지 못했다. 다른 남자의 아내로 40여 년을 살았어도, 돌아오겠다는 언약은 했지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파약은 없었던 사랑의 약속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못한 미련한 마음이 여자에게는 아직도 미진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제 고토코 씨는, 자신이 사랑했던 “황색 사탕처럼 맑은 눈동자”는 눈꺼풀 아래 숨기고 “민들레 솜털처럼 부드러운 금발”마저 다 잃어버리고서 부스럼투성이 두피만 드러난 노인을 애잔하게 지켜보며 영원히 이별한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 남자가 아니라, 부여잡지도 내려놓지도 못한 첫사랑의 감정 자체와 이별할 수 있는 시간이었을 터. 그러니 병상의 노인이 누구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이드」에는 기억에 제목을 달아주는 초로의 신사와 어린 가이드 소년이 등장한다. 그러고 보니 오가와 요코는 어른과 아이가 순수하게 교감하는 우정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는 수학자와 가정부의 아들 루트,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에서는 거구의 체스 마스터와 소년이었던 리틀 알레힌, 『바다』에서는 「바다」의 이즈미 씨 애인인 ‘나’와 명린금 연주자 꼬마 동생, 「병아리 트럭」의 호텔 도어맨과 실어증 소녀. 지금 읽고 있는 알베르토 망구엘의 『책 읽는 사람들』에 따르면 이것은 오가와 요코의 ‘카펫 무늬(예술가의 작품들에서 일관되게 다루어지는 주제나 특징)’쯤 되려나.


하지만 정작 이 단편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세대를 초월한 교감과 신뢰와 우정보다, 구상의 언어로 추상의 기억을 여닫는 열쇠를 만드는, 전직 ‘시인’이자 현직 ‘제목 상점 주인’인 신사의 작업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잊고 싶지 않은, 잊어서는 안 되는, 그리하여 영원히 간직해야 할 기억에 제목을 붙이면 그 기억을 안전하게 보관할 장소를 마음속에 확보해 놓는 셈이다. 아무리 오래전일지라도, 복잡할지라도, 길지라도 열쇠말만 떠올리면 그 기억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괜히 거창하게 꾸미거나 거드름 피우지 않는 거란다. 평범한 말에 진심이 깃들어 있거든.”


이사벨 아옌데의 사랑스러운 단편 「두 마디 말」에서는 벨리사가 말(言)을 판다. 그녀가 말을 파는 데도 원칙이 있는데 신사의 그 말과 통한다. 판에 박힌 말, 포장된 말, 가식적인 말, 위선적인 말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말, 진심이 담긴 말, 그리하여 “세상 어느 누구도 사용하지 않을 자신만의 말”만 판다. 진심 없이 진심인 양 가장하는 말 혹은 언어는 세상의 모든 미사여구를 다 늘어놓아도 힘을 쓰지 못한다.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미사여구를 덧댈수록 힘을 점점 잃어갈 뿐이다. 평범해도 진심에 명징하게 가닿는 말만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기억도 끌어올릴 수 있는 법이다. 이런 말은 과장된 몸짓과 소리로 웅변하지 않고 그저 귓가에 가만히 속삭이기만 해도 마음속에 또렷하게 각인된다.


여기까지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신사는 고독한 여행에 자신만의 관광 가이드로 동행해 준 소년을 위해 그날 하루의 기억을 담은 제목을 선사한다. “추억이 없는 사람은 없다.” 아, 힘이 스르륵 빠졌다. 그때껏 「가이드」를 읽으면서 내 멋대로 키워온 기대에 배신당한 기분이랄까. 물론 영혼이 있는 생물이라면 누구나 추억 하나쯤은 있다. 그 문장은 신사와 소년이 서로에게 공명했던 그날의 기억을 불러내는 열쇠말이 될 수 없다. 일반론이랄까, 그 문장은 “시인은 왜 그만두셨어요?”라고 묻는 소년의 말에 신사가 답한 말이기 때문이다. “시가 필요 없는 사람은 아주 많지만 추억이 없는 사람은 없거든.” 신사의 대답에도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제목 상점을 열긴 했지만 그 자체가 사람들의 기억 혹은 추억을 소재로 시를 짓는 일이 아닌가. 더구나 사람에게는 반드시 시가 필요하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편은 「버터플라이 일본어 타이프 사무소」이다. 중학생 시절에 타자기를 구경했다. 언니가 상고에 다녔던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였다. 실물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도 타자기를 떠올리면 아련한 향수와 작가의 낭만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된다. 올림피아 타자기를 예찬한 폴 오스터(『타자기를 치켜세움』)도 그렇지만, 미스터리 드라마 <제시카의 추리 극장>에서 추리소설 작가이자 탐정의 역할을 했던 제시카 할머니가 창가에서 타자기를 두드리던 풍경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내 기억 속의 타자기는 그리 커다랗지 않았다. 앉은뱅이 찻상 위에 충분히 올라갈 크기였다. 활자 키의 배열도 지금 키보드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단편과 별 상관이 없는데도 특별할 것 없는 추억까지 잡다하게 뒤진 것은 일본식 타자기의 모양과 크기가 꽤 달랐던 듯해서이다.


오가와 요코는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에 일본에서 사용되던 타자기를 자세히 묘사했다. “책상 위에 설치된 일본어 타이프 기계는 너비가 1미터쯤 되고 철제 판에 활자가 빈틈없이 빼곡히 들어 있습니다. 중심부에 사용 빈도가 높은 활자, 예컨대 히라가나나 숫자, 의학 용어에 자주 등장하는 한자 등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한글 자모 24자와 알파벳 26자에 비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합쳐 92자에다가 한자까지 병기하는 일본어를 생각하면 일본식 타자기는 찻상으로 어림없을 만도 하다. 어쩌면 이 단편에 등장하는 버터플라이 일본어 타이프 사무소가 의대 대학원생들의 논문을 특수하게 취급하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어쨌든 의학 분야에 따라 자주 쓰이는 용어가 있고, 그 용어를 만들기 위한 활자는 그만큼 닳고 깨져서 망가지기 쉽다. 게다가 ‘나’는 타이프 사무소의 타자기에 아직 숙련되지 않은 초보 타이피스트이다.


이로써 「버터플라이 일본어 타이프 사무소」에는 하루 종일 타이프 치는 소리와, 간혹 교정을 위해 타이프 원고를 낭독하는 타이피스트의 목소리, 그리고 망가진 활자를 3층 활자 관리인에게 조용히 교환하는 속삭임만 단조롭게 울리는데도 관능적인 에로티시즘으로 숨 막히도록 부풀어 올라 팽팽하게 긴장될 준비가 된 셈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 누구에게도 신체적인 접촉은 없다는 사실이다. 단지 “꽃 속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춰진 꿀 한 방울을 빨아올리기 위해 꽃잎을 흔들며 암술 속에 더듬이를 뻗고 날개를 바들바들 떠는 나비”처럼 활자판에서 글자를 찾는 타이피스트들의 부드럽지만 강력한 손길, “젖빛 유리 저편에서 하늘색 셔츠와 섬세한 납빛 손가락”만 보이는 활자 관리인, 망가진 활자 ‘자궁 질부 미란(糜爛)의 미(糜), 고환(睾丸)의 고(睾), 새살 돋을 질(膣)’을 활자 관리인에게 건네는 나, 그 활자들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고, 숨을 불고, 입술로 덥히고 혀로 핥으며” 고치는 활자 관리인이 있을 뿐이다. 특히 이 단편에서는 수(數)와 체스의 세계에서 매혹적인 의미를 찾아냈던 오가와 요코만의 재능을 한껏 발휘해서 활자에 숨은 에로스로 독자를 미혹시킨다.


「은색 코바늘」, 「깡통 사탕」, 「병아리 트럭」에 대해서는 별로 남겨둘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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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고
    from MI 2018-07-20 21:28 
    어느 영화에 깔린 복선과 설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개연성과 작품성을 비판하는 관객이 있다고 하자. 잘못은 있는가? 누구에게 있는가? 여러 답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일반론으로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라고 말하지 않을까?그래서 이런 글을 봐도 어쩔 줄 모르고 고민만 되풀이하게 된다. 몇 가지만 덧붙여 보도록 한다.1 "고요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동화풍 이야기에서 따뜻한 감동의 밀도를 높여야 한다는 강박"과 "인위적인 부자연스러움"그런 강박이 있는지 알 수 없
 
 
 
지상 최고의 맛 - 맛의 비밀을 찾아 떠난 별난 미식가의 테루아 탐험기
로완 제이콥슨 지음, 이은주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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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건 외국이건 TV를 보다 보면 절대로 빠지지 않는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음식에 관한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맛집에 관한 프로그램은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데 맛집에 대한 폐해도 많아 고발 프로그램이 나오기도 하지만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보면 눈이 즐거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어디 TV뿐이랴 블로그나 게시판을 둘러보아도 음식 이야기는 빠지는 법이 없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식욕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욕망 중 하나니 말이다.

로완 제이콥슨의 『지상 최고의 맛』은 바로 이 음식에 대한 이야기이며 자연이 만들어내는 맛을 담은 책이다. “테루아를 알면 지상 최고의 맛과 만난다!”는 카피가 큼지막하게 눈에 띈다. 테루아란 무엇인가. 흔히 테루아는 토양과 기후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만 저자는 테루아의 의미를 끝없이 확장하여 자연 조건과 재배자의 열성 등 식재료의 맛을 결정하는 요소를 통틀어 테루아라 말한다. “자연은 장소마다 서로 다른 거래를 한다. 한 지역을 규정하는 바람과 파도와 빛과 생명의 패턴이 거기서 자라는 동식물 안으로 흘러든다. 그것이 테루아다.”

파나마의 커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굴, 연어와 같이 자연 그대로가 재료인 것들과 초콜릿, 와인, 치즈와 같은 인간의 손을 거쳐 음식으로 탄생하는 것도 있다. 다른 미식 관련 책들과 다른 점은 음식으로 탄생한 재료도 단순한 소개 이전에 자연적, 생태적인 근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무조건 자연 그대로의 음식만을 부르짖는 것은 아니다. 초콜릿이나 와인을 만드는 회사를 방문해 회사의 철학과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한 장이 끝나는 마지막에는 소개한 재료들로 만들 수 있는 요리를 소개 해 주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독특한 점은 사진이 없다는 것이다. 간단한 삽화가 전부인데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다.

한 끼를 때운다고 쉽게 이야기하고 짧게는 30분이면 끝나버리는 식사일지라도 음식이 차려지기까지의 과정은 오랜 시간과 정성의 산물이기도 하다. 봄부터 가을까지 자란 벼로 지은 쌀과, 배를 타고 나가 잡은 생선, 간단한 콩나물무침마저도 콩을 며칠을 키워 만든다. 이런 재료들을 삶고, 굽고, 무쳐서야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으니 먹는다는 것 자체가 시간과 정성을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 패스트푸드라는 것도 먹는 기준에서의 이야기지 재료가 만들어지는 시간이 긴 것은 매 한가지다. 최불암 씨의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한국인의 밥상’을 보고 있자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군침이 돈다. 순대를 큼지막하게 썰어 넣고 끓이는 순대국밥, 젓갈향이 가득한 김장김치, 산에서 캔 나물무침,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우리의 테루아다.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자연을 파괴해야 한다. 하지만 자연이 있어야 인간도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할 터, 삶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사람들 때문에 내 맛은 물론이거니와 생존마저 위협받고 있으니 서글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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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조안 해리스 지음, 김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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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안 로셰(Vianne Rocher). 이토록 달콤하고 부드럽고 근사하게 혀를 굴릴 수 있는 이름이라니. 조안 해리스의 『초콜릿』을 읽는 동안 그 매혹적인 이름에 미혹되어 있었다. 한때 잠깐 소설이라는 걸 쓰는 흉내를 냈을 때 무엇보다 내 머리를 쥐어뜯게 한 것은 이름이었다. 인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언제나 곤혹스러웠다. 아무 이름이나 막 가져다 붙일 수는 없는 노릇, 인물을 상징하되 예쁘고 세련된 이름을 욕심껏 찾아도 나중에 다시 그 이름을 불러보면 유치하고 낯간지럽고, 어딘가 모르게 그 이름에 곱게 발라놓은 화장이 덕지덕지 들떠버린 느낌이 든다. ‘비안 로셰’라는 이름은 말맛도 신비하고 아름답지만 그 의미도 충분하다. 비안의 성(姓) ‘로셰’는 익숙하다 싶었는데, 오톨도톨한 공 모양의 초콜릿을 금박지로 하나하나 감싸서 수북하게 쌓아 올린 페레로 로셰 광고 때문이었다. 그런데 로셰(Rocher)는 바위 모양의 초콜릿을 이르는 프랑스어이다. 초콜릿 가게 겸 카페 겸 공방의 주인인 비안에게는 이보다 더 달콤하게 어우러지는 성이 또 어디에 있을까.

『초콜릿』에는 비안이 프랑스의 작은 마을 랑스크네-수-탄으로 몰고 온 바람이 겨울의 찬 공기를 몰아내고 봄의 따뜻한 공기를 덥히며 산들거린다. ‘바람’은 비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어이다. 비안은 여태껏 한곳에 오랫동안 머무는 일 없이 유럽과 미국을 방랑했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지는 않았지만 (비안이 고백하길) 분명 마녀였던 엄마와 함께 바람이 바뀔 때마다, 카드 점괘에 검은 옷의 사제가 나타날 때마다 이동했다. 그렇게 흘러든 랑스크네에서, 이제 딸에서 엄마가 된 비안은 자기 딸 아누크와 정착하고 싶다. 엄마를 따라 이방인으로 이곳저곳을 가난하게 기웃거리던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성장의 역사가 연속적인 추억으로 아로새겨지는 공간을 선물하고 싶다. 실체는 없지만 비안과 엄마를 끈질기게 따라붙으면서 위협하던 검은 옷의 사제와도 도망치지 않고 맞설 것이다.

마녀부터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꽁꽁 숨겨진 슬픔을 들여다보는 능력, 어두운 무채색 마을에 환한 유채색으로 아기자기하게 단장한 초콜릿 가게 ‘천상의 프랄린’,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회색 토끼 ‘팡투플’, “나는 자네가 무슨 바람에 실려 왔는지 알아. 나는 자네를 보자마자 알아봤어. 자네가 마녀라는 걸 신부가 알까?(아르망드 부아쟁의 말)”까지, 『초콜릿』은 비안의 신비로운 정체를 둘러싼 몽환적인 동화풍 분위기 속에서 극단적인 대립 구도로 소설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시킨다. 이를테면 비안 로셰 vs 프랑시스 레노 신부, 비안이 도착한 사육제 vs 레노 신부가 떠난 부활절, 초콜릿 가게 vs 교회, 집시 vs 랑스크네 주민자치위원회, 엄마 아르망드 부아쟁 vs 딸 카롤린 클레르몽, 아내 조세핀 보네 vs 남편 폴-마리 뮈스카…… 등등. 이야기도 사육제 마지막 날인 2월 11일부터 부활절 다음 날인 3월 11일까지 비안과 레노 신부가 상반된 시선으로 거의 번갈아 서술된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에 대해 경보를 울린 그들은, 랑스크네의 중심인 생제롬 광장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위치한 초콜릿 가게와 교회에서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앙숙처럼 대립한다.


레노 신부는 하필이면 사육제에 랑스크네로 섞여든 비안이 불길하기만 하다. ‘사육제’는 가톨릭 축제이긴 하지만, 씨앗을 뿌리는 신(神) 사트르누스를 기리는 고대 로마의 이교도 제전에서 기원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꺼림칙한 사육제가 끝나면 곧바로 신성한 부활절까지 40일 동안 금욕해야 하는 사순절인데, 그 여자는 일부러 교회 맞은편에다가 나약한 신도들을 유혹하기 위해 초콜릿 가게까지 떡하니 차렸다. ‘초콜릿’은 이교도들이 광란의 제전에서 사악한 환희와 황홀한 타락을 탐닉케 하는 악마의 유혹이나 다름없는데 말이다. 이쯤 되면 미식을 위한 모든 음식, 쾌락을 위한 모든 에로스, 평상심을 방해하는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에 대한 금욕과 절제와 고행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마녀를 좌시할 수 없다.


비안은 엄마와의 떠돌이 생활 중에 언제나 그들을 위협하며 쫓아왔던 검은 옷의 그림자를 레노 신부에게서 발견한다. ‘검은 옷의 그림자’는 자유로운 모험가이자 영원한 여행자인 그들을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침입자로 간주한다. 그들은 도덕적 관습과 종교적 규율에 몰개성적으로 순응해 공동선의 질서에 따라 조화롭게 통제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험한 바람을 불어넣어 개인으로서의 욕망하는 자아를 일깨우고 공동체의 근간을 뒤흔드는 불순분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안이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정착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위협을 느끼고 왠지 모를 두려움 속에서 초조해하는 쪽은 검은 옷의 그림자, 즉 레노 신부로 역전된다. 사제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사랑의 포용력을 오히려 비안이 발휘해 레노 신부를 가엾게 굽어본다. 레노 신부가 비안을 추방하기 위해 무슨 짓을 꾸며도 비안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행복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신념에 따라 초콜릿 가게를 열고, 딱딱하게 경직된 사회적인 육체 속에 갇혀 상처로 곪아가는 개인적인 정신에 가닿는다. “빨대로 마시는 소돔과 고모라”일지언정 사람들에게 ‘천국의 행복’을 선사한다면 비안을 초콜릿을 만들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비안 로셰와 프랑시스 레노의 싸움에서 승리는 당연히 덜 초조해하는 쪽, 덜 두려워하는 쪽에게 돌아간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로 서로와 싸웠을까? 그들 역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비밀 하나를 붙들고, 그 진실과 어떻게 대면하고 용서하고 화해할까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쩌면 너무나 달라서 어떤 시공에서도 교차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들 삶의 태도는 바로 그 인생의 숙제를 풀기 위해 각자 나름대로 선택한 최선의 방식일지 모른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들이 서로에게 첫 열쇠였을지 모른다. 하나도 닮지 않았지만 징그럽게 닮아 있다는 것을 서로 첫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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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이야기 샘터 외국소설선 8
존 스칼지 지음, 이원경 옮김 / 샘터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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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성공한 작품의 후속작이 나오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성공한 전작의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야기의 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작가나 독자 모두에게 즐겁지 않은 일이다. 전작의 성공을 놓지 않고 싶어 하는 작가나 후속작을 애타게 기대하던 독자 모두에게 실망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의 후속작 이야기가 나왔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기대 반, 걱정 반이라고 할까. 후속작 『유령 여단』과 『마지막 행성』 3부작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 듯 보였으나 결국은 외전이라는 이름으로 『조이 이야기』까지 등장해서야 그 긴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걱정과는 달리 후속작 역시 전작들과는 다른 분위기로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조이 이야기』는 외전이라는 이름답게 전작들과는 전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보통 짧게 끝나기 마련인 에필로그를 한 권의 책으로 써낸 듯한 느낌으로 SF라기보다는 성장소설에 가까운 느낌이다.

『조이 이야기』가 성장소설에 가까운 이유는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다. 『노인의 전쟁』 3부작은 좋은 SF기도 하지만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져가는 이야기이기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인의 전쟁』의 첫 구절은 이렇다. “75세 생일에 나는 두 가지 일을 했다. 아내의 무덤에 들렀고, 군에 입대했다.” 젊은 육체로 태어난 존 페리의 이야기다. 『유령 여단』에서는 조이의 친아버지인 샤를 부탱과 조이, 샤를 부탱의 DNA를 가진 특수부대원의 이야기였으며 『마지막 행성』에서는 존 페리의 죽은 아내의 DNA를 가진 제인 세이건의 이야기이며 페리와 세이건, 그리고 조이가 가족을 이루며 끝맺음을 한다. 이제 에필로그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등장할까.

가족이 된 페리와 세이건, 조이는 허클베리 행성에서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느 날 우주개척연맹으로부터 새로운 식민지 행성을 개척하고 지도자가 되는 것을 제안받고 떠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기대에 부풀어 도착한 곳은 전통적인 의미의 평범한 개척지가 아닌 우주개척연맹이 외계종족과의 전쟁을 위해 미끼로 사용하기 위한 행성이었다. 페리와 세이건은 행성과 개척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리저리 애써 보지만 개척연맹에게 제지를 받게 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샤를 부탱의 딸이기도 한 조이에게 한 가지 일을 맡기는 것이었다.


『조이 이야기』로 『노인의 전쟁』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끝맺음을 했다. 에필로그로 간단히 끝낼 수 있는 이야기를 왜 또 냈을까 하는 의심은 책을 읽으며 말끔하게 사라졌다. 복잡한 이야기를 가진 가족들이 『조이 이야기』를 끝으로 이제 평범한 개척민이 되었다. 각각 다른 독특한 이야기로 즐거움을 주었던 시리즈가 끝나는 걸 보니 아쉽기도 하지만 그만큼 즐거움도 컸다. 혹시라도 『조이 이야기』를 처음 보려는 독자가 있다면 얼른 책을 덮으시라. 시리즈의 시작은 『노인의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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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슈테판 츠바이크는 1881년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나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과 1939~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을 목격했다. 그의 생애 두 번째 세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나치스가 오스트리아에 집권하면서 1934년 츠바이크는 영국으로 망명한다. 이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영국, 미국, 브라질 등 망명지를 떠돌다가 영국에서 만난 두 번째 아내 샤로테 알트만과 함께 1942년에 자살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에 종전했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를 다 읽고서야 이 소설이 츠바이크 사후에 출간된 유고작이자 미완성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생애 마지막까지 조금씩 써나갔지만 미처 완성하지 못한. 별다른 설명이 없었더라면 미완성작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만큼 지금 남겨진 그대로도 충분하지만 츠바이크는 아직 더 해야 할 말과 이야기가 남은. ‘왜 이 소설을 완성하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은 ‘어떻게 죽었을까?’로 이어졌고, 비로소 책날개에 짧게 요약된 츠바이크의 생애에 관심을 가졌다. 츠바이크가 들려주는 다른 사람들의 일생에는 관심을 기울였는데도 정작 그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았구나, 깨달은 순간 “부인과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문장이 눈에 박혔다. 그리고 이 소설에 배어 있는 절망의 무게에 새삼 압도됐다. 그것은 한 작가가 삶을 끝내기로 결정하도록 몰아붙인 절망이나 다름없을 테니.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트리아의 작은 산골 마을, 무서운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의 참담한 그림자는 여전히 악몽처럼 끈질기게 따라붙는 전후 시대. 크리스티네 호프레너는 우체국 여직원으로 병든 노모를 부양하면서 가난하고 고단하게 생존하고 있다. 도대체 누구의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을까? 전쟁에게 빼앗긴 이전의 단란하고 풍요롭고 행복한 가정생활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돌려받지 못한다. 전쟁 중이라 인내했던 가혹한 노동과 궁핍한 살이만 끝없이 이어질 뿐이다. 전쟁 이전의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웃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던” 열여섯 살 소녀 크리스티네는 전쟁 이후의 “성냥 한 개비, 커피콩 한 알, 밀가루 반죽 부스러기까지 계산해야 살 수 있는”, 그리하여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스물여섯 살 여인 크리스티네로 활기와 감성과 욕망을 잃은 채 박제되고 말았다.


전쟁의 군홧발이 짓밟고 지나가면 누구도 무사하지 못하니, 크리스티네 혼자 모두가 감내하는 고통을 억울해하며 유난 떨 것 없다고 말할 것인가? 츠바이크는 코웃음 치면서 크리스티네에게 신데렐라 초대장을 보낸다. 그리고 전쟁의 군홧발은 사람을 가려서 짓밟는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크리스티네는 부유한 이모의 선심으로 스위스 최고급 휴양지의 화려한 호텔에 초대받는다. 그곳은 공포를 몰고 오는 포화 소리조차 먼 데서 성가시게 들려오는 멍멍이 소리로 심드렁해할 것처럼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라곤 조금도 드리우지 않았다. 오로지 번쩍번쩍하고 으리으리하고 휘황찬란할 뿐이다. 그곳은 ‘너무 비싸!’라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외계어인 줄 아는 부유층만 받아들인다. 당연히 전쟁, 가난, 고통, 근심, 슬픔, 좌절, 절망, 노동 같은 단어들은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 이모의 초대였더라도 그곳을 지배하는 부의 질서에 따라 동등한 사람으로 환영받으려면 크리스티네는 ‘우체국 여직원’에서 ‘부유한 상속녀’로 변신해야 한다.


궁기에 찌든 조카의 꾀죄죄한 입성이 창피한 이모는 산 채로 생기 없이 박제되어 있던 크리스티네 호프레너를,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진주 목걸이를 두른 고혹적인 여인 크리스티아네 폰 볼렌으로 변신시킨다. ‘크리스티네’에게 금지되어 있던 모든 활력과 욕망과 쾌락이 ‘크리스티아네’로 분출된다. 하지만 크리스티아네의 지극한 행복감은 크리스티네의 것이 아닐뿐더러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드레스는 이모가 ‘빌려준’ 것이고 우아한 진주 목걸이도 가짜이다. 진짜 크리스티네의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그토록 불완전한 변신을 위해 크리스티네가 자기 자신을 버렸다는 게 진정한 불행의 시작이다.


세상의 모든 드라마는 신데렐라를 꿈꾸지만 자기 자신을 버린 신데렐라는 허용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데렐라가 편입되고 싶었던 상류층 사회의 고질적인 위선과 가식과 허영보다 재투성이 아가씨의 기만과 욕망이 더욱 지탄받는다. 열두 시의 마법이 계속되든(언제 들킬지 몰라 애면글면 마음을 졸이든) 깨지든(숨기고 싶었던 정체가 만천하에 까발려지든) 끔찍한 상처를 받는 것은 신데렐라의 가면 속에 숨은 재투성이 아가씨뿐이다. 그런데도 재투성이 아가씨가 신데렐라에서 악녀로 추락하면 결코 훼손돼서는 안 될 무엇이 지켜졌다는 안도감에 희열을 느끼다니 우습다. 상류층 사회의 위선과 가식과 허영은 아스라이 멀어지고 재투성이 아가씨의 변신을 모욕적인 침입으로 매도하며 누구의 무엇을 대변하고 있었을까?


크리스티네는 신데렐라에서 재투성이 아가씨로, ‘폰 볼렌’에서 ‘호프레너’로 바닥없이 추락한다. 이 추락의 속도와 충격은 재투성이 아가씨에서 신데렐라로, ‘호프레너’에서 ‘폰 볼렌’으로 높이높이 비상했던 것보다 더 급격하고 엄청나다. 이제 그녀는 당연히 ‘크리스티아네’일 수 없지만 원래 ‘크리스티네’로 돌아갈 수도 없다. 똑같은 전쟁을 겪었지만 자기 세계에는 참혹하기만 했던 전쟁이 한없이 관대했던 또 다른 세계를 이미 엿봤으니까. 크리스티네의 정체가 탄로 났을 때 그녀의 추방에 앞장서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모이다. 가난한 불륜 드레스 걸에서 우아하고 정숙한 귀부인으로 변신한 이모는 덩달아 자기 정체까지 드러날까 봐 안절부절못한다. 게다가 재력을 과시하며 조카를 변신시켰던 값비싼 옷과 장신구들도 도로 거둬들인다.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나댄” 크리스티네를 탓한다.


하지만 크리스티네가 상류층 호텔에서 추방당한 것을 자기 자신을 버린 개인의 어리석은 기만과 분수없는 욕망 탓으로만 돌릴 것인가? 하지만 그녀가 자기 자신이길 고집했더라면 애초 호텔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는 신데렐라’여야 한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판타지이다. 상류층 사회가 베푸는 아량인 것 같지만, 그것은 ‘부(富)로 신분이 재편되는 불가침의 영역을 감히 욕망하지 말라’는 오만한 폭언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크리스티네가 자기 자신만큼은 지켰어야 하는 것은 그게 가장 덜 상처받는 길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네는 이전보다 더 초라하고 남루하고 비참한 우체국 여직원의 생활로 돌아온다. 그러나 자신을 부정하는 순간 삶의 기반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법이다. 그녀는 이전 삶의 방식을 놓아버리고, 돈뿐만 아니라 그동안 절제했던 감정과 욕망까지 마음껏 발산하려 한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서 그녀처럼 좌절하고 분노하는 연인 페르디난트에게 위안을 구하며 새 삶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크리스티네처럼 사회의 불합리함에 눈떠도, 페르디난트처럼 분노를 터뜨리게 하는 원인을 여러 쪽에 걸쳐 조목조목 짚어낼 줄 알아도, 현실은 그들에게 새 삶의 기반을 마련할 돈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그 기반이 어째서 돈이 되어야 하느냐고, 삶의 가치는 다른 것에서 구해야 한다고 되묻는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지 않고 제 주제에 걸맞지 않는 욕망을 탐하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가진 자의 논리에 이미 세뇌당한 것일지 모른다.


츠바이크는 비루한 삶을 연명하고 싶지 않아 함께 자살하려던 두 연인의 ‘우체국 현금 절도 계획’까지 써놓았다. 츠바이크가 더 살기로 마음먹었더라면 이후에는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까? 안타깝지만 왠지 크리스티네 혼자만의 비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기묘한 설렘과 초조감으로 세운 페르디난트의 우체국 현금 절도 계획은 언뜻 두 사람 모두에게 타당한 듯싶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크리스티네가 안아야 할 위험부담이 너무 크고, 실패 시에 페르디난트가 빠져나갈 구멍은 확실히 마련되어 있다. 그 점에 대해 페르디난트는 자신이 아닌 크리스티네가 우체국 여직원인 이상 그 위험은 감수할 수밖에 없으며, 선택도 책임도 그녀의 몫이라고 못 박는다. 비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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