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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ㅣ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슈테판 츠바이크는 1881년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나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과 1939~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을 목격했다. 그의 생애 두 번째 세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나치스가 오스트리아에 집권하면서 1934년 츠바이크는 영국으로 망명한다. 이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영국, 미국, 브라질 등 망명지를 떠돌다가 영국에서 만난 두 번째 아내 샤로테 알트만과 함께 1942년에 자살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에 종전했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를 다 읽고서야 이 소설이 츠바이크 사후에 출간된 유고작이자 미완성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생애 마지막까지 조금씩 써나갔지만 미처 완성하지 못한. 별다른 설명이 없었더라면 미완성작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만큼 지금 남겨진 그대로도 충분하지만 츠바이크는 아직 더 해야 할 말과 이야기가 남은. ‘왜 이 소설을 완성하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은 ‘어떻게 죽었을까?’로 이어졌고, 비로소 책날개에 짧게 요약된 츠바이크의 생애에 관심을 가졌다. 츠바이크가 들려주는 다른 사람들의 일생에는 관심을 기울였는데도 정작 그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았구나, 깨달은 순간 “부인과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문장이 눈에 박혔다. 그리고 이 소설에 배어 있는 절망의 무게에 새삼 압도됐다. 그것은 한 작가가 삶을 끝내기로 결정하도록 몰아붙인 절망이나 다름없을 테니.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트리아의 작은 산골 마을, 무서운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의 참담한 그림자는 여전히 악몽처럼 끈질기게 따라붙는 전후 시대. 크리스티네 호프레너는 우체국 여직원으로 병든 노모를 부양하면서 가난하고 고단하게 생존하고 있다. 도대체 누구의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을까? 전쟁에게 빼앗긴 이전의 단란하고 풍요롭고 행복한 가정생활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돌려받지 못한다. 전쟁 중이라 인내했던 가혹한 노동과 궁핍한 살이만 끝없이 이어질 뿐이다. 전쟁 이전의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웃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던” 열여섯 살 소녀 크리스티네는 전쟁 이후의 “성냥 한 개비, 커피콩 한 알, 밀가루 반죽 부스러기까지 계산해야 살 수 있는”, 그리하여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스물여섯 살 여인 크리스티네로 활기와 감성과 욕망을 잃은 채 박제되고 말았다.
전쟁의 군홧발이 짓밟고 지나가면 누구도 무사하지 못하니, 크리스티네 혼자 모두가 감내하는 고통을 억울해하며 유난 떨 것 없다고 말할 것인가? 츠바이크는 코웃음 치면서 크리스티네에게 신데렐라 초대장을 보낸다. 그리고 전쟁의 군홧발은 사람을 가려서 짓밟는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크리스티네는 부유한 이모의 선심으로 스위스 최고급 휴양지의 화려한 호텔에 초대받는다. 그곳은 공포를 몰고 오는 포화 소리조차 먼 데서 성가시게 들려오는 멍멍이 소리로 심드렁해할 것처럼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라곤 조금도 드리우지 않았다. 오로지 번쩍번쩍하고 으리으리하고 휘황찬란할 뿐이다. 그곳은 ‘너무 비싸!’라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외계어인 줄 아는 부유층만 받아들인다. 당연히 전쟁, 가난, 고통, 근심, 슬픔, 좌절, 절망, 노동 같은 단어들은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 이모의 초대였더라도 그곳을 지배하는 부의 질서에 따라 동등한 사람으로 환영받으려면 크리스티네는 ‘우체국 여직원’에서 ‘부유한 상속녀’로 변신해야 한다.
궁기에 찌든 조카의 꾀죄죄한 입성이 창피한 이모는 산 채로 생기 없이 박제되어 있던 크리스티네 호프레너를,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진주 목걸이를 두른 고혹적인 여인 크리스티아네 폰 볼렌으로 변신시킨다. ‘크리스티네’에게 금지되어 있던 모든 활력과 욕망과 쾌락이 ‘크리스티아네’로 분출된다. 하지만 크리스티아네의 지극한 행복감은 크리스티네의 것이 아닐뿐더러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드레스는 이모가 ‘빌려준’ 것이고 우아한 진주 목걸이도 가짜이다. 진짜 크리스티네의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그토록 불완전한 변신을 위해 크리스티네가 자기 자신을 버렸다는 게 진정한 불행의 시작이다.
세상의 모든 드라마는 신데렐라를 꿈꾸지만 자기 자신을 버린 신데렐라는 허용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데렐라가 편입되고 싶었던 상류층 사회의 고질적인 위선과 가식과 허영보다 재투성이 아가씨의 기만과 욕망이 더욱 지탄받는다. 열두 시의 마법이 계속되든(언제 들킬지 몰라 애면글면 마음을 졸이든) 깨지든(숨기고 싶었던 정체가 만천하에 까발려지든) 끔찍한 상처를 받는 것은 신데렐라의 가면 속에 숨은 재투성이 아가씨뿐이다. 그런데도 재투성이 아가씨가 신데렐라에서 악녀로 추락하면 결코 훼손돼서는 안 될 무엇이 지켜졌다는 안도감에 희열을 느끼다니 우습다. 상류층 사회의 위선과 가식과 허영은 아스라이 멀어지고 재투성이 아가씨의 변신을 모욕적인 침입으로 매도하며 누구의 무엇을 대변하고 있었을까?
크리스티네는 신데렐라에서 재투성이 아가씨로, ‘폰 볼렌’에서 ‘호프레너’로 바닥없이 추락한다. 이 추락의 속도와 충격은 재투성이 아가씨에서 신데렐라로, ‘호프레너’에서 ‘폰 볼렌’으로 높이높이 비상했던 것보다 더 급격하고 엄청나다. 이제 그녀는 당연히 ‘크리스티아네’일 수 없지만 원래 ‘크리스티네’로 돌아갈 수도 없다. 똑같은 전쟁을 겪었지만 자기 세계에는 참혹하기만 했던 전쟁이 한없이 관대했던 또 다른 세계를 이미 엿봤으니까. 크리스티네의 정체가 탄로 났을 때 그녀의 추방에 앞장서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모이다. 가난한 불륜 드레스 걸에서 우아하고 정숙한 귀부인으로 변신한 이모는 덩달아 자기 정체까지 드러날까 봐 안절부절못한다. 게다가 재력을 과시하며 조카를 변신시켰던 값비싼 옷과 장신구들도 도로 거둬들인다.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나댄” 크리스티네를 탓한다.
하지만 크리스티네가 상류층 호텔에서 추방당한 것을 자기 자신을 버린 개인의 어리석은 기만과 분수없는 욕망 탓으로만 돌릴 것인가? 하지만 그녀가 자기 자신이길 고집했더라면 애초 호텔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는 신데렐라’여야 한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판타지이다. 상류층 사회가 베푸는 아량인 것 같지만, 그것은 ‘부(富)로 신분이 재편되는 불가침의 영역을 감히 욕망하지 말라’는 오만한 폭언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크리스티네가 자기 자신만큼은 지켰어야 하는 것은 그게 가장 덜 상처받는 길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네는 이전보다 더 초라하고 남루하고 비참한 우체국 여직원의 생활로 돌아온다. 그러나 자신을 부정하는 순간 삶의 기반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법이다. 그녀는 이전 삶의 방식을 놓아버리고, 돈뿐만 아니라 그동안 절제했던 감정과 욕망까지 마음껏 발산하려 한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서 그녀처럼 좌절하고 분노하는 연인 페르디난트에게 위안을 구하며 새 삶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크리스티네처럼 사회의 불합리함에 눈떠도, 페르디난트처럼 분노를 터뜨리게 하는 원인을 여러 쪽에 걸쳐 조목조목 짚어낼 줄 알아도, 현실은 그들에게 새 삶의 기반을 마련할 돈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그 기반이 어째서 돈이 되어야 하느냐고, 삶의 가치는 다른 것에서 구해야 한다고 되묻는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지 않고 제 주제에 걸맞지 않는 욕망을 탐하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가진 자의 논리에 이미 세뇌당한 것일지 모른다.
츠바이크는 비루한 삶을 연명하고 싶지 않아 함께 자살하려던 두 연인의 ‘우체국 현금 절도 계획’까지 써놓았다. 츠바이크가 더 살기로 마음먹었더라면 이후에는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까? 안타깝지만 왠지 크리스티네 혼자만의 비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기묘한 설렘과 초조감으로 세운 페르디난트의 우체국 현금 절도 계획은 언뜻 두 사람 모두에게 타당한 듯싶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크리스티네가 안아야 할 위험부담이 너무 크고, 실패 시에 페르디난트가 빠져나갈 구멍은 확실히 마련되어 있다. 그 점에 대해 페르디난트는 자신이 아닌 크리스티네가 우체국 여직원인 이상 그 위험은 감수할 수밖에 없으며, 선택도 책임도 그녀의 몫이라고 못 박는다. 비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