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복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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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게 단편소설을 쓰는 것은 어쩌면 장편소설만큼이나 고된 작업일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긴 호흡을 가져 여유가 생길 수 있는 장편과 달리 단편에서는 한정된 공간 안에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 내야 하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볼 틈이 없다. 특히 추리단편이라면 사건의 시작부터 결말까지 말 그대로 쉴 새 없이 내달려야 한다. 장편만큼 긴 여운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강렬한 인상은 단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이다. 단편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게 되는 애드거 앨런 포의 <도둑 맞은 편지>, 코넌 도일의 단편들, 도로시 세이어스의 <의혹> 같은 작품들은 그야말로 단편 추리소설의 정수를 보여 주는 작품들이다.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이라 불리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단편집인 『잠복』은 그의 소설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본격파 추리소설의 트릭 중심의 이야기에 반발해 등장한 사회파의 거장답게 단편에도 트릭이나 미스터리에 대한 관심 보다는 사람과 사회에 얽힌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작가 자신은 집필 당시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출발점으로 여겨진다고 했는데 각 단편을 읽어 보면 이 이야기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어두운 면과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특히 본 단편집은 추리물이라는 느낌보다 드라마 쪽에 가깝다. 책의 제목과도 같은 단편인 <잠복>의 경우 인간의 숨겨진 본 모습을 형사의 눈을 통해 보여주는 말 그대로의 드라마다. <얼굴> 역시 마찬가지로 추리물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한 범죄도 그것이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물론 사회파라고 해도 추리소설의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마쓰모토 세이초 본인의 『점과 선』도 열차시간표라는 정교한 트릭이 사용되었다.

추리소설은 인간과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해 낼 수 있는 이야기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어려운 범죄를 한눈에 해결해 내는 것이 전부이며 화장실용 문학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몇몇 경험한 바에 따르면―이 있다면 마쓰모토 세이초의 이 단편집을 권하고 싶다. 트릭과 해결이라는 본격파를 선호한다면 이 단편집은 구미에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단편은 <일 년 반만 기다려>였고 불만족스러웠던 단편은 <지방신문을 구독하는 여자>였다. <일 년 반만 기다려>는 인간의 숨겨진 본성을 마지막까지 제대로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생명보험 설계사로 일하는 스무라 사토코는 남편을 죽인 죄로 체포되지만 남편의 폭행과 행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던 아내에게 세상은 동정을 보내고 여성 평론가인 다카모리 다키코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나온다. 이 결과에 만족하고 있던 다카모리 다키코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지방신문을 구독하는 여자>는 이야기 시작은 흥미로웠지만 전개되는 과정이 너무 억지스러운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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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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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는 행위를 개인적인 차원 너머로 확장하여 생각한 적이 없다.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개인적인 읽기일지라도, 비록 그 읽기의 주체가 자각하지 못할지라도 어쩌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한다. 그것은 막연한 희망 같은 것도 감히 품게 한다. 물론 ‘A는 B이고 B는 C이고 C는 D이므로 A는 D이다’로 이르는 귀결이 드러내기 마련인 오류, 아니 전적으로 수긍하기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낯선 논리의 생경함이 느껴지긴 한다. 하지만 다섯 밤 동안 사사키 아타루가 열렬하게, 읽기가 어떻게 혁명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 논증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시간은 행복하고 급기야 황홀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해 문학의 힘을 아직도 믿고자 하는 젊은 철학자의 순수한 열정에 중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문학’은 소설과 시 같은, 우리가 보통 문학이라고 부르는 장르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 그는 책을 읽고 쓰는 것이라면 그 대상인 텍스트부터 기법까지 모두 ‘문학’으로 아우른다(이 책의 마지막에 이르면 문학의 범주는 더욱 확장되어 예술 전반을 아우른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소설가든 철학자든 과학자든 성직자든 누구든 읽거나 쓴다면 전부 ‘문학가’인 셈이다. 그래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도, 이슬람교 선지자 마호메트도, 중세 교회의 수도사들도 모두 문학가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그들 문학가에 대해, 그들이 문학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혁명했는지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일인가?’라고 먼저 자문한다. 그리고 그 자답으로 ‘읽으면 미친다’라는 자기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읽기’와 ‘광기’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책 전체에 걸쳐 줄곧 이야기한다. 우리가 읽었음에도 미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읽기 전에 받아들인 ‘정보’ 때문이다. 텍스트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보다 그 정보에 의거하여 지레 판단하고 차단한다는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순수하고 완전한 읽기’라는 행위를 훼방하는 정보의 부작용을 이야기하기 위해 비평가와 전문가를 예로 든다. 그 구분이 꽤 설득력 있고 재미있다. 그가 말하길, 비평가는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인 반면 전문가는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그 둘은 수평과 수직처럼 분명하게 다른 사람이지만 똑같이 ‘모든 것’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그 환상이 우습고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비웃는다.


사실 인문학적, 혹은 사회과학적으로(적절한 표현인지 잘 모르겠다!) 어렵게 접근하지 않아도, 이런 환상은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눈에 띈다. 가령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모든 화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아는 척 끼지 않으면 혼자 바보처럼 외로워진다. 정치, 연예, 드라마, 영화, 아이돌, 스마트폰, 야구, 올림픽, 기타 등등. 관심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아주 미묘한 취향과 기호에 따라 한정되기 마련이고 어떤 사람은 더더욱 그렇지만, 소위 원만한 사회생활에 동조하려면 내 관심사가 아니더라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부지런히 정보를 모아야 한다. 심지어 연예인 X파일이나 다른 동료의 뒷담화까지도.


사사키 아타루가 말하는 정보의 경계를 명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한 권의 책을 읽는 데 미리 판단하고 경계할 여지가 있는 모든 사전 지식을 의미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날 때도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들으면 색안경을 통해 마음대로 재단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는 무의식적인 ‘검열’ 없이 책과 ‘접속’하려면 완전한 “무지와 어리석음”의 상태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곧 미쳐버리는 일이나 다름없다. 접신(接神)과 마찬가지랄까. 검열은 일종의 자기 방어기제와 같아서, 다른 사람의 무의식이 투영된 생각을 완전하게 읽는다면 내가 온전히 그 사람이 되어버리는 일이므로, 그렇게 한순간이라도 다른 사람의 꿈을 꾸는 일이 일어난다면 도저히 미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읽을 수 없는 책을 끊임없이 읽고 있는 셈이다.


사사키 아타루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언급하고 있는 ‘문학가’들은 모두 읽을 수 없는 책을 읽고서 다시 써낸 사람들이다. 그들은 읽어‘버렸으니’ 목숨 걸고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의 씨앗은 그렇게 싹튼다. 그들은 목숨이 붙어 있다면 읽고, 쓰고, 다시 읽고, 고쳐 쓰고……를 언제까지든 되풀이할 것이다. ‘문학을 읽는 것은 혁명이다’라는 행복하고 황홀한 등식은 이렇게 세워진다(이 등식을 세우기까지 사사키 아타루의 사유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재주는 없으므로, 사실 완전하게 읽어내지도 못했으므로 그의 책을 직접 읽어보길. 아, 그의 말대로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읽을 수 없겠지만. 만약 읽는다면 미치겠지만).


나는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는 ‘보통의 독자’ 수준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그저 흔해빠진 독자들 중 한 사람일 뿐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이 책이 특히 고마웠던 것은, 그동안 무용지물의 향락과 허영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왔던 나의 책 읽기도 380만 년이라는 영원과 같은 시간 안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주기 때문이다. 혁명처럼 거창한 말은 아스라하게 느껴지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세상에서 그 희망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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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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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픽션이다. 픽션은 사실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이나 묘사와는 달리 가공의 인물 혹은 이야기 따위를 말한다. 말 그대로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허구의 세계인 셈이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이것이 허구인지 진실인지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아니 에르노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마치 타인의 눈으로 보는 듯한 글을 쓰는 작가다. 아버지 이야기였던 『남자의 자리』와 어머니 이야기인 『한 여자』를 통해 작가는 남자와 여자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히려 이야기라기보다는 기록을 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객관적이며 군더더기 없는 글이다. 하지만 『남자의 자리』와는 달리 『한 여자』에서는 아니 에르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제법 보인다. 아버지, 남자의 모습을 그나마 객관적으로 들여다봤던 것과는 달리 늘 주위에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동일한 성을 가진 여자로서 이를 거부하거나 공감하게 되는 모습―제목인 『남자의 자리La place』가 ‘자리(원제목)’로 한 발짝 떨어진 모습이라면 『한 여자Une Femme』는 ‘여자’로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제목인 것도 다른 점이다―을 보여 흥미롭다. 책의 말미에 보이는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담담하게 써내려가는 부분은 어머니에 대한 작가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종종 화려한 수사학적인 장치들보다 간단하고 군더더기 없는 글귀가 감정을 더 잘 드러내주기도 한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고리를 잃어버렸다.”(110p)


아니 에르노는 어쩌면 어머니에게 직접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소설의 형식만 빌어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제겐 늘 주위에 있던 어머니였지만 여자로서의 삶은 이런 모습이었지요’라고 말이다. 자식의 눈으로가 아닌 자신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재했던 여자의 모습을 객관적인 타인의 모습처럼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딸에게 자신이 갖지 못한 모든 것을 주었고 더 많이 배우고 세련되어진 딸처럼 되고 싶어 하지만 결국 다른 세계로 떠나버린 듯한 딸을 보는 어머니, 이런 어머니를 부끄러워하게 되는 변해가는 딸의 모습, 결국 『한 여자』는 어머니라는 모습 이전에 인간일 수밖에 없는 한 여자의 이야기, 지극히 개인적이어서 누구나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자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은 픽션이다. 『한 여자』가 삶의 기록 같은 군더더기 없는 글일지라도 소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작가가 언급한 것처럼 “말들을 통해서만 가닿을 수 있는 내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이며 개인적인 기록이 세상 모두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족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접점에, 신화와 역사의 접점에 위치하길 원했기 계획했기 때문이다. 일기가 문학이 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이번에는 내가 어머니를 세상에 내어놓기 위해서 그녀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가 보다.”(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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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 제주 애월에서 김석희가 전하는 고향살이의 매력
김석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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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은 언제나 나를 끌어당기는 소재이지만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는 순전히 ‘김석희’라는 작가의 이름 석 자에 기대어 ‘이 책은 꼭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처음에는 그 이름을 내가 즐겨 읽는 책들의 번역자로 자주 마주치곤 했다. 이후에는 그가 번역한 책들을 일부러 찾아서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을 늘렸다. 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김석희 번역가의 고향이 제주였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가 제주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다시 놀랐다. 그리고 그렇게 놀라는 나 자신이 또 놀라웠다. 책의 판권에는 간단한 학력과 번역서 중심의 짧은 소개글뿐이니 고향이든 무엇이든 그에 관한 개인적인 이야기는 쉽게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가 번역한 책들을 읽으면서 그를 꽤 친밀하게 생각했나 보다.

김석희는 40년 타향살이를 정리하고 제주로 돌아가는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물가에 어린 달’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바닷가 마을 애월에 집터를 마련하고 집을 지었다. 그는 그 과정을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아무것도 없는 너른 터에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집이 근사하게 올라간다. 사진만 봐도 부러움의 탄성이 절로 새어 나오는데 그는 얼마나 설레고 흐뭇했을지.

사실 40년 가까운 세월은 겨우 20년 남짓 살았던 고향보다 타향에 더 익숙해지게 하는 시간이다. ‘타향’이라 하기는 해도 그곳을 굳이 ‘고향’과 분리하는 것이 무색할 만큼 긴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도 고향을 떠올리면 그리움과 설렘으로 심장 언저리가 뜨거워지는 것은, 생애 최초로 자신이 존재했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대상을 공간으로 치면, 고향은 첫사랑인 셈이다. 무엇이든 첫 경험은 쌩하니 잊을 수 없는 법이다. 섬을 벗어나고 싶어 열병을 앓았던 제주 소년이라도.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에는 그렇게 첫사랑에게로 돌아가 이제 소년이 아니라 어른으로 성장기의 추억을 되새기고 익숙한 듯 낯선 친밀감을 새롭게 다져 나가는 고향살이가 담겨 있다. 육지 지인에게 조근조근 써 보낸 편지들(애월 통신)을 묶어 만든 책이라 김석희의 말투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듯하다. 작가가 건네는 육성이 살갑게 다가와서 책장을 넘기는 손이 편안해진다.


지금부터는 여담이다. 지인은 아니지만 독자로 ‘애월 통신’을 읽는 내내 부러움의 눈길을 거두지 못했던 이유는 ‘귀향’ 자체도 내가 바라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도시에서 밀쳐나서 귀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직은 고향에서 살았던 시간이 도시에서 살아온 시간보다 더 길지만, 이 시간들은 곧 반전될 것이다. 그럴수록 어른으로 도시에서 내 삶을 책임지며 살아낸다는 것이 계획보다 녹록지 않은 일임을 절감하게 된다. 일찌감치 예순 무렵의 귀향을 꿈꿨던 김석희처럼 나도 언젠가는 내가 태어나 자란 곳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품고 있지만, 그것이 내 의지로 이루어지지 못할까 봐 두려워진다.


김석희의 귀향이 순조로울 수 있었던 것은 도시와 고향을 가리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번역’이라는 일도 한몫했을 것이다(물론 모든 번역가가 ‘번역’만으로 삶의 경제적 기반을 넉넉하게 꾸려가기 힘들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런데 나에게 더욱 강하게 남겨진 것은 ‘번역’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그는 제주외고 학생들에게 번역에 대한 강연을 하면서 “외국어를 잘한다고 번역을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책 읽는 게 좋고 글을 쓰고 싶거든 그때 번역을 생각해 보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책 읽는 것은 물론 좋고 내가 내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는 못해도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을 도저히 버리지 못하겠으면 번역이라는 길도 있다’는 말로 나에게 속살거린다. 어떤 여자는 ‘돈 되는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내 나이에도 ‘아카데믹한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해 코웃음 치지만, 사실 나는 내년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을 더 즐기기 위해 그 ‘아카데믹한 공부’를 계획하고 있다. 어쩌면 그 공부가 또 다른 글쓰기로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괜히 새로운 희망으로 부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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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비의 기술 1 NFF (New Face of Fiction)
채드 하바크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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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조금 먹은 남자들이라면 어린 시절 어린이 야구 회원에 가슴 설레지 않았던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도 부모님을 졸라 어린이 야구 회원으로 가입해 멋들어진 점퍼와 이것저것 선물을 받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기억이 야구중계를 가끔 볼 때마다 들곤 한다. 때마침 어린이 회원으로 가입했던 년도에 팀이 우승을 해서 보너스 선물까지 받았으니까.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니더라도 야구는 흔히 인생에 비유되곤 한다. 하지만 어디 그렇지 않은 스포츠가 어디 있으랴. 브라질은 축구를 인생에 비유할 것이고 인도는 크리켓을 인생에 비유할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 뭐래도 야구는 미국을 빼 놓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미국인들의 삶 속의 일부이며 자존심이기도 하다. 아버지들이 아들과 캐치볼을 하는 것으로 시작해 아들과 야구장에 자신의 팀을 함께 응원한다. 아들은 야구 카드를 모으고 글러브를 선물받으며 그렇게 또 아버지로 자란다. 채드 하바크의 『수비의 기술』은 야구 이야기이며 야구와 함께 살아온 인생 이야기다.

웨스시티, 조그마한 도시의 대학 야구부 주장이며 포수이기도 한 마이크 슈워츠는 왜소하지만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헨리 스크림섄더라는 유격수를 발견한다. 헨리 스크림섄더는 자신이 외부에서 평가받는 기준으로는 야구를 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인정해 준 마이크 슈워츠를 따라 웨스시티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그곳에서 룸메이트인 오웬을 만나게 되고 동료들의 도움과 자신의 노력으로 점차 천재적인 능력을 보여주며 결국 메이저리그 구단의 러브콜을 받을 정도로 성장하지만 경기 중 룸메이트인 오웬의 머리를 야구공으로 강타하게 되어 긴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또한 그를 이끌어준 주장 마이크 슈워츠는 자신이 지원했던 로스쿨 대학원 진학에 모조리 실패하게 된다.

야구는 굉장히 독특한 스포츠이다. 대부분의 스포츠 경기가 공격과 수비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축구를 예로 들면 공을 가지고 공격을 하다가 뺏기게 되면 바로 수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야구의 경우는 수비를 하면 아웃카운트 세 개가 되어 회가 끝날 때까지 수비만 해야 한다. 결국 수비의 주인공은 투수가 될 수밖에 없다. 스스로 타자를 아웃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헨리의 포지션인 유격수는 타자들이 가장 많이 공을 보내는 코스며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야구장에서 가장 불안한 장소이다. 공이 어떻게 자신에게 날아올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은 늘 그렇지만 인생과 닮아 있다.


스포츠가 소재가 되는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은 스포츠 자체보다는 스포츠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 때문이리라. 『수비의 기술』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정, 사랑, 슬럼프, 진로 등, 야구 이야기를 곁들인 전형적―동성애 관련 코드는 이제 미국의 문화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등장하긴 하지만 오웬과 총장의 동성애 스토리는 당혹스러운 면도 있다―인 미국식 캠퍼스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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