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코츠키의 경우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7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이수연.이득재 옮김 / 들녘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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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쿠코츠키의 경우』를 처음 보았을 때 눈길이 갔던 것은 제목이나 표지가 아닌 띠지였다. ‘2012년 제2회 박경리문학상’이라는 글귀는 외국 작가도 이 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웠다. 박경리문학상은 한국어로 문학 활동을 한 생존 작가가 추천 대상이었지만 올해부터 해외 작가에게도 문호를 개방해 첫 수상작이 되었다 한다. 선정 이유 중 주의 깊게 볼 구절이 “그의 섬세한 펜 아래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파스테르나크 등 러시아 대문호들이 이끈 ‘구원의 미학’이 장엄하게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가족의 해체 후에 다시 재결합되는 과정을 통해 역사와 그 속을 살아가는 개인이 치유되는 구원의 이야기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의 시대를 거치며 소비에트의 가족에 대한 개념은 붕괴되었으며 국가의 이념에 귀속된 작은 집단 그 이하도 아니었다. 울리츠카야는 가족을 타도해야 할 부르주아적 산물로 여기고, 개인과 가족보다 이념을 우선시하며, 이데올로기를 위해 친부를 고발하는 인물을 영웅으로 추앙했던 소비에트 시대를 가족의 가치를 붕괴시킨 ‘배반’의 시대로 보았으며 가족의 복원만이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자행하는 폭력으로부터 개인을 지킬 수 있는 ‘신성한 조직’이자 ‘사랑과 보호의 요람’이며 전후의 시대뿐 아니라 현대에 이르러도 소외와 고독, 존재론적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로 보았다.

쿠코츠키 가문의 파벨은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가족에서 벗어나게 된다. 가문 대대로 의사였던 파벨 역시 산부인과 의사가 되고 혁명과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자신에게 치료받으러 온 전쟁과부 엘레나와 사랑에 빠져 전남편의 딸인 타냐와 함께 가족을 이룬다. 타냐의 친구인 토마의 부모는 불법낙태를 받다가 죽게 되고 파벨은 토마도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피로 이어진 가족이 아닌 만들어진 가족은 서로 배려하고, 싸우고 다음 세대의 가족으로 이어지게 된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서 현재 분리 독립된 러시아 연방에 이르기까지 피의 역사를 가진 나라, 미국 못지않은 다민족 국가의 나라에서 어쩌면 가족은 가장 중요한 삶의 기반일 것이다. 전후와 냉전의 세계를 구원하는 데 가장 중요했던 가족은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세계에서도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사회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는 개인이겠지만 그 개인이 모여 이루는 가장 작은 집단인 가족이야말로 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울리츠카야가 이 절대적 가치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이 본 가족이 붕괴된 국가의 위험을 몸소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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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의 연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6
마누엘 리바스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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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은 국민선거에 의해 수립된 좌파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프랑코는 군부, 종교, 자본가의 연합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전쟁이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프랑코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좌파 정부와 치열한 내전을 치룬 끝에 스페인을 장악하게 되고 전사자 이외에도 수많은 인명을 처형하게 된다. 스페인 내전이 이렇게 확대된 이유는 강대국들과 주변 이익 세력의 개입 때문이었으며 이는 결국 곧 이어 발발하는 재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 되기도 했다.

스페인 내전을 다룬 작품으로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등이 있다. 이들은 작품을 통해 스페인 민중의 힘을 칭송했고 파시스트 정권의 승리에 정의도 패배할 수 있음을 배웠다고 한탄했다. 마누엘 리바스의 『목수의 연필 El Lapiz Del Carpintero』은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의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삶에 관한 조금 더 개인적인 이야기다. 민중의 힘은 위대하고 강한 것이어도 그 속의 개인은 전쟁의 비극에서도 사랑과 증오를 가진 평범한 존재일 것이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고 프랑코의 쪽에 붙은 에르발은 혁명가이자 의사인 다 바르카를 감옥에 쳐 넣고 그를 감시하는 간수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자신이 첫눈에 반해 짝사랑하게 된 여인이자 다 바르카의 연인이기도 한 마리사 때문이다. 마리사와 자신이 연결될 수는 없지만 그녀를 계속 훔쳐보고 싶다는 에르발의 질투와 욕망은 오히려 다 바르카의 생명을 연장해 줄 수 에 없는 이유가 되며 마리사와의 사랑을 계속 이어 주는 역할까지 하게 된다. 에르발은 자신의 손으로 죽인 화가가 가지고 있던 목수의 연필을 우연히 얻게 되고 반복되는 환청과 다른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본래의 자신의 내면이기도 한 '강철인간'과 새롭게 드러나는 ‘화가’라는 두 자아, 에르발은 자신의 두 자아가 서로 대립하며 충돌하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후 다 바르카가 제거 대상에 오르게 되며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흔히들 우리와 닮은 나라를 이탈리아에 비유하곤 하지만 스페인의 근대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겪은 상처와 스페인의 상처는 제법 닮아 낯설지가 않다. 역사의 비극은 어느 나라나 다 비슷한 것일까? 이 책을 읽다 보니 대통령 선거 분위기가 한창인 요즈음 우리나라의 상황과 묘하게 맞물려 흥미롭다. 프랑코의 쿠데타가 남긴 상처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스페인처럼 우리 역시 피를 흘려 이룬 민주주의를 부정한 쿠데타의 상처는 가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역사는 어디나 닮게 마련인가 보다. 프랑코에게도 카르멘 프랑코라는 딸이 있었다는 점까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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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테이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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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케네디는 미국 작가인데도 정작 그의 소설에 처음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 사람들은 프랑스 독자들이었다. 문득 그에게 호기심이 생긴 것은 그런 연유 덕분이다. 프랑스보다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더 많이 사랑받는다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떠오르고. 우리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무엇에 매혹됐고, 프랑스 사람들은 더글러스 케네디의 무엇에 매혹됐을까? 물론 나로서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대표작 『개미』를 진작 읽으려고 했지만 아직도 손에 잡지 못했고, 더글러스 케네디의 열혈 팬도 아니면서 어쩌다가 국내에 출간된 번역서들을 모두 갖게 되어 『템테이션』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콕 짚어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각 나라 고유의 문학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어느 나라든 독자의 저변을 넓히는 데 순문학은 태생적인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특히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문화를 기반으로 탄생한 프랑스 문학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한마디로 더글러스 케네디는 대중에게 팔리는 글, 즉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적당한 재미와 흥미를 자극하며 술술 읽히는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작가이다. 사실 엔터테인먼트 소설 한 권을 읽고서 순문학까지 들먹이는 것은 아주 우스운 일이지만 『템테이션』이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런 소설로, 무겁고 지루하고 머리 아프게 다가오는 책에 대한 부담감을 떨치고 싶은 독자들의 소구점을 정확하게 공략했다는 생각이 든다. 페이지에 쓰인 대로 즐기기만 해도 좋다!

대형 서점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던 무명의 데이비드 아미티지는 상업 매스미디어의 메카 할리우드에서 말 그대로 ‘자고 일어났더니’ 일약 스타 시나리오 작가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자신을 발견한다. 앞으로 어떤 내용이 전개될까?


하루아침에 스타덤에 오른 많은 스타들이 TV 토크쇼에 나와 눈물을 보이며 고백하곤 하는 이야기가 있다. 각자 사연은 다 다르지만 이야기의 얼개는, 대중의 갑작스러운 사랑에 도취되자 초심이 흔들리고 판단력이 흐려져 자만심으로 오만하게 거들먹거리며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게 됐고, 그로 인한 온갖 부작용으로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들어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다는 고백이 공통적이다. 이 고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록 그때 어리석었지만 그같이 값진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으로 성장할 수 없었으리라는 마무리이다. 한때의 잘못이나 실수가 ‘성장’으로 귀결되지 못하면 아름다운 통과의례로 포장되기는커녕 일말의 감동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데이비드가 밟는 행로도 이 얼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데이비드는 먼저 조강지처 루시를 버린다. 아무도 그의 원고를 알아봐주지 않을 때, 그녀는 연극 무대에서 상연되지도 않을 극본을 강독하는 것만으로 그와 사랑에 빠졌다 할지라도. 그가 가정 생계는 아랑곳없이 서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하길 꿈꿀 때, 그녀는 배우의 꿈을 접고 텔레마케터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고단하게 딸과 남편을 먹이고 입혔다 할지라도. 각고의 시간 끝에 데이비드가 마침내 무명의 시나리오 작가에서 한순간에 “유선방송계의 톰 울프, 비범한 작가라는 소수 엘리트 집단,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풍자 코미디 작가”으로 변신했을 때, 루시는 본능적으로 배신의 기미를 알아챈다. “이제 나를 버리겠군. 이제 나를 버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설령 그녀가 홀로 떠안은 경제적 부양에 대한 책임감에 지쳐서 그에게 가시 돋친 말 “시나리오 하나 못 판 주제에 꼭 프로 작가라도 된 듯 말하는 것 좀 보라지”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 할지라도 어차피 그의 배신은 예정된 순서였을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제 꿈만 지킨 사람과, 그가 내팽개친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제 꿈을 포기한 사람 사이에는 결국 자괴감, 피해의식, 불신, 의심, 거짓말 같은 것들이 심연처럼 가로놓일 테니까. 그리하여 데이비드는 더는 필요 없는 루시에게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고, 루시는 자신이 더는 필요 없어진 데이비드를 믿지 못한다.


전형적인 전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데이비드에게서 돈 냄새를 맡은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이 시시각각 계산기를 두드려 그와의 적정 거리를 셈하며 몰려든다. 샐리 버밍엄도 그런 잇속에 재빠른 여자이다. 데이비드 역시 샐리를 사랑하는 데 자기 성공의 후광이 되어줄, 대형 방송국의 엘리트 중역이라는 샐리의 자리를 무시하지는 못한다. 데이비드는 물론 “서로 통한다는 느낌”이 너무나 강렬하고 아내의 날선 독설에 깊게 파인 상처를 제 살처럼 핥아주는 운명의 짝, 영혼의 반려자, 혹은 진정한 사랑을 이제야 만났다고 착각하지만 말이다. 데이비드와 샐리는 도식적으로 첫눈에 (자신에게 ‘더 많은 돈’으로 되돌아올지 모르는 상대방의 화려한 이력에) 반하여 할리우드의 공식대로 “현관문을 넘자마자 급히 상대의 옷을 벗겼다”. 첫눈에 반한 남자와 여자가 방문을 열어젖히기 바쁘게 서로의 육체를 탐하면서 옷을 벗기는 장면은 영화마다 너무 많이 등장하여 관능적인 열기를 농밀하게 뿜어내야 마땅한 광경이 클리셰(cliché)나 다를 바 없이 진부해져 버렸다. 이런 클리셰들은 『템테이션』 전체에 골고루 포진해 있는데, 더글러스 케네디가 이를 의도적으로 이용한 것이라면 영리했다고 해야 할까?


수백 억 달러 갑부 필립 플렉의 초대는 데이비드 (가짜) 성공의 정점을 찍는 듯하다. 하지만 그 초대에는 구멍 숭숭 뚫린 치즈 덩어리로 유인하는 쥐덫처럼 음험한 조건이 있다. 천문학적인 돈, 전지전능해 보이는 명예, 아름다운 아내까지 전부 가진 남자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단 하나, 데이비드의 작가적 재능을 돈으로 사려 한다. 250만 달러는 데이비드가 무명 시절에 썼다가 팔지 못해 낡은 가방 속에 내팽개친 원고의 저작권과 맞바꾸기에 아깝지 않은 거액인 동시에 필립이 그 저작권을 사들이기에 역시 아깝지 않은 푼돈이기도 하다. 그것을 시작으로 데이비드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가로채려는 필립의 음흉한 음모는, 그가 가지고 싶어 미칠 지경이지만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재능을 가진 데이비드에 대한 열등감, 질투심, 시기심으로 고약하게 뒤틀린 장난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데이비드에게는 거액이지만 필립에게는 푼돈인 250만 달러는 그 이상을 의미한다. ‘원고’는 데이비드의 분신이나 다를 바 없으므로 필립은 데이비드를 사는 데 푼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데이비드 자신이 매긴 자기 가치이다. 스스로를 언제든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카리브 해에 있는 사프란 섬, 필립 소유의 “파라다이스”에서 자기 자신을 필립의 푼돈에 팔아넘긴 데이비드가 자신의 다른 원고들까지 필립이 감쪽같이 가로챘다는 사실에 분노했을 때 사실 의아스럽기만 했다. 그 분노의 이유는 자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절망감이나 정체성의 위기의식 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지불돼야 할 경제적인 대가 없이 필립의 협잡으로 자신을 빼앗겼다는 억울함 때문이다. 데이비드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대신 남아 있어야 할 돈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우여곡절 끝에 필립의 마수를 알아채고 반격하면서 데이비드가 빠뜨리지 않은(어쩌면 절대 빠뜨릴 수 없었던) 행위가 자기 값을 250만 달러에서 300만 달러로 올린 것이라는 사실도 그리 놀랍지는 않다. 300만 달러도 필립에게 푼돈이긴 마찬가지일 테지만 데이비드에게는 그것이 성공이다.


승자는 누구일까? 당연히 데이비드는 아니다. 씁쓸하지만 돈으로 한 인간의 인생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아도 아무것도 잃지 않은 필립의 막대한 자본이다. 데이비드는 자기 자신이라 지칭할 수 있는 시나리오들을 모두 부당한 방법으로 필립에게 빼앗기고도 그의 사기극을 폭로하기는커녕, 고작 300만 달러를 위해 ‘세상이 등 돌렸을 때 유일하게 자신을 믿어준 의리파’로 필립을 포장해 준다. 그리고 자본에 굴복하여 자본의 고물을 얻어낸 것을 실리적인 선택이라고 자랑스러워하며 스스로 의기양양해진다. 그런데 그렇게 ‘멋지게 먹인 한 방’은 그저 데이비드의 착각일 뿐, 무엇으로도 흠집조차 낼 수 없는 아성으로 건재하는 자본의 위력에 오싹해진다고 말하면 너무 과장한 것일까? 심지어 더글러스 케네디까지 데이비드의 몰락 원인을 선택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물질적인 욕망을 뿌리치지 못하는 개인이 자초한 탓으로 돌린다. 그 (가짜) 욕망을 부추긴 것은 필립이 소유한 카리브 해 사프란 섬이 상징하는 물질의 파라다이스이다. 그 섬을 ‘파라다이스’라고 묘사한 것은 데이비드이다. 데이비드의 낙원은 “자가용 비행기, 커다란 창문과 통나무 목재 외관이 단층으로 길게 누워 있는 현대 건축물, 그 건물 양끝의 대성당 같은 탑, 자연 바위로 만든 거대한 수영장, 영화도서관, 집사와 소믈리에, 요트, 7천4백만 달러짜리 마크 로스코 작품, 4천2백 달러짜리 의자, 30g에 160달러짜리 캐비아” 등등이다. 피노키오의 장난감 나라 성인 버전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피노키오에게는 그런 가짜 낙원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훈계하면서 왜 우리는 한없이 이끌리는가? 당신의 파라다이스는 어떠한가? 나는 아직 고고한 척하고 싶다. 데이비드에게 다가왔던 것과 같은 유혹 앞에서 전혀 아무렇지 않은 척 외면할 수 있는 여력이 제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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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러면 아비규환
닉 혼비 외 지음, 엄일녀 옮김 / 톨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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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건 음악이건 컴필레이션이라는 모음집 종류들을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다. 여러 작가의 작품집이건 한 작가의 베스트 작품집이건 간에, 대부분의 경우 히트곡의 단순한 모음이거나 유명 작품들 위주로만 꾸며졌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해당 작가의 다른 작품이 번역되지 않았다든가, 미발표 보너스 트랙이 들어 있다든가 하는 이유)를 제외한다면 가능한 모음집은 잘 사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예외가 있는데 특정 목적을 가지고 새로 만들어진 모음집이라면 절대적으로 환영한다. (가장 쉬운 예라면 영화를 위해 새로 만든 노래가 들어 있는 사운드 트랙 같은 것들이다.)

마이클 셰이본이 기획하고 작가로도 참여한 『안 그러면 아비규환McSweeney’s Mammoth Treasury Of Thrilling Tales』은 위에서 말한 특정 목적에 딱 어울리는 작품집이다. 제목처럼 오싹한 이야기를 테마로 쓰인 작품집이다. 참여 작가들의 면면은 굉장히 화려해 공포, 추리, 범죄, 역사, 판타지, SF 등에서 활약하는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 있다. 관통하는 주제인 오싹한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제외한다면 그야말로 ‘장르’ 뷔페 같은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모음집의 가장 큰 장점이겠지만 최소한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하다. 물론 그 장점만큼 모든 작품이 다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는 단점은 있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국내판의 제목이기도 한 닉 혼비와 데이브 에거스, 셔먼 알렉시 등의 이야기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책의 말미에 보면 제작 노트가 첨부되어 있는데 이게 꽤 흥미롭다. 함께 실린 그림들과 함께 읽다 보면 이 책의 기획은 숭배하던 문학에 비해 푸대접을 받았던 펄프픽션(값싼 갱지로 만들어진 통속 잡지인 펄프 매거진에 실린 소설로 주로 통속적이고 자극적인 장르소설이 실렸다)에 대한 재조명이기도 하다. 이 책의 목표는 현재의 유명 작가들이 단편 장르문학을 쓰는 것으로, 과거 위대한 작가들이 위대한 단편을 쓰던 전통을 복구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외적으로 안타까운 점은 책의 제목은 둘째치고라도 펄프픽션이라는 당시의 분위기를 재현하고자 만든 표지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제작 노트에 있는 그림이 책의 원래 표지인데 검은 줄로 그림을 다 가려놓아서 무슨 그림인지도 알 수 없게 해놓았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에 있어서는 가볍고 통속적인 펄프픽션이라기보다는 유명작가들이 작정하고 써낸 이야기들인지라 힘이 들어가 있는 모습이다. 쉽게 읽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점이 있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이런저런 소소한 불만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단편집 자체가 너무 반갑고 즐겁다. 단편과 장르를 즐기는 독자이고 단편 자체를 구경하기 힘든 요새라면 가뭄의 단비 같은 책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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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죽이기
아멜리 노통브 지음, 최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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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제시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어머니에 대한 근친상간적인 욕망을 그리스 비극의 하나 오이디푸스에 빗대어 설명하는 이론으로 수많은 문학 작품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남자 아이에게 어머니는 이성이며 사랑의 대상이고 어머니를 얻기 위해 아버지와 같은 위치가 되려 하고 닮아 간다. 하지만 자신의 성기 제거에 대한 위협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되고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게 되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극복되는 것이 일반적인 성장의 방식이기도 하다.

아멜리 노통브의 『아버지 죽이기』 역시 제목만 보았을 때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따르는 전형적인 소설처럼 보인다. 게다가 뒤표지의 붉은 글자로 된 “모든 사람은 어른이 되기 위해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라는 글귀와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는 작가의 말을 보아도 이런 의심이 더해진다. 아멜리 노통브가 해석하는 아버지 죽이기는 어떤 것일까?

열네 살이 된 조 위프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여러 남자들을 만나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자신이 눈이 맞은 남자를 위해 조를 집에서 내보내게 된다. 쫓겨나게 된 조는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마술을 배우기 위해 유명 마술사인 노먼을 찾아간다. 아버지와 같은 노먼과 조가 사랑하게 된 노먼의 여자 친구인 크리스티나를 만나게 되고 가족처럼 살아간다. 18살이 되었을 때 마약 축제에 가게 되고 크리스티나는 마약에 취해 조와 자게 된다. 이후 조는 그들을 떠나 라스베이거스에 와서 부유한 딜러의 삶을 살게 되고 연락이 뜸해 진다. 불법을 저지르다 잡힌 조와 만난 노먼은 조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고 이는 노먼을 삶에 아주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작가는 오히려 자신의 이야기가 오이디푸스 식으로 해석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은 뒤집혀 있고 역설적이다. 조는 노먼을 만나기 전에, 이미 자신을 선택하고 사기를 칠 것을 원했던 신비롭고 위압적인 한 남자를 자신의 아버지로 인정했다.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이 아닌 아버지에게 선택되는 것을 원했던 것이다. 조가 말했듯이 진정한 아버지는 오래 전 자신을 선택했던 사기꾼이었고 조를 아들로 생각했던 노먼은 철저하게 제 삼자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역설이 되어 버린 이야기는 한 번 더 나아가게 된다. 노먼은 이제 조의 진정한 아버지가 되기로 결심하고 조를 계속 따라다니게 된다. 노먼은 ‘아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아버지가 더 큰 괴로움’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 가지만 아버지 역시 아들을 닮아간다. 조와 노먼은 놀랄 만큼 닮아 있지만 서로에게 매혹되지 못했다. 어쩌면 이것이 지독히 현실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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