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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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기억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 자기를 보호하고 자신에게 좀더 유리하도록 기억하려는 무의식적인 본능과 욕망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기억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시간의 축적에 따라 진행되는 망각도 기억이 불완전해지는 데 일정 역할을 담당한다. 설사 망각 없이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을 지녔을지라도 기억은 필연코 ‘입장(立場)’이라는 개인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편집된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손실 없이 재구성하여 완벽한 진실에 도달하기란 아무래도 어렵다. 그 일이 일어난 순간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놓는다고 해도 그 일에 이르기까지 전후 사정을 알 도리 없이 단편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일에 여러 사람들이 연관되어 있다면 기억의 완벽한 재구성을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은 끝없이 확장된다. 거창하게는 역사가의 기록일지라도 역시 역사관이라는 주관을 배제하기 힘들다. 모든 것을 주관하는 신이 아니라면 애초에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기억의 불완전성은 차라리 축복일지 모른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도 없이’ 살아온 무결점 인생이라면야 ‘신의 기억’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 기억의 한계가 억울하겠지만, 삶과 세상과 욕심이 어디 그처럼 살도록 우리를 호락호락하게 내버려두던가. 무뎌진 기억으로 더듬더듬 떠올려도 여전히 민망하기 짝이 없는 과거사들을 그때의 그 강도만큼 평생 생생하게 간직해야 한다면 그보다 더 곤혹스러운 일이 있을까? 잊고 싶은 일을 잊지 못하는 것만큼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토니 웹스터는 기억의 불완전성에 기대어 예순 무렵까지 비교적 무난하게 살아온 남자이다. 전 애인의 어머니가 남긴 얼마간의 돈과 자살한 친구의 일기장은 이제 그가 자기 기억의 오류에 대해, 자기 기억의 구멍에 대해 자각하도록 요구한다. 그 난데없는 유품은 망각의 어렴풋한 장막 너머에 밀쳐둔 자신과 전 애인 베로니카와 친구 에이드리언의 삼각관계를 새삼스레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되어준다.


표면적인 사실만 건조하게 나열하면 이렇다. 토니와 베로니카가 사귀었다. 토니가 친구들(에이드리언 포함)에게 자기 애인이라고 베로니카를 소개했다. 토니와 베로니카가 헤어졌다.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이 사귀었다.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 이 네 문장이면 충분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문장과 문장, 심지어 단어와 단어 사이에도 토니와 베로니카가 사귄 일이 어떻게 에이드리언이 자살한 일로 귀결되는지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기억들이, 혹은 토니가 되살리고 바로잡아야 할 기억들이 무수히 빠져 있다.

그 일련의 일들이 이후 토니의 삶에는 별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지만 베로니카의 삶에는 치명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토니는 잊을 수 있었지만 베로니카는 잊을 수 없었다. 베로니카에게는, 그때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존재와, 그 인과관계를 끊임없이 반추하게 하는 기록이 남겨졌기 때문이다. 기억의 구멍 속에는 토니가 대수롭지 않게 여긴 편지 한 통이 있다. 처음에는 제대로 기억해 내지도 못한. 별안간 날아든 에이드리언의 편지를 통해 친구인 그와 베로니카가 사귄다는 것을 알게 된 토니가 답장을 보낸 것이다.

이 답장의 내용은 나중에 토니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난폭한 저주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그런데 자신과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전 애인과 친구가 사귄다는 것을 당사자들에게서 듣게 된, 게다가 두 사람의 야릇한 감정이 자신과의 연애 기간 중에 싹트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게(혹은 오해하게) 된 남자가 질투심과 배신감과 치기에 사로잡혀 홧김에 편지로 저주의 폭언을 퍼부은 것은 사실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받을 만한 일이다. 천인공노의 죄로 일변하는 것은 이 편지가 토니는 까맣게 몰랐지만 이후에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일어난 일들의 모든 시작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전히 토니의 잘못이라고 그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베로니카를 믿지 않은 에이드리언의 마음과, 이성을 잃은 친구의 폭주에 따라 행동한 그의 판단도 미심쩍다. 그런 편지를 받고서 마음 한 켠이 못내 찜찜하긴 했을 테지만. 에이드리언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결말을 불러온 그 일에 대한 책임에서는 누구 한 사람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다만 당사자인 에이드리언은 죽었고, 베로니카는 그 죽음에 사로잡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여전히 지옥 속에 살고 있으며, 이제 남은 사람은 토니뿐이다. 토니는 그 일에 대한 기억의 불완전성과 그 일 이후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덕분에 그 일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그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도 이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고, 성근 기억의 오류는 바로잡히고 구멍은 메워졌으며, 별일 없이 살 수 없다.


그래도 여전히 이 소설에 ‘신의 기억’은 없다. 이 소설에서 일어난 어떤 일이든, 그것이 먼 과거이든, 가까운 과거이든 서술자인 토니가 ‘선택, 편집, 조작, 왜곡, 망각’이 필연적인 ‘기억의 한계’를 지닌 인간임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과 사람이 맺은 관계와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에 대해 자명한 진실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완전무결한 진실의 정체는 한순간에 모호해진다. 그리고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된다. 이 소설을 읽은 기억을 토대로 남기는 내 감상문까지. 우리에게 최대한 허용될 수 있는 것은 가장 진실에 가까운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불과’라는 말은 잘못됐다. 그것에 도달하는 것조차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걸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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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남자의 문제
하워드 제이콥슨 지음, 윤정숙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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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만큼 다른 나라의 것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없는 것 같다. 인간의 감정이야 만국 공통의 것이긴 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인 슬픔과는 달리 유머의 방식은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식 유머, 영국식 유머라는 말을 흔히 하는 것만 보아도 나라마다 웃음에 대한 포인트를 잡아내기가 쉽지는 않아 보인다. 어디 이뿐이랴. 문화, 성별, 인종, 나이에 따라 받아들이는 유머는 모두 다 다르다. 요새 개그 프로를 보며 시끄럽다고만 하시는 부모님들을 떠올린다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이런 것이다. 외국 영화관의 한 장면을 상상해 보자. 분명 영화는 슬픈 장면인 것 같은데 관객들은 그걸 보며 웃고 있는 것이다. 하워드 제이콥슨의 『영국 남자의 문제』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43년 부커상 사상 최초의 유머 소설!”이라는 띠지의 글귀가 무색할 정도로 책을 읽다가 웃게 되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영국 남자의 문제』는 상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두 남자, 샘과 리보르. 그리고 아무것도 상실할 기회조차 없는 남자 줄리언. 결혼에 관한 흔한 농담 중 이런 게 있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해보고 후회하는 편이 낫다’라는 말이다. 샘과 리보르는 평범한 비극을 겪는 남자들이다. 평범하다고? 그렇다. 평범한 비극이다. 결혼을 해서 살다가 아내나 남편을 잃는 평범한 비극 말이다. 줄리언은 이런 평범한 비극이 갖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잃을 만한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 잃어버리고 상심할 정도의 사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것이 더 큰 아픔일 것이다. 게다가 줄리언은 유대인이라는 끈끈한 유대감으로 묶인 두 남자―특히 줄리언이 붙인 유대인이라는 의미의 핑클러는 샘 핑클러에게서 따온 것이다―에게 또 다른 부러움을 느낀다. 결국 줄리언은 이런 욕망 때문에 샘의 아내와 불륜의 관계까지 맺게 된다. 줄리언은 끊임없이 상실을 느끼지만 늘상 경계에 서 있다. 상실감을 느낄 수 있는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도 들어가지 못했고 영국인이면서 영국 주류 사회에 편입하지 못하고 유대인들의 작은 사회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만 결국엔 그는 여전히 소외된 영국 백인일 뿐이다. 이런 줄리언과는 달리 유대인인 샘은 자신이 핑클러인 것을 증오한다.

비록 이 책이 ‘유대인의 문제(The Finkler Question)’라는 제목을 가졌긴 해도 직접적인 의미보다는 유대인이라는 사회에 대한 메타포로 사용될 뿐이다. 사실 줄리언의 삶이 곧 우리의 삶 아니던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해 열망하고 속하지 못한 곳에 있고 싶어 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인의 욕망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것들을 부정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샘 핑클러 역시 고전적인 메타포이다. 『영국 남자의 문제』는 띠지처럼 유머스럽지도 않고―물론 유머의 기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니다. 나이를 먹고 과거를 이야기할 때 웃게 되는 그런 웃음이 있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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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오래
에릭 오르세나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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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사랑에 대한 믿음을 아직도 고수하기에는, 그동안 사랑이 돌변하는 순간들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너무나 많이 목격했고, 또한 사랑의 자명한 변질을 별다른 이견이나 반발 없이 수긍해 왔다. 그러나 단 하나, 여전히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의 반칙이다. 나는 사랑의 온갖 형태 중에서 에로스만큼은 단둘의 독점적인 감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남녀의 관계가 ‘결혼’이라는 법적 제도로 구속되어 있든 아니든 일단 사랑이라는 감정을 공유했으면 서로에 대한, 그리고 그 감정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줘야 한다. 사랑이 변했다면 그 사랑의 대상과 먼저 이별한 후 다른 사랑으로 옮겨 가야 한다. ‘양다리’나 ‘불륜’에 호의적일 수 없는 것은 사랑을 두고 반칙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이었던 사람도 사랑인, 혹은 사랑일 사람도 동시에 농락하는 일이다. 어떤 사연이든 과거형 사랑과 현재형 사랑을 이기적으로 저울질하는 욕심일 뿐이다. 내 감정이 정리됐다면 상대의 감정도 정리돼야 그 사랑은 마침내 끝나 추억으로 영면한다.

그런데 에릭 오르세나가 『오래오래』에서 불륜 남녀를 내세웠다. 가브리엘과 엘리자베트가 아무리 자신들의 감정을 전설적인 사랑으로 승격시키고 싶어도 불륜이라는 사실이 가려지지는 않는다. 엘리자베트가 자신의 지난 사랑을 정리하지 않는 한 말이다. 엘리자베트는 지금 가브리엘을 사랑하지만, 이젠 에로스의 감정으로 자신을 조금도 동요시키지 못하는 남편과 사랑스러운 두 아들이 함께하는 결혼 생활도 포기하기 싫어한다. 가브리엘과, 사랑 앞에 숙맥인 그를 위해 사랑의 코치를 자처하는 두 노부인에 따르면 엘리자베트는 가슴속에 ‘법도’를 품고 사는 ‘여왕’ 유형의 여자이다. 그 법도라는 것이 굉장히 모순적이고 편의적이라 엘리자베트는 입말로는 자기 가정을 떠날 생각이 없음을 단언하면서도 속말로는 가브리엘이 사랑의 납치를 감행해 주길 열망한다. 비록 사랑이 끝났을지라도 결혼의 서약은 먼저 깨지 않겠다는 의지는, 엘리자베트에게는 남편에 대한 의리이자 아이들에 대한 모성애이지만, 다른 남자와 바람나서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간 불륜녀로 비난받고 싶지 않다는 이기심의 발로로 비쳐진다. 즉 엘리자베트의 법도는 자의로는 결코 깨뜨리지 않겠지만 타의로는 기꺼이 깨뜨려진다.

가브리엘은 그런 엘리자베트의 이중적인 법도에 진저리 낼 법하건만 오히려 이해하고 존중한다. 사실 가브리엘 자신이 양다리든 불륜이든 가림 없이 요란하고 파란만장한 사랑으로 몸살을 앓아온 집안의 강력한 유전적인 내력에 굴하지 않고서 평범하고 소박하게 법도를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 노심초사해 온 사람이다. 차가운 겨울날, 파리 식물원에서 새빨간 후드 코트를 입고서 뜨거운 입김을 내뿜는 엘리자베트에게서 숙명적인 사랑을 감지하기 전까지는.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지만 자기 평생의 유일한 사랑이 이제야 찾아왔음을 첫눈에 알아본 가브리엘은 그동안 성실하게 지켜온 가정과 법도를 미련 없이 버리고 엘리자베트에게 전념한다. 가브리엘이 아내에게 이별을 고하는 방식도 현실이라면 그리 이해받을 만하지 않지만, 그는 적어도 과거의 사랑과 미래의 사랑을 동시에 기만하지는 않는다. 가브리엘은 지난 사랑과 작별하고 새로운 사랑과 인사한다.


가브리엘도, 남편 B도 그럼에도(가브리엘은 그녀가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자기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남편 B는 그녀가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 자리도 새로운 로맨스도 전부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리하여 그녀의 사랑에 대한 기대를 좀체 내려놓지 못하고서 나 아닌 다른 남자와 그녀를 공유해야 하는데도) 사랑할 만큼 매혹적이라고 그려지지만 ‘나쁜 여자’ 엘리자베트 때문에 그들의 사랑을 응원할 마음이 도무지 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전설’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어 실소를 머금게 한다. 그것은 그들도 자신들의 사랑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는 반증이다. 흔해빠진 불륜 커플의 행렬에 끼이지 않으려면 그들의 사랑을 특별하게 가꾸어 전설화해야 한다. ‘불륜을 전설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의 첫 단계는 아이를 만드는 일이다. 그 아이는 그들의 관계를 오늘 하룻밤이 아니라 영원하고도 공고하게 이어가도록 해주는 동시에 훗날 문학적인 사랑으로 기록해 줄 것이다. 그들은 아이를 잉태하는 밀회의 장소로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세계 최초의 소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소설” 『돈키호테』를 완성한 도시 스페인의 세비야를 선택했다. 어디 그뿐일까, 그렇게 “금기의 사랑을 용서하고 정당화하고 찬양할” 사명을 부여받고 태어난 아기에게 세상에서 가장 긴 이름을 붙여준다.


“미겔, 로렌스, 앙리, 오노레, 귀스타브, 찰스, 마르셀, 루이페르디낭, 버지니아, 어니스트, 블라디미르, 가브리엘, 알바로, 조르주”


이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정체가 짐작되는가. 부모의 불륜을 전설적인 사랑으로 형상화해 줄 아기의 수호성인으로 엘리자베트와 가브리엘이 “세계적인 이야기의 달인”들을 엄선해 준 것이다. 아기의 범상치 않은 이름은 그들에게서 하나씩 따왔다. 이를테면.


“미겔 데 세르반테스, 로렌스 스턴, 스탕달(본명 마리앙리 베일), 오노레 드 발자크, 귀스타브 플로베르, 찰스 디킨스, 마르셀 프루스트, 루이페르디낭 셀린, 버지니아 울프, 어니스트 헤밍웨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알바로 무티스, 조르주 심농”


소설을 좋아한다면 언제 어디에서건 곧잘 마주치게 되는 이 대단한 면면들은 에릭 오르세나가 흠모하는 작가들일까? 알바로 무티스는 『마크롤 가비에로의 모험』이 번역된 덕분에 최근에 그 이름이나마 알게 된 작가이고, 루이페르디낭 셀린의 『밤 끝으로의 여행』은 제발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으면 좋겠다. 아무튼 이쯤 되면 그 노력이 가상하여 엘리자베트는 얄미워도 가브리엘을 떠올려 그들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래 뭐, 소설이잖아’로 타협하면서.


『오래오래』는 ‘불륜을 전설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의 첫 단계부터 마지막 단계까지 꼼꼼하게 기록한다. 처음부터 소설 속 주인공이자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가브리엘이 의도한 대로 혼외정사의 반칙과 치욕은 “140번의 이별”에도 불구하고 “141번의 재회”로 오랜 세월 이어진 숙명적인 사랑의 영원한 전설로 씻겼다. 뒤늦게 서로에 대한 정념으로 불붙은 유부남 가브리엘과 유부녀 엘리자베트를 그렇고 그런 불륜의 행렬에서 끌어내어 아름다운 환상으로 거듭나게 하는 데는 그 사랑의 배경인 ‘정원’만큼 주효한 장치가 없다. 파리 식물원의 고산식물 정원부터 베르사유 정원과 그곳 왕의 채원, 세비야 알카사르 궁전의 정원, 시싱허스트 캐슬 가든, 일본식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 벨기에의 여러 정원들, 베이징의 원명원까지 그들의 불륜이 시작되고 사랑으로 완성되기까지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세계 곳곳의 환상적인 정원들이 에로스의 기운을 진하게 뿜어낸다. 다채로운 이력들 중에서 국립고등조경학교 학장을 지낸 작가답게 정원에 대한 묘사는 매혹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지경이다. 그것만 내세워도 이 소설의 매력으로는 손색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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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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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 많은 어르신들이 TV에서나 주위에서 우리에게 이런 말을 종종 하시곤 한다. “내가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하면 책이 몇 권은 나올 거야.” 이 말은 당신들의 삶이 굴곡도 많고 순탄치 않았음을 탄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드라마나 영화에서의 삶도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자신의 삶 역시도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구나 하는 의미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아니 에르노는 그런 작가이다. 온몸으로 픽션을 거부하며 자신의 삶 자체를 이야기하는 작가. 지극히 자전적이며 내면적인 소재에 몰두하여 “내면적인 것은 여전히, 그리고 항상 사회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순수한 자아에 타인들, 법,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소설은 픽션(허구)이다. 하지만 그것이 픽션이라고 해도 거짓으로 채워진 것만은 아니다. 어떤 픽션이건 작가 자신의 삶이나 사상은 그의 글에 투영되기 마련이며 이것과 허구의 절묘한 결합이 바로 소설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이야기는 허구를 최대한으로 줄여 자신의 이야기를 극대화한 자전적인 글쓰기를 한다. 특히 『남자의 자리』에서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삶을 담담한 투로 너무나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픽션스러운 것들을 선호한다. 아니 에르노의 이야기 스타일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국내 작가들(특히 여성 작가들)의 자전적인 독백 형태의 글을 너무 많이 읽은 탓이라고 할까. 이런 의심은 책의 뒤에 실린 배수아의 “어쩌면 작가들을 사로잡는 가장 큰 영감은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기원에 관해 ‘진짜 일인칭’의 글을 감히 쓰고자 하는 데서 출발한다”라는 글을 읽고 더욱 확실해졌다. 나는 진지하기만한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어쨌거나 잘 만들어진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아버지를 기록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아름답게 미화되거나 상처로 깊어진 기억이 아니라 역사의 일부분처럼 아버지를 기록하기, 『남자의 자리』에서 아니 에르노의 최대한 감정이 배제된 기록일지라도 책에 공감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내가 아버지를 바라보는 모습 역시 크게 다르지 않으며, 우리들 삶의 아버지 역시 이야기 속의 아버지와 닮은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남자의 자리가 아닌 가족의 한 부분으로서의 자리이다.


나이를 먹고 자신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 볼 시기가 되면 이 책은 더 무거운 의미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자리가 아니라 나의 자리, 남편의 자리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테두리 속의 일부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 안의 내 삶에 대해서 더 깊게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곧 나 자신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반증인 것 같아서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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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아래 봄에 죽기를 가나리야 마스터 시리즈
기타모리 고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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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의 꽃은 역시 탐정이다. 오귀스트 뒤팽을 시작으로 전형적인 탐정의 모습으로 너무나도 잘 알려진 셜록 홈즈나 에르큘 포와로 같은 천재형 탐정(일본 쪽이라면 당연히 긴다이치 코스케와 아케치 코고로)과, 어쩐지 그 후계자 격으로 느껴지는 젊은 느낌의 엘러리 퀸은 물론 두뇌보다는 거친 현실에 온몸으로 맞서는 하드보일드 계열의 샘 스페이드와 필립 말로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탐정들이 이야기 속에서 살아 숨 쉬지만 탐정들 계열 중 가장 특이한 모습이라면 역시 ‘안락의자 탐정’이 아닐까 싶다. 안락의자 탐정이란 말 그대로 안락의자에 앉아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추리를 하는 어쩌면 탐정 쪽 궁극의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쪽 계열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는 미스 마플―의외로 행동파의 모습도 보여주지만―이 있으며 가장 인상적이면서 기괴한 모습을 보인 『구석의 노인 사건집』의 이름 모를 노인이 떠오른다.

이처럼 탐정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은 이유는 지금 소개할 기타모리 고의 『꽃 아래 봄에 죽기를』에 등장하는 구도 데쓰야 때문이다. 구도는 맛있는 요리가 나오는 작은 맥주 바 가나리야의 마스터인 동시에 안락의자 탐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단골손님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사건을 추리―명쾌한 결론을 짓지도 않고 자신의 의견일 뿐이라는 말을 꼭 덧붙이는 장치 등으로 탐정의 모습을 최대한 희석시키고 있다―하고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는 모습은 또 색다른 탐정을 만났다는 즐거움이 크다. 여섯 가지 이야기가 연작 형태로 포함된 이 책을 읽다 보면 탐정의 특별한 모습 이외에도 이야기 자체에서도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꽃 아래 봄에 죽기를」과 마지막 「물고기의 교제」는 하이쿠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경우처럼 보통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하이쿠나 전래되는 노래들을 보면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하이쿠와 일기의 경우 사건 발단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책의 제목이기도 한 가슴 시린 이야기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게 된다. 이런 점뿐만 아니라 다른 이야기들도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단편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책에 실린 다른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느낌은 확실해졌는데 「가족 사진」이나 「마지막 거처」는 물론 다른 작품들 역시 구도의 추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상 미스터리라는 범주에 넣기에도 추리의 느낌은 옅다. 전통적인 추리소설을 기대한 독자라면 실망스럽겠지만 추리의 요소가 입혀진 단편소설을 읽는다는 기분으로 접하게 되면 굉장히 즐거운 작품집이다.


안타깝게도 작가가 이른 나이에 타계하여 많은 작품을 쓰진 못했으나 기회가 된다면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다. 처지는 달랐지만 병사한 작가의 죽음에 첫 이야기의 주인공이 오버랩되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하이쿠의 구절이 떠오른다.


“원하건대 꽃 아래 봄에 죽기를

그 추운 음력 이월의 보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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