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강박 혹은 카펫 무늬
바다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권영주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어느 영화에 깔린 복선과 설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개연성과 작품성을 비판하는 관객이 있다고 하자. 잘못은 있는가? 누구에게 있는가? 여러 답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일반론으로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라고 말할 듯 싶다.

그래서 이런 글 (링크)을 봐도 어쩔 줄 모르고 고민만 되풀이하게 된다. 이 글에 대해 몇 가지만 덧붙여 보도록 한다.



1 "고요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동화풍 이야기에서 따뜻한 감동의 밀도를 높여야 한다는 강박"과 "인위적인 부자연스러움"


저 글쓴이의 말처럼 작가에게 그런 강박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대개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움'과 오가와 요우코 (小川洋子)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일단 다르다. 예술 철학에 있어 '미'는 대상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대상과 함께 그것을 감각하는 주체가 요구된다. 그렇다면 보편적으로 일컬어지는 '아름다움'은 대중의 호오와 크게 관련 있다고 봄이 명백하다. 오가와 소설에서 나타나는 '미'는 여기서 좀 벗어난다. 대중의 보편적인 취향과 가리키는 방향이 다르다.

'동화풍 이야기'라는 말도 이상하다.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의 말을 빌리자면, 오가와 소설은 분명히 동화풍 이야기 카테고리에도 들어갈 수 없다. 오히려 마술적 사실주의나 환상문학에 가깝다. 이런 분류에 속하다 보니 인위적인 부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기묘함에 불평하는 것은 물론 자유이나, 이유없이 싫어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바다」에 관해서


'나'에 의해 소개되는 이즈미 (泉) 씨의 가족은 평범해 보인다. 저마다의 특징이야 없을래야 없을 수 없지만, 치매 기가 있는 할머니나 공무원 아버지는 어느 가정에 있든 이상해 보이지 않아서 이들이 보편성에서 떨어져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가와는 이러한 일상적인 서사에 신비하고 기묘한 색채를 곧잘 섞어낸다. 이것은 그러한 특수성이 자연스럽게 녹아든다는 말이 아니다. 환상문학적 특성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 버섯들 사이에 숨어 있는 독처럼, 단 하나의 요소로 완전히 다른 결말로 이끌려 간다.


"독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주의하시구려"


이즈미 씨네 할머니가 말했듯 이 작품에서 "독"으로 작용할 수 있는, 진정으로 특이한 인물은 '꼬마 동생'이다. 그에 의해 세계가 뒤바뀌고 무너져 내린다.

그가 '꼬마 동생'인 이유는 덩치에도 불구하고 지적 능력이 꼬마에 머물러 있어서임이 아마 틀림없어 보인다. 묘사되기로도 그는 인간 사회보다 동물들의 규칙에 끌리는 듯하다. 죽음과 삶과 같은 원초적 행위를 바라보며 일차원적 욕망을 희구한다. 어린 아이들이 대체로 그렇듯 탄산 음료를 좋아하고, 아끼는 물건은 자신만의 장소에 보관한다. 애덤 스미스가 지적한 인간 사회의 원동력인 탐욕은 결여되어 그런 자신의 보물을 쉽게 내어주기도 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회적 합의 같은 말과 별 상관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비문명적으로 읽힐 수 있는 그의 아이덴티티는 이윽고 명린금 연주를 통해, 그리고 그 실체가 밝혀짐으로써 부정적 이미지를 벗는다. 이 몽환성 넘치는 문학적 장치가 문명과 반문명 양 극단에 대한 예찬 없이도, 그 바다의 소리만으로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있을 수 있는지 알려준다. 이런 깨달음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음은 매우 자명하다.

명린금과 같은 기괴하고 독특한 motif는 오가와 소설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서정성과 가장 잘 어우러진 사례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침울함이 살짝 깃든 간결한 문체, 죽음을 은밀히 드러내는 각종 메타포 등 논해 볼 게 다양한 작품인데, 그건 기회가 닿으면 하도록 하고 피곤하니까 여기서 마치기로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