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인시공 - 책 읽는 사람의 시간과 공간
정수복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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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면 디지털 세계의 포맷에 관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디지털로 대체 가능한 것들이라면 딱히 큰 거부감을 느끼지도 않을뿐더러 가끔은 관리가 편하다는 생각도 자주 드니 말이다. 예전의 두툼한 패키지로 구매하고 뿌듯했던 게임들은 온라인 다운로드로 완전히 대체되었고, 비틀즈가 아이튠즈에 들어간 이후로 음반 역시 디지털로 전환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 중이다. 이 정도로 관대한 나여도 책만큼은 이런 생각이 쉽사리 들지 않는다. 패키지로 하는 게임과 다운로드해서 하는 게임의 차이―두툼한 패키지가 주는 풍성한 느낌은 재현할 수 없겠지만―는 없고, 휴대용 CDP와 MP3플레이어로 듣는 음악은 차이―오디오라면 차이가 있지 않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좋은 DAC과 스피커와 무손실의 소스가 있다면 PC-FI에서도 좋은 소리를 들려준다―가 없지만 가장 비슷하다는 전자잉크로 된 이북 기기들이라도 책과는 느낌이 다르다.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읽어야 하는 책은 그 느낌 자체를 디지털 기기들이 충족시켜 주기 힘든 탓이다. 디지털이 아무리 편리하고 쉽고 아날로그와 비슷해진다고 해도 몸으로 느끼는 감성은 절대 충족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서점 구경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책에 관한 책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에 놀라곤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독서일기가 그렇고, 서재 이야기, 서점 이야기, 수집 이야기까지 소위 독자라는 사람들은 책의 내용 뿐 아니라 책을 둘러싼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은가 보다. 이런 게 동류의식이라는 걸까? 정수복의 『책인시공』은 ‘책 읽는 사람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소제목처럼 책 자체와 그 책을 읽는 행위에 관한 이야기다. 책을 열면 독자권리장전이 처음 등장하는데 독서할 권리, 독자의 권리는 기본권을 주장하는 글인데 이게 재미있다. 개인적으로는 9번인 ‘많은 사람이 읽는 책을 읽지 않을 권리’에 공감하는데 책뿐 아니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억지로 유행하는 것을 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기도 하다. 이후로는 집 안의 거실 소파부터 집 밖의 여객선, 병원, 감옥까지 책에 관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온갖 이야기들이 파리에서 직접 찍은 독서가들의 사진과 함께 흥미롭게 펼쳐진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독서 시공간이라면 주말 전날 밤의 침대가 좋겠다. 다음날은 휴일이니 늦게까지 책에 빠져도 부담도 없을 것이고 졸리면 책을 든 상태로 그대로 잠들어도 좋을 것이다. 이 얼마나 느긋한 밤일까. 집 밖이라면 어떨까? 카페에서 책 읽는 게 가장 상상하기 쉽겠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기차다. 살짝 덜컹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창밖으로 흐르는 경치를 두고 책을 읽다 보면 먼 곳이라도 즐겁게 이동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이유로 장정일은 기차 독서의 참맛을 아는 작가다. 독서는 한없이 자유로운 것이다. 아무 때나 아무 곳이나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게 독서다. 작가는 독서의 권리라는 말로 독서의 자유를 이야기한다. 이 책을 다 읽었다면 주위를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편한 자리를 잡고 책을 펼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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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이펙트 - 인류 탄생의 과학적 분석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0 그레이트 이펙트 1
재닛 브라운 지음, 이한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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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진화론과 창조론이라는 단어의 사용에 대한 부분이다. 이론(理論)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사물의 이치나 지식 따위를 해명하기 위하여 논리적으로 정연하게 일반화한 명제의 체계. 2. 실증성이 희박한, 순관념적으로 조직된 논리.] 당연하게도 진화론은 1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반해 창조론의 경우 2의 의미로 사용된다. 엄밀히 말하면 창조론이라는 단어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으나 창조론자들의 경우 2가 아닌 1의 의미로 사용되기를 원한다는 점이 문제다. 영문으로 보면 더욱 확실한데 진화론이 ‘Theory of evolution’인데 반해 창조론의 경우 ‘Doctrine of creationism’이다. 창조의 교리 정도가 알맞을 것이고, 간단하게는 창조 교리나 창조설이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종교인이거나 창조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부분마저도 문제가 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과학이 아닌 믿음의 영역인 종교를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순간 이런 말도 안 되는 논쟁거리마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사용되는 창조론이라는 표현도 2의 의미를 사용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진화론은 찰스 다윈의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이 학설은 종교적인 교리에 회의적인 사상을 품고 있었던 당대의 과학자들이 인식하던 것이었고, 다윈과 같은 시기에 자연선택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던 과학자도 있었다. 이처럼 진화론은 당시 시대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산업이 발달하고 모더니즘이 만개한 시절에 지식인들은 과거의 자연신학이 아닌 새로운 인간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윈과 명망 있던 지인들은 다윈의 이론에 큰 힘을 주었고 이것 또한 다윈의 진화론이 넓게 알려진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재닛 브라운의 『종의 기원 이펙트』에서는 세상을 바꾼 종의 기원과 다윈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들려준다. 마지막 장인 「유산」에서 다윈 사후 진화론을 둘러싼 흥미로운 역사가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찰스 다윈과 당대의 과학자들이 주창한 진화론은 2013년에 이르러도 논란이 되고 있다. 창조론자들은 온갖 정력을 진화론은 공격하는 데 쓰고 있다. 복잡한 생명의 기원―진화론이 생명의 기원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닌데도―에 대한 의문을 표한다거나 과학적으로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된 것처럼 보인다. 우스운 것은 설혹 진화론에 오류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창조설에 대한 증거가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진화론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교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자연적으로 진화론은 사라질 것이다. 만약 진화가 자연선택이 아닌 대기의 농도에 의한 것이었다고 증명된다면 진화론은 폐기될 것이다. 그게 과학이니까. 하지만 창조설은 창조주가 대기의 농도를 조절했다고 할 텐데 이것을 과학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창조론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왜 ‘Theory’가 아닌지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진화론이 왜 ‘Doctrine’이 아닌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진화는 여전히 관측되며 증명 가능할 뿐더러 수정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종교와 과학은 서로의 영역이 겹쳐서도 안 되고 겹칠 수도 없는 부분이다. 굳이 종교를 과학의 이름으로 연구하겠다면 자연과학이 아닌 사회과학에서 연구해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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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터의 고뇌 창비세계문학 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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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책장수들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까? 말 그대로 책 외판원들 말이다. 이런 책장수들은 돌아다니며 백과사전, 문학전집들을 팔곤 했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위해 흔쾌히 지갑을 여는 경우도 많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책장에 문학전집이 꽂혀 있던 집들도 제법 많았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렇게 꽂혀 있는 책들을 보고 있자면 호기심에서라도 한 번쯤 꺼내 보기 마련이다. 엉성한 번역과 고전의 지루함 덕분에 문학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질 수도 있을 것이고, 의외로 재미를 붙였던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제목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빼들었던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어쨌거나 이런 전집류라면 클래식들을 빠짐없이 모았다는 것인데 반드시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작품이 하나 있다. 바로 그 유명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일 것이다. 비록 작품을 읽지 않아도 유명세 덕분에 너무 친숙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라니.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파헤치는 느낌이 들 정도의 변화다. 작품 해설의 번역의 문제라는 부분을 읽어보면 이런 변화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우선 베르테르가 베르터로 변경된 것, 이것은 꾸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독일어 본래 발음과 동떨어진 ‘베르테르’라는 잘못된 표기가 여전히 통용되었던 것을 바로잡은 것이라 한다. 아무래도 과거 일본어판을 중역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거나 외국어 표기법상의 변경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당장 익숙하지는 않지만 당연히 변경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다음으로는 슬픔이 고뇌로 바뀐 부분이다. 소개글에서는 ‘슬픔’이라는 단어는 주인공을 죽음으로 몰아간 처절한 감정을 담아내기에 다소 부족하기도 하고, 이루지 못한 사랑에서 비롯된 괴로움 말고도 신분 차별에서 오는 모멸감, 갑갑한 사회 환경에서 오는 권태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음을 고려하여 ‘고뇌’를 번역어로 선택했다는 글이 있다. 하지만 슬픔이라는 단어가 처절한 감정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한 것처럼 고뇌 역시 처절한 사랑의 감정을 담아내기에는 만족스러운가 하는 의문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슬픔보다는 젊은 베르터의 심정을 담아내기에는 적당한 듯하다. 어디선가 베르터의 비탄으로 번역된 것을 보았는데 비탄이라는 단어가 생경하긴 하지만 더 어울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쨌거나 창비의 이 시리즈가 기대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 역시 고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이야기 역시 젊은이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의 한 원형을 보여준다. 로테라는 운명적인 사랑의 여인을 만났지만 이미 그녀에게는 약혼자가 있는 상황이었고, 둘은 서로를 알게 될수록 사랑이 싹트는 사이가 되고 만다. 로테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약혼자인 알베르트와 친분을 쌓는 베르터, 그리고 계속되는 로테에 대한 절망적인 사랑의 이야기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는 이후 수없이 변형되는 이야기의 본질적인 느낌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진심이 담긴 사랑은 언제나 고통과 슬픔을 동반한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면야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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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없는 꿈을 꾸다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사상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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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 중에 아내(혹은 여자친구)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혹은 다툼)에서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아 남편(혹은 남자친구)과 싸우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이야기에 나오는 답 중 하나가 남자들의 경우 사건을 떨어져서 제삼자의 입장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자들은 어찌 되었건 편을 들어달라는 여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여자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는 남자들을 역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좋고 나쁨이 아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남녀 간의 성향 차이라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 이 역시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여성 소설가의 작품을 읽다 보면 소설 속에 감상적으로 개입하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오랜만에 읽게 되는 여성 작가의 이야기는 어떨까. 츠지무라 미즈키의 『열쇠 없는 꿈을 꾸다』를 읽었다.

단편집의 경우 보통 책의 제목과 같은 단편이 하나 들어가기 마련인데 이 작품집은 그렇지 않다. 그 대신 이 제목이 작품 전체를 대신하고 있다. 열쇠 없는 꿈을 꾼다는 것, 무언가를 바라고 희망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는 현실을 빗댄 제목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 격의 사람들도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제목이 더욱 현실감 있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즐겁게 읽은 「쓰와부키 미나미 지구의 방화」는 여성을 보기 위해 방화를 한다는 흔한 전개―사이코패스 테스트라고도 알려진 장례식장에서 한 여성을 보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 같은 전개는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너무 많이 쓰인 소재이기도 하다―를 보이는가 싶더니 마지막의 소소한 반전으로 어이없게 끝맺음한다. 하지만 이 어이없음이 이 단편이 주는 매력이다. 이런 결말은 「기미모토 가의 유괴」에서도 볼 수 있는데 출산과 육아의 스트레스로 최악의 선택을 하려던 어머니의 이야기에서도 보인다.


이들과는 다르게 「미야다니 단지의 도망자」, 「세리바 대학의 꿈과 살인」은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극단적인 선택(혹은 수동적으로 이끌려 다니기만 하는 사람)에 대한 섬뜩한 이야기다. 「세리바 대학의 꿈과 살인」에서처럼 유약하고 무능한 남자에게 한없이 끌려 다니기만 하는 여성의 행동과 결국 극단적으로 보이는 결말은 역시나 일본스러운 이야기구나 하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이 책에서만큼은 단연 이질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소한 이야기들 속에 평범한 사람들이 ‘인기 있고 싶다’, ‘칭찬받고 싶다’, ‘육아로부터 조금 해방되고 싶다’와 같은 어쩌면 소박한 꿈을 꾸는 이야기들이지만 그것을 표현해 내는 방식은 꽤나 어둡고 공포스러운 것이다. 열쇠가 없는 꿈은 그저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며 억지로 열려고 하면 꿈에서 그리던 달콤함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저 작고 평범한 소망일 뿐이지만 그것을 억지로 얻으려 할 때의 현실은 꿈꾸던 것만은 아닐 것이고, 그래서 더 두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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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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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추리문학을 접하게 되면 현대의 작가 중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가가 히가시노 게이고일 것이다. 흔히 말하는 요새 가장 잘 나가는 작가 중 한명으로 이런저런 기회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야기를 꽤 접할 수 있었는데 많은 작품을 써 냈으면서도 일정 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역량있는 작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방과 후』라는 작품으로 에도가와 란포상을 받으며 추리작가로 데뷔했지만 전통적인 추리소설보다는 미스터리가 가미된 판타지 소설 쪽에서 강점을 보여 주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읽었던 『용의자 X의 헌신』은 클래식한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나에게도 굉장한 즐거움이었고 『신참자』 역시 소설과 드라마도 작가의 능력을 다시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백야행』 같은 작품보다는 전통적인 추리소설에 끌리는 편인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둘 다 나무랄 데 없이 만족스럽다. 어찌 되었건 잘 팔리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일 것이다. 지금 보게 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사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색다른 이야기다.

나미야 잡화점은 30년 동안이나 비어 있는 오래된 가게였다. 이 잡화점은 예전 주인이 있었을 때 어떤 고민이라도 성실하게 답변해 주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어느 날 이 잡화점에 별 볼일 없는 3인조 좀도둑이 숨어들게 된다. 백수 3인조 좀도둑은 이곳에서 하루 묵으려고 했다가 갑자기 우편함에 날아든 고민 상담 편지를 보게 된다. 편지의 내용을 본 3인조는 과거에서 날아온 편지에 당혹해 하지만 내용에 이끌려 답장을 해 주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또 고민을 보내게 된다. 이렇게 나미야 잡화점은 부활한다.

일본 소설을 읽다 보면 가끔 드는 생각이 기발함을 넘어선 상상력을 보여줄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는 바로 나미야 잡화점 자체가 과거와 소통을 하는 공간이다. 과거의 인물이 편지를 보내고 현재의 좀도둑 3인방이 이를 답장해 주며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를 통해 상담을 요청했던 사람들뿐 아니라 미숙하고 결점투성이인 좀도둑 3인방들도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변화하는 모습을 느끼게 된다. 좀도둑 3인방은 다른 사람들에게 고민 상담을 해주었지만 그 결과가 자신들의 과거까지 변하게 했음을 알게 되는 것은 한참이 지난 후다. 이런 부분은 이야기의 구성 자체에도 녹아 있는데 서로 다른 단편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결국에는 하나의 줄기 속에 묶여져 있다. 결국 나미야 잡화점은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함께 가진 공간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 한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 무언가 도움을 얻고 싶어 한다. 그 도움이란 선택을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한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갖기 위해서다. 상담자 역시 전문적인 지식보다는 그냥 가만히 들어주고 대단한 지식이 아닌 그저 힘내라는 한마디가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선택은 자신이 결정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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