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선의 명탐정들
정명섭.최혁곤 지음 / 황금가지 / 2013년 10월
평점 :
1.
저녁 먹기 전 한 꼭지만 읽으려고 책을 펼쳤다. 하지만 중간에서 멈출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 CSI마냥 사건을 해결하는 명탐정들이 이렇게 많았다니... 결국, 저녁은 9시쯤에야 먹을 수 있었다.
2.
<조선의 명탐정들>은 냉철하고 과학적인 추리로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낸, 조선의 탐정 이야기다. 탐정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탐정'이었던 건 아니고, 오늘날 탐정처럼 사건을 해결했다는 의미에서의 탐정이다. 그래서, 세종대왕, 정조, 연산군이나 하급관리였던 선비들도 명탐정으로 등장한다. 얼마 전, 크게 인기를 끌었던 TV프로그램 [별순검]은 조선 말기(거의 일제강점기 직전) 이야기이며, '별순검'이란 특정 집단의 활약상이었던 데 반해, <조선의 명탐정들>은 조선시대를 총망라하고 있고, 훨씬 다양한 인물들, 훨씬 다양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별순검]에 환호했던 분이라면, <조선의 명탐정들>에는 거의 찬양, 경배를 바치지 않을까?
3.
13개의 챕터로 되어 있고, 인물로는 16명의 명탐정이 등장한다. 전부 재미있었지만, 소개하고 싶은 건, 조선 최고의 명탐정 '정약용'의 활약상이다. 정약용은 곡산 부사나 형조참의의 직에서 여러 사건을 해결(p.202)했는데, 이런 기록을 [흠흠신서]에 남겨두었다. 실학자답게 과학적으로 사건을 해결했던 그는, 역시 조선 최고의 명탐정이었다. 한 사례를 보자.
한 여성(안 소사)이 어떤 남자(민성주)를 잔인하게 살해하고는, 관아로 찾아간다. "제 남편(최주변)이 민성주의 칼에 찔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원수를 갚고자 민성주를 죽이고 자수하러 왔습니다."(p.206 일부수정) 효와 충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던 조선이었기에, 안 소사를 도리어 남편의 원수를 갚은 열녀라 칭하고 석방(p.207)한다.
하지만, 정약용은 의문을 품는다. 1) 안 소사는 자신의 남편이 민성주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나, 민성주가 최주변에게 입힌 상처는 둘이 장난치다 생긴 것으로 아주 경미한 것이었다는 점. 2) 안 소사는 남편이 민성주에게 여러 군데 찔려서 사망했다고 했지만, 최주변의 상처는 크기와 아문 상태가 모두 다른 것으로 한번에 난 상처가 아닌 점. 3) 남편이 한 달동안 시름시름 앓았다고 주장했던, 안 소사의 말이 사실이 아니었고, 당사자인 최주변이 민성주를 고발하고나 죄를 묻지 않은 점 등. 의심스러운 게 한둘이 아니었다. 결국, 명탐정 정약용은 사건의 숨겨진 충격적 진실을 밝혀내는데...
4.
조선시대 활용되었던 수사기법들도 인상적이었다. 그 중, 독살 여부를 판명하는 방법(p.121)을 보자. 1) 조각수(쥐엄나무를 끓여서 우려낸 물)로 씻어낸 은비녀를 입 안에 넣고 종이로 막은 다음, 꺼내서 변색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한다. 청흑색으로 변하면 독살이 의심되었다. 2) 흰 밥을 피살자의 입 안에 넣고 종이로 막았다가, 몇 시간 후에 빼서 닭에게 먹인다. 닭이 밥을 먹고 죽으면 독살로 봤다. 또한, 독이 몸 안으로 들어갔을 경우를 대비, 항문도 같은 방법으로 검사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 시체검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p.240)도 있다. 기본적으로 피살자의 시신은 조사관을 바꿔서 세 차례에 걸쳐 조사를 진행(p.223)했다고 한다. 거기다 사체의 외상을 꼼꼼히 확인하여, 칼에 찔리거나 멍든 흔적이 있으면 자로 상처의 크기와 넓이를 쟀고, 대꼬챙이를 이용해서 상처의 깊이도 쟀다. 이런 기록들은 전부 그림과 함께 꼼꼼히 기록되었다.
5.
각 챕터 끝부분에는 조선 명탐정과 비슷한 활약을 했던, 서양 추리소설 속 탐정 이야기가 나온다. 예를 들어, '이의형처럼 가족들 간의 은밀한 비밀을 파헤친 탐정은?'이라 문제제기하고, 로스 맥도널드가 탄생시킨 '루 아처'를 소개하는 식이다. 추리소설의 간략한 서평으로 읽을 수도 있고, 탐정 캐릭터 분석으로도 볼 수 있다. 몰랐던 탐정들도 있고, 상당히 괜찮았다.
또한, 삽화와 기발한 표지도 훌륭하다. 삽화는 위에서 이야기한 서양 추리소설 속 탐정 이야기에 실려 있는데, 주로 서양 탐정과 조선 탐정을 대비해 그렸다. 짙은 자주색과 검정색의 조합이 좋고 선이 강렬하다. <조선의 명탐정들>의 표지는 근래 본 표지 중 가장 기발하고 독창적이었다. 멀리서 보면, 정말 신문 1면을 접어둔 것처럼 보인다. 작품의 품격을 한 차원 높여준 부분.
6.
저녁밥도 잊고, 미친듯이 읽은 책이라 쉽게, '너무 재미있다'라고 말하기 꺼려진다. 뭔가 그 이상의 표현을 하고 싶다. 역사 속 숨겨진 사건사고과 명탐정의 활약상을 발굴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선보인 저자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유명 작가의 신간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정작 관심이 가져야 할 책은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