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레이철 조이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해럴드에게 편지 한통이 옵니다. 양조회사에서 같이 근무하던 옛 (여자)동료 퀴니 헤네시가 보낸 편지였죠. 유쾌한 소식이 담긴 편지는 아니었습니다. 암에 걸린 퀴니의 마지막 인사였어요. 급히 답장을 쓴 해럴드는 편지를 부치기 위해 우체통을 찾아 나섭니다. 이게 기나긴 여정의 출발임을 누가 알았을까요? 해럴드는 퀴니를 만나기 위해, 영국 최남단 킹스브리지에서 출발해 최북단 버윅을 향해 걷습니다.

 

이야기 초반 가장 궁금한 건, 퀴니 헤네시와 해럴드의 관계입니다. '둘은 도대체 어떤 사이기에 해럴드는 퀴니를 만나려 할까? 혹시 연인사이였나?' 더군다나, 해럴드는 퀴니가 있는 세인트버나딘 요양원에 전화해서는 이런 멘트까지 날립니다. "지금 당장 출발한다고요. 내가 걷는 동안은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한다고. 이번에는 내가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고 전해 주세요."(p.33) 음. 해럴드는 퀴니를 실망시킨 적이 있고, 그 때문에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네요. 하지만, 둘의 관계, 해럴드가 퀴니에게 가려는 정확한 이유는 미스터리입니다. 미스터리인 상태에서 해럴드의 여정을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참고. p.54 위6에는 퀴니가 해럴드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해주었다는 서술이 있는데요. 그 이상 자세한 건 이야기되지 않습니다.)

 

해럴드를 걷게 만든, 결정적인 인물이 있으니, 바로 '주유소 소녀'입니다. 주유소 소녀는 해럴드에게 햄버거를 건네고 암에 걸렸던 자기 고모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힘'을 강조하죠. "믿어야 한다는 거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약이니 뭐니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사람이 좋아질 수 있다는 걸 믿어야 돼요. 인간의 마음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주 많아요. 하지만, 있잖아요, 믿음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p.28) 해럴드는 믿음의 힘으로 치유된 소녀의 고모처럼, 퀴니역시 치유될 수 있다는 희망을 봅니다. 그리고 걷기로 합니다. 운명적으로요. (주유소 소녀는 p.354에 다시 등장합니다. 역시 뭔가 감추고 있었죠.)

 

해럴드의 여정에는 주유소 소녀 외에도 많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식당에서 만난 두 부인(p.49), "씹할 씹할"을 연발하는 동유럽 출신 여의사 욕쟁이 마르티나(p.166), '차를 타야한다'고 권하는 유명배우(p.214), 순례길을 함께 하자고 온 양아치 윌프(p.270), 순례길을 함께하며 티격태격하는 케이트와 리처드(p.284) 등등. 아, 돌멩이를 던져주면 좋아하는 개 한 마리도 동행해요. 이들은 해럴드에게 도움도 주지만, 어떤 의미에선 방해자이기도 합니다. 특히 윌프는 유명해진 해럴드에게 달라붙은 파리떼 같은 인물이죠.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는 해럴드의 여정인 현재와 퀴니와의 추억, 모린과의 신혼시절 등 과거가 번갈아 제시되는 구성입니다. 추억 속 퀴니는 성실하고 일처리가 깔끔하지만 아름다운 여성은 아니었어요. 인형 같은 처녀를 원했던 동료들에게 퀴니는 놀림의 대상이었죠. 해럴드는 퀴니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퀴니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그런 여자였습니다."(p.115)라고. 한편 모린과의 추억에선 또 하나의 의문점이 부각됩니다. 그건 바로 아들, 데이비드의 존재. 해럴드, 모린 부부사이는 데이비드를 둘러싸고 삐거덕 거립니다. 데이비드는 해럴드를 완전히 무시하고, 모린은 데이비드에게 과한(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보이죠. 그런데 데이비드는 존재자체가 모호합니다. 특히 p.240에서는 데이비드의 미스터리함이 최고조에 달하죠. 데이비드에겐 어떤 비밀이 있을까요?

 

<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는 잔잔하고 따스한 작품입니다. 해럴드의 여정속에서 삶을 돌아보고, 잊고 있던 가족애, 동료애, 인생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그런 작품. 그렇기에 충격적인 반전이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없다고 이 작품을 폄하해서는 안됩니다. 천천히 꾸준하게 걷는 해럴드처럼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간다면, 작품의 진면목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 물론,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그건 바로, 위에서 제기한 두가지 의문점 - 1) 왜 해럴드는 퀴니에게 걸어가는가? 둘 사이에 어떤 비밀이 있는가? 2) 데이비드는 부부에게 어떤 존재인가? 데이비드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가? - 이 한번에, 그것도 너무 밋밋하게 해소된다는 점이죠. 해럴드는 주유소 소녀에게 편지를 보내는데(p.350), 여기에서 두가지 비밀을 한번에 털어놓습니다. 또한, 진실을 고려할 때, 해럴드와 퀴니가 "내가 걷는 동안은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한다"며 걸어서 영국횡단을 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인 점도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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