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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매화
미치오 슈스케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1.
<광매화>는 여섯 장으로 구성된 연작소설이다. 특정 주인공의 여섯가지 에피소드를 이어놓은 것이 아니라, 각 장마다 독립된 화자가 등장하며 핵심사건은 전부 다른 이야기이다. 물론, 특정 장의 인물이 다른 장에도 등장하지만 어디까지나 주변 인물일 뿐이다. 이 점에서 같은 연작인 <가사사기의 수상한 중고매장>과는 약간 다르다.
2.
[제1장. 숨바꼭질]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는, 독신 아들의 이야기다. 도장가게를 운영하는 아들(도자와 마사후미)은 중학생이던 때를 회상한다. 도자와의 가족은 매년 여름마다 별장에서 휴가를 보냈고, 도자와는 목공예를 하는 '그녀'와 만난다. 사춘기 도자와에게, '그녀'는 첫 키스(p.26)를 선사한 상상속 연인. 하지만, 충격적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제2장. 벌레 쫓기]
강변 모래밭에서 곤충채집을 하는 두 남매가 있다. 이들에게 역한 냄새를 풍기는 사내가 접근(p.61)한다. 남매는 어떤 행동(p.70 스포일러 때문)을 하고, 깊은 죄책감에 사로 잡힌다. 두 남매의 다정한 모습, 서로 아껴주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섬세한 심리묘사가 일품인 작품.
[제3장. 겨울 나비]
곤충학자를 꿈꾸던 남자가 중학생 때를 회상하는 이야기다. 중학생이던 남자는 강변 모래밭에서 '사치'라는 여학생을 만난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사치는 남자를 응원한다. "언젠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곤충을 잡고 싶다고 했지?" "네가 죽을힘을 다해 실행한다면 이 봉지 안에 온 세상 곤충을 다 잡아넣을 수 있어." "곤충만이 아니야. 세상을 전부 넣을 수 있어.'(p.111,112)
둘의 사랑은 신기루 같았다. 남자는 사치를 짓누르는 세상의 추악함에 분노하고 사치를 구하고자 한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흐른다. 결국 마지막 키스(p.133)를 하고 떠나가는 사치.
3장에는 미쳐 설명하지 못한, 수많은 비유와 상징이 가득하다. 또한 어린 남녀의 순수한 연애감정이 고조되었다가, 철저하게 좌절되는 아픔이 아름답고 절절하다. 근래 읽은 작품 중 최고였고, <광매화>의 여섯 장 중에서도 가장 훌륭했다.
[제4장. 봄 나비]
웨이트리스인 '사치'(p.161)가 화자이며, 이웃 마키가와 할아버지와 손녀 유키가 등장인물이다. 마키가와 할아버지 집에 도둑이 든 사건의 진실, 손녀 유키가 듣지 못하게 된 이유(정확히는 유키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이유)가 밝혀지면서 주제에 근접한다.
[제5장. 풍매화]
트럭운전기사 '료'가 화자이다. 료는 병에 걸린 아버지가 입원한 후, 변모한 어머니에게 불만을 품어 왔다. '아버지의 임종이 확실해지자 엄마는 급변했다.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생기가 넘쳤다. ... 엄마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아버지에 대한 배신행위처럼 보였다.'(p.202,203) 동생을 챙기고, 갈등을 풀기 위해 노력하는 '료의 누나'가 대견해 보였고, 료가 어머니를 이해해가는 과정이 좋았던 작품. (풍매화는 바람으로 꽃가루를 운반하는 꽃이다. 이에 대한 서술은 p.210)
[제6장. 아득한 빛]
초등학교 여자 선생님의 이야기. 전과목 만점에 글 표현력이 뛰어난 아사요, 그러나 말도 없고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지도 못한다. 그러다 들려온 놀라운 소식. 아사요가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p.263) 아사요는 개의 젖을 물며 자라는 새끼 고양이를 죽이려 했다. "동물이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에요." "자기는 고양이면서 개를 부모처럼 따르거나 개 옆에 누워서 자는 거요."(p.269,270)라면서. 아사요가 한말의 의미는? 왜 고양이를 죽이려 했을까?
3.
각 장의 화자변화는 <광매화>구성의 백미다. 특정 장에서 주변인물로 등장했던 인물이, 다른 장의 화자가 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 (역자는 이를 '바톤 터치 하듯이~'라고 표현한다. p.305) 예컨데, 제2장에서 등장한 '곤충학자를 꿈꾸었던 노숙자'(p.75)는 제3장의 화자이며, 제3장에서 가슴아픈 선택을 해야했던 '사치'는 바로 제4장의 화자이다. (사치가 성장해서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았음) 또한, 제4장에서 유키는 어떤 트럭이 치일 뻔 하는데(p.172), 이때 트럭운전기사가 제5장의 화자이고, 제5장의 '료의 누나'는 제6장의 화자이다.
4.
각 장마다 작가가 이어놓은 연결고리를 찾는 것도 재미있다. (이런 구성은 '빈첸초 체라미'의 <당신이 사랑한 게 나였을까>에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제3장의 화자가 '사치'를 만나는 '강변 모래밭'은 제1장에서 '도자와'가 '목공예 그녀'를 만났던 장소이고, 제2장에서 남매가 곤충채집을 하던 장소이다. 제1장의 핵심소재인 '조릿대 꽃'은 제2장에서도 등장(p.53,54)한다. 또한 제4장에서 '유키가 트럭에 치일뻔한 장면'(p.172)은, 제5장에서는 트럭운전기사 료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제6장은 연결고리가 넘실넘실댄다. '료의 누나가 고추잠자리를 보는 장면'(p.260)이 있는데, 이때 한 소년이 등장해서, 고추잠자리의 생태에 대해 설명해 준다. 이 소년은 바로 제2장에서 곤충채집을 하던 남매의 오빠이다. 또한 소년이 이야기하는 '강변에 사는 아저씨'(p.261)는 바로 제3장의 화자이다. 제6장내내 등장하는 도장가게는 제1장의 '도자와 도장가게'이며, 료의 누나가 본 '노파를 업은 남자'(p.279)는 바로 제1장 도자와 마사후미와 그 어머니이다.
5.
미치오 슈스케는 각 장을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절묘하게 연결했고, 하나의 주제의식을 관통시켰다. 특히 주목한 것은, 부모나 어른들이 하나같이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제1장 도자와의 아버지는 XX행각을 벌여 비극적 사건(스포일러 때문에 이 정도만)의 원인을 제공하고, 제2장에서는 어린 아이를 상대로 못된 짓을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제3장에서는 가장 극명하게 부각되는데, 남자(곤충학자를 꿈꾸던)와 사치의 애틋한 사랑이 좌절되고 사치가 고통받는 것은, 바로 사치의 어머니 때문이다.
또 다른 특징은, 꽃이나 풀, 나비가 중요소재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제목과 밀접한 관련!) 제1장,제2장의 조릿대 꽃(p.17,53,54), 제2장의 하얀나비(p.96), 네발나비(p.117), 제4장의 토끼풀(p.162)내지 서향꽃(p.181), 제5장의 금방동사니(p.207)내지, 수국(p.231), 제6장의 하얀나비(p.302) 등등.
말이 나온 김에, [광매화]라는 제목의 의미를 고민해 보자. 충매화나 풍매화에서 착안한 듯한 이 제목은 '빛으로 꽃가루를 운반하는 꽃' 즉, 곤충이나 바람없어도 빛이 있으면 피는 꽃을 뜻하는데 이는 바로 어린아이들이다. (제1장의 중학생이던 도자와, 제2장의 어린 남매, 제3장의 남자와 사치, 제4장의 유키, 제5장의 중학생이던 료와 누나, 제6장의 아사요) '료의 누나'가 보았던 '하얀 빛'(p.276)은 광매화인 자신을 성장시키는 빛이 아닐까? 하얀 빛이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된 것(p.300)은 '료의 누나'의 성장, 즉 어른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런지?
6.
<광매화>는 성장을 위해 빛을 찾는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그 과정이 눈물겹고, 슬프지만, 우리들의 광매화는 기어이 꽃을 피워냈다. p.262 하단7의 서술을 보고 느꼈다. '아, 미치오 슈스케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구나.'라고. 누가 내게 미치오 슈스케의 베스트를 꼽아 달라고 한다면, <광매화>, <구체의 뱀> 이 두 작품을 꼽겠다.
* 마지막 문단, 'p.262 하단7의 서술을 보고 느꼈다'에 대해 부연 설명하겠습니다. (<구체의 뱀>에 대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읽지 않으신 분은 패스해 주세요.)
제가 저렇게 느낀 것은, <구체의 뱀>과의 연관성 때문입니다. 제2장의 어떤 설정은 <구체의 뱀>의 설정과 동일합니다. 그것도 작품의 뼈대를 이루는 핵심 설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엄청 가슴 아픕니다. 여운이 일주일 이상 가더라고요. 그렇기에, 미치오 슈스케가 p.262 하단7에서 친절하게 저런 설명을 추가한 것은 -그것도 제6장에서는 별 필요도 없어 보이는- 명백히 <구체의 뱀>과는 다르게 쓰겠다는 의도입니다. <구체의 뱀>의 절절한 슬픔을 제2장의 남매들이 느끼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죠. 저는 그것을 희망으로 표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