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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월담
누쿠이 도쿠로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3/0708/pimg_771993184871878.jpg)
1.
'신월담'이란 묘한 제목에 처음 미스터리를 떠올렸다. 왠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과 비슷한 느낌이지 않은가? (새로운. 달의(달을). 이야기(이야기하다). / 하얀. 밤을. 걷다.) 거기다 작가는 <통곡>으로 데뷔한 누쿠이 도쿠로. 그러나, <신월담>은 미스터리가 아니다. 뒷표지에는 '연애소설'이라고 써있지만, 단정지을 수 없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연애소설과는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젊은 편집자(와타베 도시아키)가 절필한 유명작가(사쿠라 레이카)를 찾고, 작가가 갑자기 절필한 이유, 특정작품([어스름 너무 저편])을 기점으로 작풍이 급변한 이유를 듣는 것이 <신월담>의 구성이다. 도시아키가 사쿠라를 찾는 [프롤로그] - 사쿠라의 이야기 [(본문의) 신월담] - 이야기를 들은 후인 [에필로그].
이런 구성은 몰입도 면에서 유리하다. 독자가 도시아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기에. 또한, 필연적으로 프롤로그와 본문의 신월담 사이에 시차가 생기는데, 만약 <신월담>이 미스터리였다면 이는 상당히 중요한 점이다. 자세히 보자. 57세의 사쿠라가 과거를 회고하고 있으니, 20대 초반이라면 30여년 전 이야기이다. 현재(도시아키가 사쿠라의 이야기를 듣는 시점)가 2010년 10월 20일(p.658,659)이므로 1970,80년대가 이 작품의 실질적인 배경인 셈이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에서 하도 호되게 당한지라 주목해 보았지만, <신월담>에선 큰 의미는 없다.
(신기하게도 시대적 배경을 의식할 만한 소재도 거의 제시되지 않는다. 1970,80년가 실질적 배경이니 뭐니 했지만, 그냥 배경을 2010년으로 놓고 읽어도 문제는 없다. 유일하게 시대적 배경을 추측한만한 소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p.646에서 언급되는 휴대전화의 크기.)
2.
(1) 운명의 남자, '기노우치 도루'와의 만남
<신월담>은 기노우치 도루를 향한 고토 가즈카의 미묘한 심리양상, 둘의 관계가 핵심이다. 기노우치란 인물을 제대로 분석할 수 있다면, 작품의 메시지를 꿰뚫을 수 있다.
기노우치에 대해 자세히 보자. 외부적으로 보이는 기노우치는 사장이란 지위를 이용해 여직원들을 유혹하고, 가지고 놀고, 바람을 피는 카사노바의 전형이다. 오죽하면 조카(야스하라 고스케)가 "사장님(기노우치)은 여자를 휘두르는 스타일 ... 처음에는 친절할 거야. ... 시작할 땐 엄청 공을 들이고 그러다 여자가 자기한테 넘어오면 그때부터 마음대로 굴지. 언제나 그런식이다 보니 이젠 웃음밖에 안 나온다니까."(p.100)라고 할 정도니. 거기다, 큰 키에 준수한 외모, 폭풍매너까지. 같은 남자가 봐도 반할만한 인물이다.
가즈코도 선배 직원인 야마구치에게 '사장이 여성편력이 심하기에 조심하라'는 충고를 받는다. (p.57) 하지만, 가즈코는 자기의 못난 얼굴에 체념하고는 "걱정은 마세요. 사장님과 골치 아픈 관계로 발전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p.58)라고 한다. (가즈코의 자기비하적 태도는 하나의 테마로 후술)
기노우치는 친절하고 사람의 장점을 잘 발견해 주었다. 가즈코에 대해서는 얼굴은 예쁘지 않을지라도, 몸매가 아름답다며(p.67) 충분히 매력적이라 하고, 독서가 취미인 점을 칭찬해 준다. 가즈코는 처음듣는 칭찬에 '황홀경에 빠지고'(p.67) 자신감 내지 미래를 대면할 용기까지 얻는다. 자기의 못생긴 외모마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장점을 찾아주는 기노우치에게 가즈코는 서서히 빠져든다.
"기노우치는 나를 인정해 주었다. 그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가 내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내 모든 것을 긍정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기꺼이 그런 존재가 되어 준 기노우치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그마웠다. 설사 내일 당장 우리 관계가 끝난다 할지라도 나는 죽을 때까지 기노우치에게 감사하며 살아가겠다고 맹세했다."(p.95)
(사실, 기노우치 분석만으로 페이지를 가득 채울 수 있고, 작품 전체를 조망해보면 도리어 저것이 올바른 선택으로 보인다. -그 정도로 중요인물- 또한, 내 주변에 기노우치와 유사한 인물이 있기에 처음에는 일일이 비교해 가면서 서술하고 싶었다. 하지만, 일단 이 정도만 하겠다. 너무 길어져서 지쳤음-_-)
(2) 가즈코의 외모컴플렉스와 성형
가즈코의 자기비하에 가까운 외모컴플렉스는 읽는내내 가슴 아팠다. 혹자는 "참 답답한 여자네. 외모에 괴로워할 시간이 있으면 다른쪽으로 노력해서 성공하라고!" 이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즈코와 마찬가지의 고민을 해왔던 나는 가즈코를 이해할 수 있다. 작품곳곳에 자기비하가 있어 일일이 페이지를 나열하기 어렵지만, 그 중 자기를 '된장국 같은 여자'라고 한 부분(p.107)이 기억에 남는다. (자세히 소개하진 않겠다.)
외모컴플렉스의 원인 중 하나는 볼에 나 있는 사마귀이다. 이에 대한 가즈코의 이야기를 보자. "사마귀는 어릴 적부터 내 외모 컴플렉스의 원인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나만의 결함. 이것 때문에 유치원 때부터 철없는 남자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고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뒤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 상대방의 시선이 한순간이라도 사마귀로 향하는 것 같으면 곧바로 의기소침해지곤 했다." (p.147)
가즈코는 외모컴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형을 선택한다. '악의 근원'으로 까지 여겼던 사마귀를 먼저 떼어내고(p.157), 상꺼풀 수술을 받고(p.175), 얼굴 전체를 고친다.(p.245) 스스로 넋이 나갈만큼 아름다운 미녀로 변모한 가즈코. 이후 p.251부터는 영화 [미녀는 괴로워]를 보는 듯, 미녀 가즈코를 둘러싼 극적변화와 외모지상주의 사회의 씁쓸한 단면이 이어진다.
여기서 주목한 것은, 가즈코가 처음 성형을 결심하고 부모에게 허락을 받는 장면(p.154-6), 얼굴 전체를 뜯어고친다며 수술비를 요구하고, "날 때부터 예뻤던 엄마가 내 기분을 어떻게 아냐"며 갈등하는 장면(p.236-242)이다. 고민하는 가즈코, 그런 딸을 바라보는 부모의 감정이 뭐낙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작가가 이런 것을 어떻게 형상화 했지?'란 의문(좋은 의미의.)이 들 정도였다.
가즈코의 성형은 두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가즈코가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되는 원인이 된다는 점(p.269 참조) 둘째, 가즈코가 소설을 쓰는 이유 / 작풍이 변한 이유/ 갑자기 절필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다 읽은 후에야 '아하, 결국 이거였군'하고 깨우치게 되지만 말이다. (성형한 이유 = 소설을 쓰는 이유 = 작풍이 변한 이유 / <-> 정반대 의미에서 = 갑자기 절필한 이유. 결국 모두 같은 이유이다. 후술함.)
(3) 고교동창 도키코의 존재
도키코는 가즈코의 유일한 친구인, 고교동창이다. 도키코는 이후 친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행각을 벌이는데, (사이코패스가 연상될 정도였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이 정도로 하고, 다른 차원에서 하나만 이야기 하겠다.
도키코와 관련된 일화가 소개되는 부분(p.192)이 있다. 고등학생이던 가즈코와 도키코는 여름방학 특강을 들을 것인지 고민한다. 의외로 도키코는 "난 안들어. ... 내년에는 못 노니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이번 방학에 실컷 놀아 두려고."(p.194)라고 한다. 이에 가즈코 역시 여름방학 특강 대신 아버지가 사 둔, 세계문학전집을 읽기로 한다. 방학이 끝나고 가즈코는 의외의 이야기를 듣는다. 특강을 듣지 않겠다던 도키코가 버젓이 특강을 들었다는 사실. 전후사정으로 보아 가즈코보다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 부분은 구성상 아주 훌륭하다. 과거의 과거란 '이중의 회고'를 통해 등장인물을 입체적으로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에. 다소 평이하게 이어지던 사쿠라의 이야기는 활력까지 얻는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런 장면이 더이상 없다는 점이다. p.192가 전부다. 개인적으론 본문의 신월담 사이사이에 도시아키가 등장하는 현재나, 가즈코가 회상하는 과거(정확히는 과거의 과거)를 삽입해, 과거의 과거, 과거, 현재를 넘나드는 입체적 구성을 시도하는 것이 나아보인다. 그렇다면 왜 누쿠이 도쿠로는 우직하게 본문의 신월담을 이어갔을까?
이런 추측을 해본다. 누쿠이 도쿠로가 의도적으로 추리소설적 요소를 배제한 것이 아닐까?라는. 철저하게 추리소설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신월담>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는 느낌. 사실, <신월담>에는 추리소설로 발전시킬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도키코는 '어떤 사건'(p.420 스포일러 때문에) 이후 더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도키코를 계속 등장시키면서 가즈코와 도키코의 학창시절에 숨겨진 비밀(이는 필자의 가정임)을 부각시키는 구성이 가능하고, 사쿠라의 절필의 이유도 고스트라이터인 쌍둥이 자매가 존재한다던지, 사쿠라와 기노우치가 얽힌 살인사건이 원인이라던지, 뭔가 극적으로 구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이는 비판의 대상이 전혀 아니다. 애초에 추리소설이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결심한 작가에게, 왜 추리소설적 요소를 부각시키지 않았지? 라고 따지는 것은, 웃기지 않은가.)
(4) 갑자기 절필한 이유, 작풍이 급변한 이유는? (스포일러 있습니다.)
위에서 잠깐 이야기했듯이, 사쿠라가 절필한 이유 / 작풍이 급변한 이유 / 소설을 쓰는 이유 / + 성형한 이유까지 모두 같은 것이고, 이는 (1)에서 이야기한 사쿠라와 기노우치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 사쿠라의 고백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기노우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고 싶었다. ... 아쓰코(기노우치의 부인임)에게 밀려 우선순위를 빼앗기지 않도록 끊임없이 소설을 썼다. ... 나는 자리에서 밀려났다. 기노우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p.656)
'끝났다. 기어이 끝나 버렸다. 나는 기나긴 꿈을 꾸고 있었다. 기노우치와 함께 살아가는 꿈. 꿈은 깨기 마련이다. 오랫동안 꿈을 꾸어 왔으니 행복은 그것으로 족했다. 꿈속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 소설을 쓰고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 모두가 꿈이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더는 소설을 쓰지 못한다. 나를 창작의 세계로 인도해 줄 존재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p.656)
(5) [어스름 너머 저편]의 탄생
[어스름 너머 저편]은 고노이케가 사쿠라에게 고백(p.500,1)하고 기노우치가 사업을 위한 것이라며 '어떤 결정'(p.522)을 하는 과정에서 탄생(p.530)한다. 사쿠라는 새로운 감정을 느끼며, 자신을 속박하던 굴레를 하나씩 벗겨버린다. 기노우치라는 굴레. 얌전한 소설이라는 굴레.
'... 내가 할 일은 단 하나였다. 정념이 휘어지거나 축소되지 않도록 가능한 한 그 모습 그대로 세상에 내놓는 것. ... 독자의 감정을 집어삼킬 정념을 활자로 옮겨 낼 작정이었다. (중략) 좌우간 나는 어떤 속박도 원하지 않았다. 속박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눈앞에 장애물이 있다면 쓰러뜨리고서라도 앞으로 나아가고픈 충동이 일었다.'(p.528,9)
3.
<신월담>은 추리소설적 요소를 배제하고, 일방과 다른 일방의 미묘한 관계양상, 가짜 달이 되어버린 인물에 주목한 작품이다. 특히 작가는 여성화자의 세밀한 심리묘사에 성공하는데, 이는 누쿠이 도쿠로가 이전에 보여줬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노력은 어느 특정 性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난 사쿠라에서 대학 새내기때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설래고, 조바심내고, 가슴 아파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성화자를 통해 남성,여성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삶'을 그려냈다는 것이 바로 <신월담>이 위대한 이유 중 하나다.
소설 속 사쿠라는 작가로써 한차원 도약하기 위해, 자신의 틀을 부수기 위해, 고뇌한다. 이런 사쿠라의 모습에서 누쿠이 도쿠로를 찾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누쿠이 도쿠로가 갑자기 추리소설이 아닌 작품을 쓴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틀을 깨기위한 노력은 눈물겹지만, 아름답다. <신월담>은 바로 그런 작품이다.
* '新月譚' (새로울 신 / 달 월 / 이야기 담) 의미는?
이는 <신월담>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인용하는 걸로 답을 대신한다.
[달은 바로 나였다. 사쿠라 레이카는 큰 상의 후보에 올라 쏟아지는 주목을 받지만 그 실체인 고토 가즈코는 어느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미녀 작가라는 허구의 옷을 뒤집어쓴 나. 기노우치와도 남몰래 만나야 하는 나. 고토 가즈코를 똑바로 봐 주는 존재는 이 세상에 기노우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악착같이 기노우치에게 매달렸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 달이 없는 새로운 달, 신월의 밤을 홀로 걷기 시작했다. 외롭지 않았다. 이 길은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p.557)
* 중요하지만,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
- 사쿠라가 작가로써 한단계 도약하기 위해 고뇌하고, 결국 해답을 얻는 과정(p.494,495)
- 편집자 다카이와 작가 사쿠라의 관계
- 고노이케와의 만남(p.464),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 이때 미묘하게 변하는 기노우치에 대한 감정
- 가즈코를 응원해주고, 필명까지 지어주는 기노우치(p.334) (이 부분은 내 경험과 연계해서 자세하게 쓰고 싶었다. 나도 가즈코처럼 열렬한 응원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추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 기노우치의 여성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