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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하이웨이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31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이하 B)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이하 C)가 연달아 나온 후, 모리미 도미히코의 작품이 많이 출간되었지만 거의 읽지 못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서평에서 썼던 주제넘는 예언(?)이 현실화되는 걸, 흐믓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http://blog.aladin.co.kr/zetipao/2287142) 아무튼 <팽귄 하이웨이>(이하 A)가 내가 읽은 모리미 도미히코의 세번째 작품인 셈인데, 위 두 작품과 간략하게 비교해 보자.
첫째, B,C의 배경이 교토라면, A는 '사바나'같은 느낌(p.11)의 '교외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둘째, B,C의 화자는 남녀대학생이고, A는 초등학생이다. 셋째, B,C는 '독자 제현, 잘 있었는가.'식으로 작가가 직접 개입하지만, A는 직접적인 개입이 없다. 넷째, B,C에서 가볍게 그려졌던 SF적 상상력은 A에서 만개한다. 특히 두번째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팽귄 하이웨이>는 '일본에서 가장 메모를 많이 하는 초등학교 4학년'(p.12)이라고 자부하는 아오야마가 주인공이다. 아오야마의 모습은 혹시 "작가의 유년시절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발하고 독특하다.
한 장면을 보자. 같은 반 아이들을 괴롭히는 스즈키가 치과에 오자, 아오야마는 스즈키를 골려주기로 한다. "너도 그 병에 걸린거니? … 스타니스와프 증후군 말이야. 이 속에 세균이 가득 생겨서 이를 전부 빼지 않으면 못 고치는 병이야. … 난 피가 너무 많이 나서 혼났어. 너도 같은 병일 거야."(p.23) "세균이 잇몸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가면 얼굴이 만두처럼 부풀어 올라. 고열이 나고 이 사이사이에서 쓴맛을 내는 버섯 비슷한 것이 나와. 얼굴도 다른 사람같이 변해버리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죽게 돼"(p.24) ㅋㅋㅋ 이렇게 능청을 떠니, 스즈키는 겁에 질려 눈물을 질질 짠다. 명색이 주먹대장이라던 스즈키가 말이다.
이렇듯 <팽귄 하이웨이>는 성장소설적 요소가 강하다. 비록 작품전반에 SF적 상상력이 넘실대고, 2010년 일본 SF대상 수상작이기까지 하지만, 성장소설 측면에서 읽는 게 작품의 묘미를 좀 더 깊게 느낄 수 있다. SF적 요소는 해석하기 난해할 뿐더러, '아오야마의 성장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장소설적 요소를 살펴보자. 1) 삼총사의 대탐험과 연구. 삼총사는 체스소녀 하마모토, 아오야마의 단짝 우치다, 그리고 주인공 아오야마이다. 이들은 갑자기 출몰한 팽귄과 정체불명의 우주선 '바다'(SEA가 아니라, 우주선의 별칭이다)를 연구하고, 주변 강과 숲을 탐험한다. 이들은 팽귄과 우주선 '바다'를 관찰하면서 팽귄의 탄생, 바다의 변화 등을 토대로 자신들만의 가설과 추론을 이어간다.
2) 스즈키 일당과의 대결. 스즈키는 아오야마의 반에서 가장 목소리가 크고 힘이 센 아이(p.22)로, 주변 아이들을 마구 괴롭힌다. 스즈키는 치과에서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던 아오야마에 대한 보복으로, 아오야마를 자동판매기에 묶고, 홍차가 담긴 보온병을 던져버리고, 노트를 빼앗아 오줌을 싸버린다.(p.46) 또한, 아오야마와 하마모토가 이야기를 나누자, 스즈키는 걸레를 돌리며 "러브러브!"(p.202)하면서 둘을 놀린다. 또한 스즈키 일당은 신기한 생물을 잡아 학교에 가져옴(p.325)으로써 이후 벌어질 사태(스포일러 때문에)의 촉매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3) 누나의 젖가슴에 대한 동경 여기서 누나란, 친누나가 아니라 치과의 간호사 누나이다. '누나'는 아오야마가 동경하는 첫사랑(?)의 상대로, 팽귄 및 우주선 '바다'를 둘러싼 미스터리의 핵심 KEY를 쉬고 있는 인물이다. 또한 아오야마와 함께 '해변의 카페'에서 체스를 두기도 하고, 연구결과에 대해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스즈키 일당의 행패에서 구해주기(p.213)도 하는 등, 아오야마의 성장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오야마가 품고 있는 '누나'에 대한 애정은 젖가슴으로 상징되어 곳곳에 부각(p.32,134,262등)된다. 한 부분을 보자. '젖가슴은 수수께끼야, 하고 나는 요즘 끊임없이 생각한다. 내가 자주 떠올리는 건 누나의 가슴이다. 왜 누나의 가슴은 엄마의 가슴과 다르지? 물체로 치자면 같은 건데 내가 받는 인상은 왜 이렇게 다른 걸까. 엄마의 가슴을 문득 바라보는 일은 없는데 누나의 가슴은 나도 모르게 자꾸 바라보게 된다. 아무리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다. 만져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 기분이 신기하게 느껴진다.'(p.39,40)
'누나'의 존재의의 내지 실체에 대해선 결말과 더불어,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일단 여기선, 이 정도로만 언급해 둔다.
4) 아오야마의 든든한 조력자, 아버지 아오야마의 성장에 아버지는 없어서는 안되는 인물이다. 노트 쓰는 법을 가르쳐 주고, "매일 발견한 것들을 매일 기록해둬라"(p.13)라고 조언하기도 하고, 다양한 문제로 아오야마가 고민하자, "그 문제들은 제각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하나의 문제일지도 모른다"(p.239)고 충고한다.
스즈키 일당이 신비한 생물을 잡아 학교로 가져오는 것(p.325)을 기점으로 이야기는 긴박하게 급변한다. 삼총사의 연구지였던 숲이 조사단에 의해 봉쇄(p.333)되고, 누나는 XXXX을 한다.(스포일러 때문) 하마모토의 아버지를 포함한 조사단 5명이 실종(p.357)되고, 삼총사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학교탈출을 감행(p.360)한다. 실종자들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팽귄과 정체불명의 우주선 '바다'의 정체는?
<팽귄 하이웨이>는 성장소설적 요소와 SF적 요소를 작가특유의 문체로 완벽하게 결합한 작품이다. 초등학교 4학년, 아오야마는 팽귄과 우주선 '바다'를 연구하며, 그리고 '누나'를 연구하며 '어제보다 조금씩 훌륭해진다.' 이런 아오야마의 모습에서, 모리미 도미히코의 어린 시절을 엿보았고, 어린 시절 내 모습을 떠올렸다. 아오야마, 하마모토, 우치다 삼총사가 '재버워크 숲'을 누비고, 정체불명의 우주선을 탐험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가슴을 뛰게 했다.
"다른 사람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어제의 나 자신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하루하루 세계에 대해 배워나가면 나는 어제보다 조금씩 훌륭해진다.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는 아직 긴 시간이 남아 있다. 오늘 계산해보니 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3000하고도 888일이 남아 있다. 그러면 나는 3000하고도 888일을 나날이 훌륭해지는 거다."(p.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