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하지 않은 삶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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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들어가서 처음 좋아했던 아이는 책을 많이 읽었다. 많은 기억이 사라졌지만,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품고 다니던 모습만은 뇌리에 남아 있다. '서른'과 '대학새내기'라…도대체 어울리지 않는 이 조합이 미스터리했다. 그애는 최영미 시인에게서 무엇을 느꼈을까?

그래서 나도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기로 했다. 하지만, 결국 읽지 못했다. 왜 읽지 못했는지, 그 애에 대한 감정은 어떻게 됐는지, 기억 자체가 흐릿하다. 좋은 기억이라면 추억으로 남았을테니 분명 그리 좋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 뭐 아무튼.

말이 길어졌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도착하지 않은 삶>이 처음 읽은 최영미 시인의 작품이라는 것, 그 유명한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읽지 못했다는 것. 두 작품을 비교해 가며 최영미 시인의 작품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피는 것도 좋았겠지만, 지금은 무리라는 것까지.

<도착하지 않은 삶>의 느낌은 좋았다. '최영미 시인이 사랑받는 이유가 있구나'란 생각도 들었고, <서른, 잔치는 끝났다>도 얼른 읽어야 겠다는 생각도 했다. 1) 가장 마음에 든 건, 일상적인 소재를 친근하게 풀어낸 시다. 관리실 방송을 듣고 웃음을 터트리는 내용의 [한가한 오후](p.49), 귀여운 조카에 대한 애정이 묻어있는 [행복](p.72), 조카와 영화 '미이라3'를 본 에피소드인 [극장](p.76) 같은 것들. [한가한 오후]의 일부를 소개한다.

406동에 사는
세준이 어린이는 지금 즉시
큰엄마네 집으로 가기 바랍니다

?
관리실에서 내보내는 우리말을 이해하고
웃음의 꼭지가 터져 책상이 뒤집힌다
엄마도 아니고 왜 하필 '큰엄마'인가?

(…)

그나저나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하하. 관리실 아저씨의 약간은 어눌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지 않은가? 방송을 듣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작가의 모습도 보인다. 친구 집에서 게임에 몰두중인 세준이 어린이도 보인다. 관리실에 전화해 세준이를 찾는 큰엄마의 모습도 보이는 듯 하다^^

2) 시인의 의지가 강하게 느껴지는 시도 상당수다. [2007년의 사포](p.24)는 시인의 다짐이다. '너는 나를 짓밟지만, 나는 / 화려하게 지구를 물들일 거야.'인 둘째 문단이 아주 인상적이다. 상당히 마음에 든다. 특히 '…짓밟지만 / 나는 화려하게…'가 아니라, '…짓밟지만 나는 / 화려하게…'부분에서 입술을 꽉 깨문 시인의 의지가 전해졌다. '나는......' 이렇게 다짐에 다짐을 하는 거다.

3) 특징적인 시도 있다. 미국산 소고기반대 촛불집회를 소재로 한 [2008년 6월, 서울](p.52)은 촛불집회와 함께 역사에 남을만한 시다. (혹시 이를 소재로 한 다른 시도 있는지 찾아보고 싶다.) 인상적인 구절은 '유모차 부대를 호위하는 청년들이 어찌나 멋있던지! / 한국 남자들의 품종이 눈부시게 개량됐어 / 역사는 이렇게 진보하는 거야'이다. '품종개량'이란 구절이 참 재미있지 않은가? 뭐 분노하는 남자도 있겠지만.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대한 [지상 최대의 쇼](p.54)도 멋지다. 개막식의 아름다움과 강렬함에 영감을 받은 시라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그리 간단하지 않다. 다시 읽어보니 비판의식이 깔려 있었다. 화려한 겉치례나 서양문물에 대한 무분별한 동경이 곱게 보이지 않은 듯 하다. 일부를 소개한다.

(…)
서양의 근대문물이 얼마나 신기했으면,
봉건제에서 포스트모던으로 건너뛰어
2008년의 첨단기술로 버무린 무협지를 과시하는가.
백년의 어둠을 깨고
허공을 불지르며 질주하는 열차에
나는 브레이크를 걸고 싶었다.

4) 4부는 여행에서 영감을 얻은 국제적인 시가 많다. 교토의 사찰 용안사를 소재로 한 [아름다움이 너희를 자유롭게](p.91), 스페인 연안 항구도시 알리칸테의 풍경에 눈에 선한 [4월의 알리칸테](p.96) 등등. 이런 시는 이국적인 풍경이 생생하다 못해, 이국의 열기나 숨결까지 전해졌다. 여행을 소재로 한 시를 거의 읽지 못해서 더욱 신선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굉장히 좋았다.

최영미 시인의 작품은 처음이었지만, 단순히 처음으로 끝날 거 같지 않다. <도착하지 않은 삶>은 시인의 숨결이 묻어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문단(일본을 포함한)에 돌풍을 일으켰지만, 내겐 무관한 작품이었다. 반면, 이 작품의 강렬한 향기는 멀리 퍼지기 전, 내가 먼저 맡아 버렸다. 행복하다. 홀로 느끼고 싶은 욕심이 생길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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