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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 배급회사 ㅣ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22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를 계속 읽으며, 중요한 걸 잊게 되었다. 호시 신이치의 위대함. 쉽게 읽히는 '독자 편의적(^^) 문체'에 친근함을 과도하게 느꼈나 보다. 수천 편의 걸작을 사탕가게에서 사탕 사먹듯 날름날름 읽게 되었으니, 괜한 꼬투리 잡기에 몰두한 건 아닌지. 지금 소개되는 쇼트-쇼트는 근 반세기 전에 쓰여진 작품이다. TV, 핸드폰도 없고, 소달구지가 돌아다니는(물론 일본과 우리는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1960년대에 이런 작품을 썼다고 생각해 보라. 놀랍지 않은가? 더욱 놀라운 건, 반세기 후에 읽어도 어색하지 않고,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시 신이치는 소설가를 넘어 미래의 선지자였다. 그의 위대함은 그 어떤 걸로도 부정할 수 없다.
<요정 배급회사>는 1960년대 초반에 쓰여진 작품이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대여섯살 코흘리개였던 시절, 호시 신이치는 우주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떤 전쟁](p.36) 반전이 인상적이다. 외계인의 갑작스런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지구, 가미카제식 자폭작전으로 겨우 물리친다. 피해를 수습하는 장면에서 끝이 나는데, 반전이 있다. 서술트릭의 일종인 이런 반전은 황당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고정관념을 한방에 무너뜨린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코맥 매카시의 <로드>를 읽고 생각했던 반전의 가능성이, 호시 신이치에 의해 작품화되었다는 생각에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던 작품.
[여행 선물](p.42) 먼 미래에 벌어질 만한 섬뜩한 이야기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품고, 니르 행성으로 여행하는 우주탐험대. 이들에게도 일종의 숙명이 있었으니, 뭐낙 먼 거리를 여행하기 때문에 지구로 돌아올 때쯤엔 엄청난 시간이 흘러 있던 것이다. 아무튼 이들은 니르 행성에서 불사의 비법을 배우는 등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즐겁게 지구로 귀환하는 이들을 기다리는 건, 충격적인 사건. 읽어 보시길.
[어느 여름 밤](p.67)은 공포물이다. <덧없는 이야기>의 [금기]처럼 잘 알려진 괴담과 유사하다. 생각해 볼 게 있다. 지금까지 이런 류의 작품을 보면, 널리 알려진 괴담을 호시 신이치가 재구성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정할 수 없다. 역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호시 신이치 작품이 널리 알려져 괴담으로 정착(?)되었고, 우리나라까지 유입되었다'라고. 누구도 뭐라 단정할 수 없다. 아무튼 이 작품은 국내에도 유명한 괴담('미술실과 여고생 이야기'라고만 하겠다)과 유사하다.
[기분 맞춤 보험](p.201) 가장 마음에 든 작품. 심심하면 보험회사에 전화해 뭐든 트집잡는 N씨. "어젯밤엔 도무지 잠을 잔 것 같지가 않아. 왜 그런가 했더니만, 다 저 망할 놈의 도둑고양이 때문이야. 그놈이 어제 밤새도록 요 근처를 어슬렁대면서 야옹야옹 울더라고. 아주 열받아 죽겠어." 놀랍게도 보험회사는 순순히 손해배상을 해준다. 왜? 고객이 불편했다는 이유하나로. N씨는 구입한 그릇의 흠집, 작업 걸었던 여자가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일, 상사한테 야단 맞았다는 일, 등을 보험회사에 말한다. 역시 보험회사는 순순히 배상을 해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보험도 하나의 영업인데 저래서 장사가 될까? 놀라운 진실이 숨겨져 있다.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를 읽는 건 언제나 행복하다. 고민할 필요 없다. 국가도 이념도 그 어떤 고정관념도 얽매일 필요 없다. 단지 호시 신이치의 무한한 상상력에 몸을 맡기면 될 뿐. <요정 배급회사>는 선지자의 예언과 같은 책이다. 난 반 세기전 쓰여진 작품에서 미래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