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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가 되지 못한 왕자 ㅣ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9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왕자가 되지 못한 왕자>는 플라시보 시리즈 중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플라시보 시리즈에는 보통 25편, 많게는 40여편이 실려 있는데, 이 작품은 11편의 이야기 뿐이다. 그만큼 분량도 꽤 되고 깊이있는 구성의 작품이 많다. 얼마전 <흰 옷의 남자>의 서평에 '쇼트-쇼트보다 약간 긴호흡의 작품에 놀랐다'라고 했지만, 만약 이 작품을 먼저 접했다면 저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작품이야 말로, 호시 신이치의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에.
플라시보 시리즈 1권부터 9권까지 중에서 <왕자가 되지 못한 왕자>는 단연 최고다. 쇼트-쇼트에선 맛보기 힘든 다양한 구성을 접할 수 있었고, 스토리텔링이 제대로 살아있어 반전도 한층 강렬했다. (아무래도 한 두 페이지 분량의 정통 쇼트-쇼트보다는 약간 긴 작품이 취향에 맞는 듯) 시체를 중심으로 얽히고 설힌 사람들의 에피소드인 [시체 만세](p.7)를 통해 자세한 이야기를 해보자.
한밤중의 도로를 달리는 영구차. 두 남자는 영구차로 시체를 운반하고 있다. 그런데, 시체가 없어졌다. "오르막길 올라올 때였나? 그때 갑자기 가속페달을 밟아서 관이 미끄려져서 떨어진 게 틀림없어."(p.10) 부랴부랴 시체를 찾아 나선 두 사람, 다행히도 시체를 찾는다. 하지만 '다행'이 아니었다. 회사 야근담당자와의 통화에서 듣게 된 충격적인 이야기. 이럴수가^^
보통 쇼트-쇼트는 여기서 끝난다. 충격적 반전과 좌충우돌 시체운반기, 그리고 공포미스터리와 코미디가 뒤섞인 독특한 분위기까지. 하지만 [시체 만세]는 이게 다가 아니다. 범죄조직 똘마니[2], 남편을 살해한 부인과 내연남[3], 안과의사의 이야기[4]가 각각 추가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영구차 두 남자가 발견한 시체와 얽혀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설정, 시체확보에 혈안이 된 블랙유머적 설정,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표제작 [왕자가 되지 못한 왕자](p.70)은 최고의 작품이다. 호시 신이치의 작품 중 손에 꼽을 만한 명작이라 생각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소재는 동화의 패러디이다. 어떤 동화일까? 놀라지 마시길. '왕자와 거지, 백설공주, 벌거벗은 임금님, 신데렐라, 피리부는 노인, 피터팬'. 무려 여섯 작품. 이 모두를 한 작품에서 패러디 한다. 주인공은 '왕자와 거지'의 거지소년 '톰 캔트'. 그는 동화 속을 누비며 잠깐동안 왕자가 되기도 하고, 백설공주의 긴 잠을 깨우는 기사가 되기도 한다. 결말은? 읽어 보시길^^ 그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최고의 걸작.
[수용](p.202)도 인상적이다. 아름다운 구미코에 푹 빠져 있는 주인공, 구미코 역시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뿐이야."라며 주인공의 사랑에 답한다. 이들 앞에 나타난 침입자, 주인공과 구미코는 납치당한다. 놀랍게도 침입자는 외계문명에서 온 달팽이 모습의 외계인이었다. 이들은 지구침입 전 지구인의 생태를 조사하려고 이들을 납치한 것이다. 외계인의 실험대상이 돼버린 두 사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서술트릭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의문투성이 접대업소 '매혹의 성'에 얽힌 이야기 [매혹의 성](p.118), 속고 속이는 사회에서 인생을 망친 영업사원의 이야기 [선량한 시민동맹](p.139)도 흥미롭다. 누누이 말했지만, <왕자가 되지 못한 왕자>는 지금까지 읽은 플라시보 시리즈 중 최고다.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썼을 뿐, SF라든지 쇼트-쇼트 스토리라든지 하는 타이틀에 그다지 연연해 하지 않았다"라는 호시 신이치의 말처럼, '호시 신이치=쇼트-쇼트'라는 공식은 무의미하다. 쇼트-쇼트가 아닌 작품에서도 그의 매력은 여전히 빛을 발한다. 남은 것은 즐기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