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래의 이솝우화 ㅣ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1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 / 지식여행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어릴적 짧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단편집을 많이 읽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나서는 기억에 남는 단편집(실제로는 장편掌篇집)이 없다. 변변히 읽을만한 책조차 없었다. 마치 '장편掌篇은 어린아이들의 전유물일 뿐이다'라는 대명제가 성립해 있는 듯 했다. 호시 신이치의 <미래의 이솝우화>를 읽으며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무척이나 재미있어서 항상 곁에 두었던 당시의 책을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미래의 이솝우화>는 짧은 이야기에 굼주렸던 이에겐 최고의 선물, 마치 비타민같은 책이다.
<미래의 이솝우화>는 호시 신이치의 플라시보 시리즈, 첫번째 작품이다. 호시 신이치는 '초단편 소설(Short-Short)'이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일본 SF의 1인자로, 그의 작품은 세계 30여개국에 소개되어 3천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앞날개 참조) 한 두페이지 분량의 짧은 이야기로, 다른 문화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한정되어 있는 공간속에서 깊고 깊은 문화적 차를 극복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짧은 이야기를 읽고 "그래서? 그런데 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바로 뿌리깊은 문화적 차이 때문) 그럼 호시 신이치는 어떻게 이를 극복한 것인가? 그건 바로 그의 범인류적 상상력, 구체적인 지명이나 고유명사 사용을 배제하는 서술상 특징 덕분이다.
'미래의 이솝우화'로 소개된 일곱 이야기는 메인메뉴 전 나온 수프 같은 느낌이다. 감탄할 정도는 아니지만 재미있었다. 동화의 패러디란 점에서 기류 미사오의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와 유사하며, 혹시 호시 신이치의 작품에서 착안한 건 아닐까란 생각까지 들었다.
'머리가 큰 로봇'(p.41)부터 호시 신이치의 진면목이 빛을 발한다. SF적 상상력이 가미된 기발한 작품이 이어지는 것이다. 뭐낙 짧은 이야기라, 줄거리를 소개한다는 것 자체가 조심스럽다. 잘못하다가는 전체를 누설할까 봐. 아무튼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야기 둘을 소개한다.
[좋은 상사](p.77) 동경하던 회사에 입사한 청년, 그 회사는 인간적인 친밀감이 넘친다는 소문이 자자한 곳이었다. 계장에 이끌려 술집에서 회포를 풀던 청년은 다툼에 휘말리고 커다란 사고를 친다. 이때 계장은 말한다. "회사의 중책을 맡고 있는 나로서는 그런 일을 방지해야 할 책임이 있지. (중략) 내게 맡겨 두게. 내 쪽이 인생경험도 더 풍부하니 내게 일임하고 서둘러 자리를 피하게. 자, 어서 빨리…"(p.80) 직장상사의 저런 모습에 감동하는 청년. 상사는 저 일뿐 아니라 다른 고민거리 역시 나서서 해결해 주고, 청년은 상사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충성을 다한다. 시간이 흐르고 청년은 계장으로, 계장은 과장으로 승진한다. 그리고 계장이 된 청년은 신입 부하직원을 받아 들이는데…. 여기까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벌어질 법한 현실성 있는 이야기.
[소년과 부모](p.131) 조금은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설정일 수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비현실적이거나 허무맹랑하지 않다. 어쩌면 지구 어디선가는 벌어지고 있는 일일지도. 17살 난 망나니 자식이 있다. 용돈을 주지 않는다며 부모에게 고래고래 소리치고 물건을 던지는 그런 자식. 소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그 약점을 역이용해 마구 행패 부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상하게 흘러간다. 갑자기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사내, 그는 누구인가?
컬트적이고 무거운 작품만 있는게 아니다. [어느 날 밤에 생긴 일](p.155)은 산타클로스가 등장하는 훈훈한 이야기이다. 또한 공포물을 연상시키는 오싹한 작품도 있다. [이별의 꿈](p.129). 이 작품은 두페이지 분량밖에 되지 않지만, 강렬함은 엄청나다. 사형수의 남은 날을 함께해주던 형무소장의 이야기인 [상냥한 인품](p.94)역시 약간 공포스런 분위기.
플라시보 시리즈 첫번째 작품, <미래의 이솝우화>로 호시 신이치를 처음 만났다. 그 명성 그대로였다. 일본 SF의 1인자다운 기발하고 환상적인 이야기 퍼레이드에, 읽는내내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츠츠이 야스타카의 기발함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호시 신이치는 운명이다. 아니, 그들 이상의 무엇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사실, 이미지파일로 보여지는 책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책표지는 전혀 그렇지 않다. 표지에는 홀로그램 입체처리된 문양이 들어가 있고, 태양문양의 플라시보 시리즈 마크도 있다. 색동옷 같은 표지색감도 실제로 보면 예쁘다^^ 이미지파일로는 전혀 색감이 살지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