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 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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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엔 <모방범>에서 대활약했던 르포라이터 마에하타 시게코가 재등장한다. 모방범사건이후 9년이라는 시간적 설정부터, 곳곳에 남아있는 생채기까지, <낙원>을 <모방범>의 후속편으로 봐도 큰무리는 없다. 마에하타 시게코란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야베 미유키는 "쓰는 것이 직업인 마에하타는 여러 면에서 저와 공통되는 점이 많다"(문예춘추)고 말할 정도로 이 인물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난 소설 속 마에하타의 모습에서 어느 순간, 미야베 미유키를 발견했다.) 그렇기에, 마에하타 시게코가 등장하는 작품은 결코 <모방범>, <낙원>으로 끝나지는 않을거라 믿는다. 마에하타 시게코 시리즈의 대폭풍을 예견하는 건 너무 성급한 것일까?

마에하타 시게코 앞에 하기타니 도시코가 나타난다. 도시코는 죽은 아들(히토시)이 초능력자였다면서 아들이야기를 기사로 써달라고 부탁한다. 도시코는 그 증거로 히토시의 스케치북과 노트를 보여주는데, 거기엔 자신의 사고를 예견하는 듯한 트럭그림, 떠들석 했던 살인사건(부모가 딸을 살해하고 집 마루에 16년간 숨겨왔던 사건)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시게코는 과연 이 문제에 개입해야 할지 고민한다. 모방범사건의 충격에서 조금씩 벗어나 안정을 찾아가던 시게코에게 생면부지 소년의 초능력따위를 조사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충격적인 그림을 보고야 만다. 소년은 모방범사건의 연쇄살인범들이 아지트로 썼던 산장(p.127)과 그들이 묘비 삼았던, 일반에게 공표되지 않은 페리뇽 병(p.138)을 그려 놓았다.

시게코는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한다. 히토시가 어떻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었는지. 가능성은 두가지다. 히토시가 정말 초능력자이었던가, 어떤 계기를 통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알게 되었던가. 여기서 좀 더 생각해 볼 것이, 왜 시게코는 히토시에 대해 조사하려는 것인가이다. 물론,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위에서 이야기한 모방범사건 관련 그림때문이다. 여기에 조사를 원하는 어머니 도시코의 착실한 행동거지, 간절한 바램과 아직 아이가 없는 시게코, 쇼지의 상황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봐야한다.

시게코는 먼저 하기타니家의 내력을 조사한다. 도시코가 말하는 자신의 가족, 성장, 히토시의 출생은 충격적이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이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읽으며 이 부분이 지나치게 자세해 의아했는데, 의도적인 것이었다. 미야베 미유키의 말을 들어보자.

"특별히 의식하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1권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하기타니 집안의 과거」는 굉장히 쓰고 싶었던 부분이었습니다. (중략) 하기타니 집안에는 치야라는 가장이 있었고, 그녀가 '천리안'의 소유자였다는 건 소설이기에 가능한 과장된 표현이지만, 아무튼 그녀의 영향력 아래에서 도시코는 스스로의 인생을 만들어 갔습니다. 우리들은 가부장제를 악습이라고 비판하지만, 개인의 자유만을 존중해도 문제가 생기고 전부를 가장의 뜻에 따르더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다고는 할 수 없는 게 아닐까요? 이런 생각을 표현해보고 싶어서 하기타니 집안의 역사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게 되었습니다."(문예춘추)

즉, 가부장제가 공고한 '하기타니家'의 모습(치야의 영향력-->도시코 억압)과 가부장제가 붕쇄된 '도이자키家'의 모습(도이자키 겐의 영향력-->아카네 통제불가)을 동시에 그려가면서, 가부장제와는 무관하게 발생하는 가족내 문제를 균형있게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아무튼 조사는 계속된다. 히토시를 가르쳤던 이토선생, 하나다선생을 만나고(p.239이하), 아카네 살해사건을 담당했던 노모토 형사를 만나고(p.283이하), 아카네부모를 변호했던 변호사 다카하시까지 만난다.(p.332이하) 이런 일련의 흐름은 세키네 쇼코를 추격하던 <화차>와 유사하다. 근래 출간된 미야베 미유키의 다른 작품을 접하며 아쉬움과 일종의 배신감까지 느꼈던 나로서는 이는 다행스럽고, 즐거운 일이었다. 한마디로, <낙원>은 가장 미야베 미유키적인, 미야베 미유키만의 작품인 것이다.

처음 히토시의 미스터리한 그림과 초능력에 초점을 맞추던 시게코의 조사는 점점 방향을 달리한다. 초점이 히토시의 그림에 등장했던, 부모가 딸을 살해한 아카네 살해사건으로 향한다. 특히 아카네의 여동생 세이코와의 만남, 의뢰(p.373)와 히토시의 능력에 대한 시게코의 결론(p.435 구체적으로 무었인지는 말하지 않겠다.)이후로는 아카네 살해사건만이 이 작품의 주요사건으로 부각된다. 이후 조사과정에서 밝혀지는 아카네의 비행행각, 남자친구 시게, 여기저기 빛을 지고 있던 아버지 도이자키, 푸른하늘 모임의 숨겨진 비밀 등등. 시게코는 서서히 숨겨진 진실로 접근한다.

구성상 주목할 것은 중간중간 짧게 삽입되어 있는 '단장'이다. 단장은 초등학생 미키가 통학로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는 내용(역시 자세한 언급은 피하겠다)인데, 굉장히 짧은 터치로 그려지기 때문에 미스터리함이 배가된다. 읽는 입장에서는 여러 의문점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다. '미키란 아이는 누굴까? 발견한건 뭐지? 시게코가 조사하는 사건과 단장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등등. 이런 의문은 결말에 가서야 해소된다. 미야베 미유키다운 노련한 구성.

<화차>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이 작품을 능가할 작품은 앞으로 나오지 않을거라 믿었다. 저것이 미야베 미유키의 정점이라 믿었다. 하지만, 성급한 판단이었다. <낙원>을 읽고난 지금, 난 미야베 미유키의 정점에 서있다. 지금까지 일본소설에 했던 모든 코멘트를 유보한다. 모든 것은 <낙원>의 아래에서 재정립되어야 한다.

 


* 왜 제목이 '낙원'일까? '낙원'은 어떤 상징성을 가질까? 낙원의 의미는 가족과 관련지어야 할 것 같다.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보면, 모두 정상적인 가족관계와는 거리가 있다. 도시코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치야에 의해 인생을 망쳤고, 세이코는 부모와 자녀(아카네)의 갈등 틈바구니에서 상처를 입었다. 또한 시게코조차도 아이의 부재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도시코가 히토시를 추억한 것이나, 도이자키가 딸을 살해한 것이나, 결국은 화목한 가족공동체에 대한 희구가 바탕에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야베 미유키는 억압적인 가부장제 가족이던, 아버지가 없는 편모가정이던,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있는 가정이던간에, 가족간의 사랑과 이해가 넘치는 화목한 가족공동체를 낙원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조금 모호하지만, '낙원'의 이미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미야베 미유키의 답을 들어보자. "가족 중 누군가가 버림받음으로써 그걸 계기로 당사자를 제외한 가족들이 하나로 뭉쳐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건, 어쩌면 현실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중략) 무언가를 내치지 않고는 행복해질 수 없는, 그런 낙원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잘 모르지만 아담과 이브가 추방당했다는 그 낙원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심이 가요. 일본의 토착종교나 불교 등과는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이니까요."(문예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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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 2008-07-07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요한 뼈는 모두 추려주셨지만 역시 미미님의 책은 읽어야만할 의무감이 넘치는 작품인것 같네요. 리뷰가 자세해서 보는 저는 좋지만 길어서 쓰는데만도 고생하셨을듯^^

쥬베이 2008-07-07 10:16   좋아요 0 | URL
자세해서 읽기도 힘드시죠?ㅋㅋㅋ
재미있게 읽어서 쭉쭉 쓰다보니 길어졌어요.
미미여사님 팬이라면 <모방범>과 더불어 꼭 읽어야 할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