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키핑
메릴린 로빈슨 지음, 유향란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하우스 키핑>을 읽으며 박완서 작가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떠올렸다. 좀 더 차분하고 쓸쓸하지만, 유년시절을 이야기하는 여성화자의 모습은 분명 통하는 면이 있다. 차분? 쓸쓸? 맞다. 이 책은 쓸쓸하고 몽환적이며, 어찌보면 황량한 분위기까지 풍긴다. 큼직한 사건이나 놀라운 반전 역시 없다. 이쯤에게 고개를 드는 의문 한가지. "그럼 지루한 책 아냐?" 결코 아니다. 잔잔한 분위기 이면에 묵직한 울림을 간직한 책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감미로운 문체다. 마치 시를 접하는 듯한 아름다운 문장이 가득하다. 노트에 옮겨적고 오래 음미하고 싶은 그런 글들. '한 문장 한 문장이 즐거움을 주기에, 서둘러 읽지 말라'라는 도리스 레싱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하우스 키핑>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한집에 살게된 루디, 루실 자매와 이모 실비의 이야기다. 이들은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실비는 방랑벽때문에 오래 외지를 전전하다 돌아왔으며 정신이상이 의심될 정도로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 루디, 루실 자매는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의 자살등 힘겨운 환경속에서 자라왔다. 이들의 이야기는 루디의 시각을 통해 전달된다. 사춘기소녀의 내밀한 감정은 소설의 분위기를 한층 감성적이고 아름답게 이끈다.

이들의 위태위태한 생활은 루디와 루실이 자라면서 새로운 양상을 띤다. 루실은 점점 외모와 다른이의 시선에 신경을 쓰고, 기괴한 행동(컴컴한 어둠속에서 저녁먹기, 옷과 신발을 신고 잠자기, 깡통과 헌잡지 수집하기 등등)을 하는 이모를 배척한다. 반면, 루디는 이모와 좀 더 친근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런 시각차는 자매간 갈등의 요인이 되고, 결국 루실은 집을 떠난다.(p.190) 루실이 떠난 후, 루디와 이모는 더욱 친밀해진다. 이들이 보트를 훔쳐타고 함께 떠난 여정(p.204이하)은 이 작품의 첫번째 하이라이트이자,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절정이다.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 꼭 찾아 보시길.

한편, 이모의 기괴한 행각에 이웃들과 법원은 루디를 이모에게서 떼어 놓으려 한다. 이모는 그간 돌보지 않던 집안일을 하고 깡통등을 치우는등 변화의 모습을 보이지만, 일련의 법적조치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헤어지게 될 위기 상황. 여기서 '이모, 루디 vs 이웃, 법원, 루실'의 대립구조가 극명하게 드러나며, 이는 곧 비非하우스키퍼 vs 하우스키퍼의 대립이다. (일련의 서술-특히 결말-을 비추어 볼 때, 저자가 제목인 '하우스 키퍼'에 어떤 의미를 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우스키퍼에 맞서, '결단'을 내리는 이모와 루디의 모습이 두번째 하이라이트.

<하우스 키핑>, 오랜만에 접하는 잔잔하고 품격있는 작품이다. 보석같은 문체, 깊은 상징성, 진한 여운으로 오래 기억되는 그런 소설. 타임선정 100대 영문소설이란게 무색하지 않게 '고전'의 진정한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읽을 때보다는 두 번째가, 두 번째보다는 세 번째, 네 번째로 갈수록 점점 더 작품에 빠져 들었다'는 역자의 말처럼 조금씩, 여러번 음미하면서 읽으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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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 2008-04-14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소개해주신 부분에 보면 감미로운 문체와 시를 접하는 듯한 아름다운 문장이 가득하다고 하셨는데 마음이 복잡하고 심란할때 잔잔하게 읽어보면 좋을 책 같아요. 잘 읽고 갑니다.^^

쥬베이 2008-04-14 17:12   좋아요 0 | URL
네^^ 추천합니다.
문장 하나하나 깊게 음미하면서 읽을만한 책이에요.
성장소설 느낌도 있고, 페미니즘 시각에서 읽을 수도 있어요~
단, 다소 쓸쓸한 분위기란게 꺼려질 수 있답니다. 우울한 분위기??ㅋㅋㅋ

2008-04-14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쥬베이 2008-04-14 17:13   좋아요 0 | URL
앗! 얼마만이에요^^ 반갑습니다.
친구분이 요 출판사에 계시는군요. 이래저래 반가워요ㅋㅋㅋ

2008-04-15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쥬베이 2008-04-15 10:59   좋아요 0 | URL
아하, 그렇구나.
친구분덕에 저런 멋진 작품을 읽을 수 있었어요.
나중에 만나시면, 대신 감사인사좀 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