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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버린 여인들 - 實錄이 말하지 않은 이야기
손경희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몇 분만에 수강신청이 마감되는 인기많은 교양강의를 듣는 것 같다'는 생각. 전공이 아니라 깊이 파고들 수 없지만, 흥미로운 주제에 충분히 빠져들 수 있는 그런 교양강의 말이다. 저자가 '한국역사 속의 여성'을 강의하면서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 책을 서술해서 그럴까? 아무튼, 부담없이, 흥미롭게 읽었다.
<조선이 버린 여인들>은 지배질서에 희생된 여성 33명의 이야기다. 꼭지당 10페이지 정도 분량이며, 중간중간 '깊이 읽기'를 통해 깊이 있는 분석을 시도한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소개한다.
'배다른 남매를 결혼시키려 한 소근'(p.60) 소근은 아들 '어연'을 데리고 임수산에게 첩으로 들어온다. 임수산은 곧 병으로 본처가 낳은 딸 복비만을 남긴채 죽는다. 문제가 발생했다. 어연이 복비에게 욕정을 느낀 것이다. 이를 알아챈 소근은 아들이 애태우는 모습을 볼 수 없어 음모를 꾸민다. 결국 복비를 강간하는 이들 모자. 한편, 복비와 혼담이 오가던 박아생은 이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고 관아에 고소한다. 사건은 왕이 직접 처결하는 문제로 확대된다.
강간당한 복비는 피해자다. 하지만, 조정관리들은 이상한 논리를 펼친다. "처음에는 비록 좇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스스로 좋아 잘 지냈으니 큰 죄입니다. 마땅히 사형으로 처단할 수밖에 없습니다."(p.67) 즉, 복비 역시 근친상간의 당사자이며 이를 거부하지 않았으니 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논리다. 이 책에 소개된 여성들 모두 저런 해괴한 논리때문에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처럼 처벌당했다. '흥미롭게' 읽었다고 했지만, 읽는내내 마음 한편이 편하지 않았다.
'남편을 조롱하고 본처를 학대한 첩 경비'(p.211) 보통 본처가 첩을 학대하는데 이는 반대의 구조다. 남편 유완의 사랑을 등에 업은 경비는 안하무인이었다. 본처 홍씨를 종처럼 여기고 몽둥이로 마구 때렸다고 한다.(p.212참조) 첩을 사랑해 처를 내쫓는 것을 '기처'라고 하며, 가정내의 상하질서를 어지럽힌다 하여 엄한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유완과 경비의 행동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사헌부의 탄핵으로 이들 문제는 왕에까지 전해진다. 결국, 경비는 변방관비가 되고, 유완은 먼지방에 부처된다.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간통한 여인 파독'(p.297) 윤리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저런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니 의외였다. 천한 계집종 이었던 파독은 얼굴이 해맑고 아름다웠다 한다. 박저생은 그녀를 첩으로 삼았는데, 박저생의 아버지 박침 역시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는지 파독을 강간해 버린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강간하는 그야말로 어이없이 일이 벌어진 것. 하지만, 박저생은 반발할 수 없다. 박침이 파독을 자기 첩으로 삼아버린데다 아버지를 모함하면 십거지악에 걸려 자신이 처벌받는 상황인 것이다. 박침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파독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과연 이 사건은 어떻게 문제되고, 어떤 처벌을 받을까?
뭐낙 비슷한 포맷의 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 걱정도 했다. 하지만, <조선이 버린 여인들>엔 차별화된 뭔가가 있다. 이야기 말미에 약간의 문학적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고, 관련 논문까지 바탕으로 한 '깊이읽기'도 좋았다.(p.50,51엔 당시 형벌을 도표로 설명하기도 한다) 소외되고 관심권 밖에 있던 여성들을 조명했다는 점이야말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이라 생각한다.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이 궁금하다면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