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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 역사를 뒤바꾼 치명적 말실수
이경채 지음 / 현문미디어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계륵'이란 말이 있다. 촉의 한중을 공략하기 위해 대치하던 조조가, 진격하지도 그렇다고 물러나지도 못하고 고민하다 닭갈비를 뜻하는 계륵을 암호로 정했다는. 그때 계륵의 의미를 간파해 퍼트린 양수는 결국 죽임을 당한다. 그야말로 목숨을 앗아간 치명적 말실수인 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조조는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었다. 관도대전 후 원소와 내통했던 이들을 살려둔 조조아닌가? 양수의 죽음은 단지 그의 말실수 때문만은 아니다. 조조 아들간 벌어진 후계 다툼에 그가 깊이 간여했기에 조조는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말실수를 빌미로 죽인 것이다.
이처럼, 단수한 말실수 때문에 죽임을 당하거나 집안이 몰락하는 경우 같아도, 그 이면엔 정치적 역학관계 내지 다양한 제반사정이 숨겨져 있다. <설화, 역사를 뒤바꾼 치명적 말실수>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저자 역시 '남이의 죽음'을 단순한 말실수 때문이 아닌 '신진세력과 훈구세력간 갈등'때문으로 이해(p.122이하)하고,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죽음'도 태종의 왕권강화와 관련지어 살펴본다. 공감할 만하다.
<설화, 역사를 뒤바꾼 치명적 말실수>는 조선개국에 큰 역할을 한 정도전의 설화를 시작으로,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의 충격적 설화를 이야기한다. 자칫 딱딱해질 수도 있는 이야기를 저자는 부드럽고 흥미있게 서술한다. 꽤 많은 대화도 오가는데,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 제목부터 '말실수, 설화'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말실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것까지-혹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까지-말실수 때문이라고 단정지어 버린다.
한 부분을 보자. '따라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제1차 왕자의 난'은 정도전이 내뱉은 말실수 때문에 빚어진 잘 짜인 한 편의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다.'(p.64) 이건 지나친 확대해석이다. 물론 정도전의 말실수가 이방원에게 뭔가 '영향'은 미쳤겠지만, '말실수 때문에 짜인 시나리오'라 하는건 억지다. 이처럼 이 책은 제목(이 책의 기획의도)에 사로잡혀 간혹 지나친 확대해석을 하고 있다. 정도전의 말실수를 다룬 제1화, 신숙주의 아들 신정의 이야기를 한 제4화, 사도세자를 모함한 나경언 이야기인 제7화는 말실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흥미로웠던 건, 제4화 '신숙주의 골칫덩어리 아들 신정'(p.133)이었다. 세종 대부터 성종 대가지 4대 임금으로부터 대학자로 추존되던 정치가 신숙주. 그에게 신정 같은 개망나니 아들이 있었다니…놀라운 일이다. 신정의 행각은, 아비의 권력만 믿고 날뛰는 영화속 쓰레기들과 꼭 같다. 아비 덕에 음직으로 관직에 진출한 뒤 급제하기 위해 부정행위를 하고, 온갖 진귀한 물건들을 가로채고, 왕에게 도토리 20만석을 구해 백성을 구휼했다며 거짓말까지 한다. 어이없다 못해, 쓴웃음까지 난다. 신숙주의 강력한 지지로 왕권에 오른 성종, 과연 그는 신정을 어떻게 처리할까?
<설화, 역사를 뒤바꾼 치명적 말실수>, 흥미로운 책이다. 소설처럼 부드럽게 읽히고, 인물들의 대화역시 생생하다. 기존 역사관련 책과는 분명 다르다. 역사에 관심 있지만,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하셨던 분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