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파괴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구판절판


사람에게 마약 같은 영향을 미치는 나라들이 있는 법이다. 중국이 바로 그런 경우로, 중국은 그곳에 갔던 사람들로 하여금 한결같이 잘난 체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단순히 그곳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들에게도. 사람들이 책을 쓰는 것은 그렇게 잘난 체하고 싶어서가 아니겠는가? 중국에 대한 책이 많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9쪽

중국만큼 사람을 장님으로 만드는 나라도 없다. 일단 중국을 떠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본 것들 중에서 멋진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공정을 기하려는 의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도처에서 목격한 더러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마는 경향이 있다. 정말이지 기이한 현상이 아닌가? 감추려는 노력조차 없이 자신의 수많은 신체적 결점들을 상대로 하여금 잊어버리게 만드는, 모든 애인들을 사로잡는 노련한 창녀, 중국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11쪽

전쟁은 1972년 시작되었다. 1972년은 내가 어마어마한 사실을 깨달은 해였다. 이 세상에서 없어서 안 될 것은 바로 적이라는 사실을. 적을 갖지 못한 인간은 보잘것 없는 존재다. 적이 없는 삶은 허무와 권태의 구렁텅이, 가혹한 시련이 아니겠는가? 적이야말로 구세주다. 적의 존재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역동적으로 살 수 있다. 적이 있음으로써 삶이라는 이 음울한 사건은 웅장한 서사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지당했다.-18쪽

눈은 톱니 모양의 물, 얼어 있는 모레, 지상이 아닌 하늘의 소금, 맛은 짜지 않은 부싯돌, 구조는 접혀 있는 싹, 냄새는 추위, 색깔은 구름으로부터 떨어지는 유일한 빛깔인 흰색. 눈은 모든 것-소리, 낙하, 시간-을 누그러뜨림으로써 피나 빛이나 환상 같은 영원하고 불변한 것들에 더욱더 큰 가치를 부여했다. 눈은, 그 위로 수많은 발자국과 수많은 흔적들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역사의 첫 페이지, 눈은 최초의 문학장르, 추적의 흔적과 적이 이동한 길만을 다룬 대지에 맞먹는 거대한 책, 아주 작은 흔적이 알 수 없는 의미를 띄는-자기 형제의 발자국과 형제를 죽인 자의 발자국을 구별할 수 없는-지리의 서사시가 아닐까?-141쪽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갈망하는 것이 전쟁인 줄 알지만, 실제로 그들이 꿈꾸는 것은 결투이다. <일리야드>를 읽다 보면 때때로 몇 가지 선택된 적대 관계가 병치되어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영웅들은 상대 진영에서 자신에게 지정된 신화상의 적수를 찿아낸다. 그를 죽일 때까지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고 상대 역시 마찬가지인 그런 인물을. 하지만 그런 것을 전쟁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은 개인주의 자존심을 전제로 하는 애정의 산물일 뿐이다. 영원한 적수, 자기만의 적수와 멋진 결투를 꿈꾸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에게 걸맞은 상대와 한판 붙기 위해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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