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04년 11월
구판절판


가슴은 청소년기의 여자아이들을 강박적으로 사로잡는 문제다. 가슴이 막 생겨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에 도무지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엉덩이의 변화는 덜 놀랍다. 엉덩이는 변화될 뿐, 추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융기는 소녀들에게 오랫동안 생경한 것으로 남는다.-36쪽

화요일에서 수요일로 넘어가는 밤 동안 나는 비극적 희열을 느끼며 내 방의 고독을 음미했다. 이것만은 내 것이라고 믿었던 그 보잘것없는 것조차 결국 나는 소유하지 못했다. 아니 소유했다 하더라도 너무도 불안정한 방식의 소유였기에 몰수당할 수밖에 없었다. 버림받은 처녀들의 보물, 혼자만의 방이라는 꿈의 공간 역시 몰수당하게 되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곧 박탈당할 그 공간 속으로 깊이 젖어들었다. 태어나서 줄곧 지켜온 나의 성전, 내 유년기의 사원, 사춘기의 절규가 울렸던 나의 공명상자.-62쪽

그녀의 여러 가지 면이 나를 화나게 하지만 그 중에서도 당연하다는 듯이 '이해하겠니?'로 말을 끝내는 방식이야말로 정말 짜증났다. 마치 상대방이 자기 말의 섬세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리라는 투였다.-68쪽

크리스타와 만나기 전만 해도 책 읽는 것이 나의 행복 가운데 하나였다. 책 한 권을 들고 침대에 누워 읽노라면 나 자신이 책이 되는 것 같았다. 좋은 소설을 읽을 때면 난 소설과 하나가 되었고, 시원찮은 소설일지라도 몇 시간이고 멋진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찾고 미흡한 부분들을 비웃으며 즐겼던 것이다.-70쪽

"학생들 파티란 정말이지 구세군 같지 뭐야! 아무도 원하지 않는 재고품들까지 찿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야!" 그러고는 화들짝 웃는다. 나는 경악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를 모욕하고 즐거워하는 게 보였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한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저 애의 이름은 크리스타가 아니야! 앙테크리스타(Antechrista, 종말 직전에 나타나 혹세무민한다는 사이비 그리스도 앙테크리스트 Antechrist를 연상시키는 이름 : 옮긴이)야!-80쪽

대개 누군가가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를 결정하려면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문제는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며, 게다가 어느 한 사람의 신비의 열쇠가 거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외모란 그저 하나의 수수께끼에 지나지 않으며, 유달리 까다로운 수수께끼도 아니다. 하지만 크리스타의 경우는 달랐다. 그녀가 멋진 몸매를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얼굴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기가 힘들었다.-86쪽

아르셰(archee)는, 다리가 미치는 거리를 보폭이라 하듯, 화살이 미치는 사정거리를 말한다. 이 말 만큼 나를 꿈꾸게 하는 말도 없다. 이 말에는 끊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시위가 당겨진 화살, 그리고 무엇보다 시위가 당겨지는 숭고한 순간, 쏘아진 화살이 솟수쳐 날아가는 순간, 무한을 향한 지향, 그리고 활의 욕망이 제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화살이 날아갈 수 있는 거리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의연한 실패, 한참 날다 멈춰버리는 활기찬 추진력들이 내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아르셰'는 멋진 비약이요,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를 내포하고 있으며, 한순간에 불타버리는 순수한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92,93쪽

나는 크리스테(christee)라는 말을 지어냈다. 크리스타의 사정권. 크리스테는 크리스타의 독이 미치는 반경을 의미했다. 크리스테는 아르셰만큼이나 방대했다. 크리스테보다 훨신 넓은 개념도 있다. 앙테크리스테다. 그것은 내가 일주일에 닷새를 그 속에서 생활하는 저주스런 반경, 지수함수의 원주다. 앙테크리스타는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으니까. 내 방, 내 침대, 나의 부모, 그리고 내 영혼까지 차곡차곡 점령해갔으니까.-93쪽

불행이 가져다준 좋은 점도 있었다. 나의 방과 책 읽을 권리를 되찿은 것이다. 이 시기만큼 책을 열심히 읽은 적이 없었다. 과거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앞으로 다가올 위기 상황에 맞서기 위해서도 나는 탐욕스레 책을 읽었다. 책읽기를 도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리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책읽기란 가장 정신집중이 된 상태에서 현실과 대면하는 것이다. 묘하게도 그것이 언제나 흐리멍텅한 상태로 현실에 뒤섞여 있는 것보다 덜 두렵다.-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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