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구판절판


내 앞 2미터 떨어진 곳, 내 눈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고혹적이었다. 자신이 들여다보는 숫자들 위로 숙인 눈꺼풀 때문에 그녀는 내가 자신을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분별해 낼 수 있는 오묘한 콧구멍이 있는 흉내낼 수 없는 코, 일본 사람 특유의 코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일본 사람들의 코가 이렇게 생긴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코가 이렇게 생겼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일본인일 수밖에 없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이렇게 생겼더라면, 이 때문에 세계 지도가 아마 엄청나게 변했을 것이다.-11쪽

갑자기, 내 몸의 줄이 풀렸다. 나는 일어났다. 자유로웠다. 한 번도 이만큼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나는 창문까지 걸어갔다. 환하게 불을 밝힌 도시가 내 밑에 아주 멀리 있었다. 나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신이었다. 몸에서 벗어나기 위해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네온 형광등을 껐다. 멀리서 비치는 도시의 불빛만으로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부엌에 가서 코카콜라를 찿아서는 단숨에 들이켰다. 경리부로 돌아와서 구두끈을 늦춘뒤, 구두를 홱 벗어 던졌다. 책상으로 껑충 뛰어오른 뒤 환성을 지르며 이 책상 저 책상으로 뛰어다녔다. 몸이 너무 가벼워 옷이 거추장스러웠다.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은 뒤 주변에 널어놓았다. 발가벗은 몸이 되었을 때 머리로 물구나무를 섰다 -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물구나무서기에 성공하지 못한 내가 - 물구나무를 선 채 근처에 있는 책상들을 돌아다녔다. 그 다음 한 번 구르면서 완벽하게 재주넘기를 한 뒤 튀어 올라 내 상사의 자리에 앉았다.-64쪽

언제 죽을지 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계획적으로 시간을 쓰고 생의 마지막 날을 예술 작품처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사형 집행인들이 당도하면 나는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제가 죽을죄를 졌습니다! 저를 죽여 주십시오. 그런데 제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저의 목숨을 끊는 게 후부키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녀가 후추통을 열듯이 뇌를 돌려 열어 주기를 바랍니다. 내 피가 흐를 것이고 그건 흑후추일 것입니다. 집어서들 드세요,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들과 군중을 위해 쏟아진 나의 후추, 새로운 불멸의 동맹을 뜻하는 후추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추모하며 재채기를 하게 될 것입니다." 갑자기, 추위가 엄습해 온다. 컴퓨터를 팔로 끌어안아도 소용없다. 그건 몸을 데워 주지 못한다. 나는 다시 옷을 걸친다. 그래도 여전히 이가 딱딱 마주치기 때문에 바닥에 누운 뒤, 내 위에 휴지통의 내용물을 엎지른다. 나는 의식을 잃는다.-66,67쪽

특이하게도,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다. 극도로 권위적인 제도는, 이 제도가 적용되는 국가에서, 상상을 뛰어넘는 일탈을 불러일으키는데,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또, 기가 찬 상식 밖의 행동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용을 배풀게 되는 것이다. 일본 괴짜를 만나 보지 않았으면 진짜 괴짜를 모르는 셈이다. 내가 쓰레기를 덮고 잠을 잔거? 별 놀랄 일도 아니다. 일본은 '맥없이 무너진다'는 게 뭔지 아는 나라이다.-70쪽

삶이 너에게 무엇이든 가져다 줄 수 있다고 기대하지 마. 해가 지날수록 네게서 무언가 없어지게 될 테니. 평정 같은 단순한 것조차 바라지 마. 너는 평온해질 아무 이유가 없으니까.-74쪽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혹시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하게 되면, 너는 더 불행해질 거야. 남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게 될 테니까. 그를 사랑하지 않는 편이 더 나아. 그러면 그의 이상이 좌절되는 걸 보아도 무관심해질 수 있을 테니까. 네 남편은 아직도 이상理想을 가지고 있거든. 예를 들어 한 여성으로부터 사랑받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어. 하지만, 곧 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가슴을 굳게 하는 석고가 몸에 들어 있는 네가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겠니? 넌 사랑을 할 수 있기에는 너무나 많은 타산打算을 하라고 배워 왔어. 네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교육을 잘못 받았기 때문이야. 신혼 초에 너는 이것저것 안 해보는 것 없이 연기를 하지. 어떤 여자도 너만큼 재능 있는 연기를 못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지.(이어짐)-77쪽

너의 의무는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거야. 하지만 네가 희생한다고 해서 그 대상이 행복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 그냥 그들이 너로 인해 부끄러워하지 않게 될 따름이니까. 너 자신이 행복해질 기회도,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도 전혀 없어. 만약 기적처럼, 네 운명이 이런 예정된 길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절대 승리했다는 결론을 내리지는 마. 네가 착각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 둬. 더구나 넌 그 사실을 아주 금방 깨달을 수 있을거야. 이겼다는 환상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현재를 즐기지 마. 이런 계산 착오는 서양인들의 몫으로 남겨 놔. 현재는 아무것도 아니야. 네 삶도 아무것도 아니고. 1만 년보다 짧은 시간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77,78쪽

과거 일본 황실의 의전儀典에, 천황을 알현할 때는 '두려움과 떨림'의 심정을 느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나는 사무라이 영화의 인물들이 보여 주는 모습에, 사무라이들이 초인적인 숭배의 감정으로 목소리가 녹아들면서 자신의 두목을 배알하는 모습에 그렇게 딱 부합하는 이 표현을 늘 끔찍이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움의 가면을 쓰고 떨기 시작했다. 나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그 처녀의 시선을 응시하며 말을 더듬거렸다.-135쪽

본능적으로, 창가로 걸어갔다. 나는 이마를 창문에 갖다 대고 내가 그리워할 게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44층 꼭대기에서 도시를 굽어보는 것이 모두에게 주어진 기회는 아니었다. 창문은 추한 불빛과 감탄을 자아내는 어둠 사이에 있는, 화장실과 무한無限 사이에 있는, 위생적인 것과 씻어 낼 수 없는 것 사이에 있는, 수세 장치와 하늘 사이에 있는 경계였다. 창문이 존재하는 한은, 세상 사람 누구라도 자신만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나는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내 몸이 떨어지는 것을 쳐다보았다. 창문으로 뛰어내리고픈 갈등이 해소되고 나자, 나는 유미모토 건물을 떠났다. 사람들은 나를 다시는 그곳에서 보지 못했다.-14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