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구판절판


난생처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을 때 난 웃고 말았다. 그게 나라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요즘도 거울을 들여다볼 때면 웃음이 나온다. 그게 나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지독하게 못생긴 얼굴을 보면 웃음이 나오게 마련 아닌가. 난 아주 일찌감치 별명을 얻었다. 여섯 살 때였던가, 학교 운동장에서 반 아이 하나가 나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카지모도!' 아이들은 좋아라 날뛰며 장단 맞춰 빽빽 소리를 질러 댔다. '카지모도! 카지모도!' 사실 녀석들은 빅토르 위고가 뭐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카지모도라는 이름이 나한테 너무나 잘 어울렸기 때문에 녀석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그날 이후 난 어디서나 카지모도로 통했다.-7쪽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꼭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다들 약속이나 한 듯 <외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마음이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외모가 번드르르한 사람들만 추켜세우고 나 같은 못난이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 한다. 자기네들이 그러는 줄 알고나 있을까. 바로 그것 때문에 나는 더 화가 난다.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거짓말을 해댄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한테 대놓고 쏘아붙였으면 좋겠다. "정신적인 인간인 척하는 게 즐거우면 그렇게 하시지. 겉만 보고 사람됨을 판단하지 않노라고 주장하는 게 재밌으면 그렇게 하시라고. 하지만 스스로를 속이지는 말란 말이오!"-8쪽

카지모도가 에스메랄다에게 홀딱 반하는 장면에서 독자는 미녀 에스메랄다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을 것이다. "그를 사랑해야 해! 얼마나 착한 사람인데! 겉모습만 보고 지레 겁먹지 말라니까!" 상당히 괜찮은 생각이다. 하지만 왜 에스메랄다한테만 올바른 태도를 요구하는 걸까? 카지모도한테도 그래야 하는 것 아닐까? 사실 그는 여자의 겉모습에만 관심을 갖지 않았던가? 우리는 그가 겉모습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인물이라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이 빠진 노파와 사랑에 빠져야 마땅하다. 그래야 그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지. 그런데 그가 마음에 품은 것은 누구든 반할 수밖에 없는 어여쁜 집시 처녀다. 그런데도 이 꼽추 사내의 영혼이 순수하다고? 단언하건데 그의 영혼은 더럽고 천박하다. 나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내가 바로 카지모도니까.-11,12쪽

난 걸핏하면 그녀에게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곤 했다. 그 이유는 그녀를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건 살면서 내가 해온 일들 중에 가장 즐거운 일이었다. 그녀가 내게 베푼 친절 중에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제 모습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칭찬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넌 정말 아름다워!" 가끔씩 난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그녀는 기쁜 듯 방긋 웃곤 했다. 그녀의 미소에 마음이 완전히 녹아내린 나는 예쁜 여자들한테는 무조건 칭찬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 결과 내게 돌아온 것은 매섭게 흘겨 대는 눈들과 불쾌한 듯 삐죽이는 입들, 그리고 "뭐 저런 얼간이가 다 있담!" 등등의 상냥한 말들 뿐이었다.-39쪽

있잖아, 오늘 밤, 난 엄청난 사실을 발견했어. 내 못생긴 얼굴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나보다 운이 좋은 사람은 없을 거야. 내가 지지리도 못나지 않았다면, 너한테 그런 어마어마한 사랑을 느끼지도 못했겠지. 말이 나온김에 고백할께. 난 널 사랑해 왔어. 처음 본 순간부터, 세상이 끝날 것처럼. 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난 세상에서 가장 못생겼지. 그게 바로 우리가 서로를 위해 태어났다는 증거야. 나는 네 아름다움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고, 넌 내 추함으로만 더럽혀질 수 있으니까. 난 타고난 추접스러움 때문에 괴로워 하는 인간쓰레기, 이런 나 없이 넌 타고난 순수함에 희생된 인간 천사에 지나지 않아. 너는 신의 은총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 널 원해. 난 신이 버린 자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날, 내 욕구를 채워 주려 하지 않아. 잘 됐지. 난 너만을 갈망하니까.-157쪽

"어련하실까. 내가 상황을 한 번 정리해 볼게. 에피판은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남자야. 그렇게 태어난 게 그 사람 탓은 아니지만 뭐 어쩌겠어. 에피판은 자라서 어른이 되고 한 여자를 사랑하게 돼. 어떤 여자? 그의말에 의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불행히도 그 에텔이라는 여자는 그를 사랑하지 않아. 왜? 겉모습에 집착하는 여자라서 그가 얼마나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인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거야. 경박한 에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는데!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지. 어쩌고저쩌고. 불쌍한 에피판, 그 순수한 사랑을 조롱당하다니! 아, 고상한 영혼을 지닌 여자, 추한 몰골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마음씨를 들여다볼 줄 아는 여자를 만났더라면! 하늘 아래 새로운 게 뭐가 있겠어. 이제 바로 그 불쌍한 카지모도가 겪었던 일이잖아. 가엾은 괴물이자 타고난 희생자이며 오직 고상한 감정들만 품고 있는 카지모도가."-165,166쪽

"하지만 그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우리의 카지모도-에피판께서는 고귀한 영혼을 지닌 못난이 아가씨랑 사랑에 빠지지 못했어. 마음속이 보물단지 같은 여자, 정신적인 결합에 만족하는 여자를 만나지 못한 거지. 아니, 우리의 주인공께서는 그런 여자라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얼굴이 좀 아니다 싶은 여자는 모조리 경멸했거든. (중략) 내면의 아름다움에 있어서 최고라고 자처하는 우리 <고운 마음>씨께서는 겉모습에 희생된 척하면서 우리 사회의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지. 그리고 자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점들이 많으니 사랑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해. 그럼 네가 날 사랑하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장점들 때문인데?"-166쪽

"제발 그러지 마. 위선에도 한계가 있어. 나 말고 누굴 사랑해 본 적 있어?" (중략) "그럼 문제가 심각하네. 첫사랑이 얼마나 많은 걸 말해 주는데. 네가 외모 지상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아무리 열나게 외쳐 본들 누가 믿어 주겠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와 사랑에 빠질 날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제 눈에 그렇게 보이는 여자가 나타나자마자 실행에 옮긴 남자가 하는 말인데. 가장 불쾌한 건 그런 네가 날 파렴치한으로 몰아세웠다는 거야. 사실 파렴치한은 너잖아! 넌 나만 너그럽길 바라고 있어. 넌 그렇지 않으면서. 내가 생김새에 연연하지 않길 바랐다가 그 기대가 어긋나니까 희생자 행세를 하고 있는 거 아냐. 그런데 말이야, 내가 너처럼 못난이었으면 넌 날 쳐다보지도 않았을걸!"-167쪽

여기선 내 추한 몰골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걸 볼 사람도 없고, 보여 줄 사람도 없으니까. 마침내 내 연인과 단둘이 있을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내가 없으면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나 말고 누가 기억으로 그녀를 되살릴 수 있단 말인가? 나 말고 누가, 바로 지금, 존재하고자 하는 그녀의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단 말인가?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죽였다면, 그는 그녀를 지옥에서 구해 올 수 있었으리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없다.-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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