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사랑
텐도 아라타 지음, 박태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0월
절판


"누구든지, 자기 아이를 죽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한번쯤은 해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중략) "그러니까, 말하자면 아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역설적인 표현이라고나 할까요. 애정이 강하면 강할수록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지요. 만에 하나라도 사랑하는 아이를 잃게 된다면, 하는 생각에 불안해지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마음에 담아두기 시작하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불안은 점점 더 커지고 그 중압감에 시달리게 되죠. 예를 들면, 아이를 씻기다 잘못해서 물에 빠뜨리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에 불안을 느끼는 것이 바로 그런 거예요. 그 두려움을 견디다 못해 아이 엄마는 자기가 곧 아이를 죽일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남에게 하게 되는데, 그러한 언어적 표출은 당사자가 느끼고 있는 중압감을 다소나마 해소시켜주지요. 아내가 불안감에 못 이겨 그러한 소리를 입 밖에 냈을 때, 남편이 아무 일도 없을 것라며 웃음으로 위로한다면 아이 엄마의 불안은 그만큼 줄어들죠.(이어짐)-42,43쪽

또 친정 식구나 친구들, 집 근처의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누구든지 비슷한 생각을 품을 때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당사자의 마음은 더욱 편안해질 거예요. 하지만 요새는 다들 핵가족인데다 이웃과의 왕래도 거의 없잖아요. 따라서 젊은 부부들은 모든 문제를 둘이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고 또 그러다 보면 가끔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있죠. 나츠미 엄마는 아이의 아토피를 포함해서 육아에 너무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게 좋아요. 아이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생명력을 존중하며 조금 멀리서 아이를 돌보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어요. 남편 분도 불안에 시달리다 못해 툭 하고 내뱉는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이 엄마를 신뢰해주는 겁니다. 아시겠죠?"-42,43쪽

"생각해봐. 무엇보다도 소중한 내 자식이야. 내 뱃속에서 키워 있는 힘을 다해 낳은 아이를 내 손으로 죽일 것 같다고 하는 공포가 어떤 건지 당신 알기나 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지 알기나 하냐고? 나는 그런 어려움을 혼자서 이겨내야 했어. 가장 의지하고 싶었던 당신은 반대로 나를 궁지에 몰아넣었지. 그때의 내 아픔을 당신이 알기나 해?" (중략) "당신이 너무 놀란 나머지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워했던 걸 이애 못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당신은 결국, 스스로가 원하는 이상적인 삶이 흐트러지는 게 싫었던 것뿐이야!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지금 당장의 평온이 깨지는 게 두려웠던 거야. 나나 나츠미도 어쩌면 당신이 행복이라고 이름 지어놓은 퍼즐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은 건지도 몰라."-62,63쪽

"자 그럼, 저는 지금 당신 눈앞에 있습니까?" (중략) "정말로 그럴까요? 저라는 존재는, 어쩌면 당신의 뇌가 인지하고 있는 환상일지도 몰라요. 당신의 뇌, 그중에서도 특히 어느 한 부분이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을 감지해, 다른 부분에 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제가 이곳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거예요. 반대로 만약 당신의 뇌가 어떤 사정으로 저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면 당신에게 저라고 하는 존재는 사라지게 되지요. 제가 아무리 저의 존재를 주장한다 해도 당신의 뇌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저라고 하는 인간은 적어도 당신에게는 존재 하지 않게 되는 거죠."-131,132쪽

"뇌의 일부를 다친 사람이 자신의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는 그리 드물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하기도 하고 없는 물건을 있다고 우기는 경우도 있고요. 뇌가 인식하고 있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져도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거예요. 어쩌면 원래부터 '실제'라고 하는 말은 무의미한 건지도 모르죠. 뇌를 다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과 자신의 존재가 애매해지는 사람도 있어요. 자기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과거나 가족을 만들어내 그것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고요."-132쪽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또 내가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두려움은 물론 위험도 따르게 마련이야. 입원하기 전에는 그 사실을 몰랐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나 스스로를 '어쩔 수 없는 놈'이라고, '소심한 인간'이라고 책망했었지. 그러나 지금은 불안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물론 아직도 이해 못 하는 사람이 더 많을거야.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은 단순히 한 지붕 밑에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전부 드러내 보이는 것을 의미하니까. 두렵고 불안한 게 당연해. 하지만 그래도 같이 있고 싶어. 따로따로 헤어지는 게 휠씬 두렵고 더 괴로우니까.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단 둘이서 생활하는 건 물론 두려운 일이야. 하지만 우리는 두려움이 어떤 건지 이미 알고 있어. 그러니까 모든 걸 준비해둘 수 있을 거야. 힘들 땐 언제든지 도움을 청할 수도 있어. 원장님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둘이지만 그렇다고 단둘밖에 없는 건 아니야."-189쪽

함께 살면서 그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평범한 하루하루 속에서 진심으로 절실하게 그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는지 다시 생각해보면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그를 사랑했느냐고 묻는다면, 가슴을 펴고 자신 있게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그와 보낸 하루하루가 진정 사랑으로 충만했느냐고 묻는다면……자신이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애매할 뿐 아니라, 스스로가 아무리 사랑이라 믿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정한 사랑인지 어떤지는 항상 의심이 따르게 마련이니까요.-304쪽

……만일 내가 이대로 죽는다면, 나는 누구를 생각해야 할까? 특별히 부모님을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부모님을 생각해도 좋지만…… 만에 하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 역시 그 사람을 생각하고 싶다. 혼자 된 사람은 무척이나 마음이 아프겠지만……-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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