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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유괴
덴도 신 지음, 김미령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설정이 흥미롭다. 3인조 유괴단에 유괴당한 할머니가 도리어 유괴단을 진두지휘한다는 좌충우돌 스토리. 시쳇말로 설정에서 반쯤 먹고 들어간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런 설정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치밀한 장치가 있어야 한다. 일단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 해보자.
초반부는 할머니와 유괴단에 대한 기초 설명이 이어진다. 할머니의 이름은 '야나가와 도시'(이하 '여사')로 기슈지방 최고 갑부이며 올해 여든둘이다.(p.8참조) 여사는 집안의 최고 어른으로 후덕한 씀씀이로 주변의 칭송을 받고 있다. 유괴단은 '무지개 동자'라고 알려졌는데, 이들은 오사카 형무소 잡범실에서 만난 전과자 출신이다.(p.15) 총 세명으로 이름은 도나마 겐지, 아키바 마사요시, 미야케 헤이타. 이제부터 무지개 동자의 납치극이 시작된다.
여사는 아버지가 심어둔 이리사와의 삼나무를 보러간다며 갑작스레 산행을 결정하고, 무지개 동자는 치밀한 준비끝에 거사(?)를 감행한다. 여사앞에 모습을 드러낸 무지개 동자들. 당시 여사는 비서격인 '기미'라는 처자와 함께였는데, 침착한 설득으로 기미는 풀려나게 된다.(p.75이하) 결정적인 목격자를 놓아주는 모습은 이들의 행각이 어떻게 이어질지 엿볼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
사실, 유괴당한 여사가 도리어 유괴단을 진두지휘 하는 설정은, 필연적으로 등장인물의 성격을 결정 짓는다. 유괴범들이 어리숙하고 순박하며, 뿌리부터 악질적인 인간이 아니여야 한다. 또한 여사는 강한 심지에 비범한 두뇌를 가져야 한다. 이러하지 않으면, 돈 많은 여사 납치 -> 함께 있던 기미 살해 -> 감시의 어려움으로 여사 살해 -> 뻔뻔스럽게 돈 요구 등으로 현실적인 사건진행이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래가지고 소설이 되겠는가? 범죄보고서가 아니지 않는가?
저자는 여사의 계획을 위해, 주변인물들(무지개 동자, 미스 구)을 바보같은 순박함으로 무장시킨다. 미스 구는 무지개 동자가 여사의 수행원이며, 여사가 어떤 연극같은 걸 하고 있다고 여긴다. 여사의 말이라면 뭐든 믿는 광신도 미스 구. 그녀는 여사가 무지개 동자를 천둥돌이, 바람돌이, 비돌이라고 소개하자 이렇게 말한다. "천둥에 바람에 비라? 진짜 닌자 이름 같네. 이봐, 자기소개로 닌자처럼 한 사람씩 재주를 보여주면 어때?"(p.121) 또한 옆집 처녀 구니코와 함께 벼 베러가는 마사요시의 모습(p.135) 정말 못 말린다^^
무지개 동자들은 여사와 정신적 유대를 쌓아가는데, 몸값이야기는 하나의 전기가 된다. 무지개 동자가 생각한 몸값은 5천만엔. 하지만 이를 전해들은 여사는 분노한다. "자네, 날 뭘로 보는 건가? 내가 비록 이렇게 늙고 힘이 빠지긴 했어도 야나가와 집안의 주인인데, 그렇게 얕보면 곤란하지. 난 그런 싸구려가 아니야."(p.143) 그러고는 100억엔의 몸값을 제시한다. 인질이 도리어 많은 몸값을 주장하는 상황. 이 사건을 기점으로 협상을 포함한 일체는 사실상 여사가 주도한다. 수사본부에 보내지는 무지개 동자의 편지(p.183, p.291)는 너무나 치밀해서 도저히 무지개 동자의 머리속에서 나왔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여사가 주도했다고 보면 이해 가능하다.
왜 여사가 유괴범들을 돕는지 의문일 수도 있다. 심지어 무지개 동자의 리더 겐지는 대놓고 묻는다. "왜 우리를 돕는거죠?"(p.242) 이어지는 여사의 설명은 왜 여사가 저런 행동을 하는지 충분한 답이 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굳이 여사의 설명이 없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 80가까이 일상적인 삶을 살아온 여사에게 갑자기 닥친 사건은 숨겨진 욕망을 분출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마지막 결말도 괜찮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벼 베다 눈맞은 마사요시와 구니코도 귀엽다. 사건의 내막을 어느 정도 간파한 이카리의 반응은 의외였는데, 법률적으로 여사의 행동에 가벌성이 있는지 소설을 넘어 하나의 궁금증으로 남았다. 독특한 설정과 흥미로운 캐릭터. 여사와 어리버리 유괴단의 폭소행각. 읽어보시길.
* 이 작품은 1978년작이다. 근 30여년 전 작품. 하지만 오래전 작품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 일본 추리작가협회 상 수상작에 20세기 걸작 미스터리 1위라는데, 의아하다. 분명 괜찮은 작품이지만, 저 정도 포스는 아니다. 화차며, 망량의 상자까지 죄다 제치고 1위를 하다니...일본 문학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까지 고려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