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위태로우니 이러한 때에는 안으로는 자강을 꾀하고, 밖으로는 기미羈靡하여 한결같이 고려가 했던 것처럼 해야만 나라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래 우리 나라의 인심을 보면 안으로는 일을 분변하지 못하면서 밖으로 큰소리만 친다. 시험삼아 조정 신료들이 의견을 모은 것을 보면, 장수들이 말한 것은 전부 압록강변에 나아가 결전해야 한다는 것이니 그 뜻은 참으로 가상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무사들은 무슨 연고로 서쪽 변방을 '죽을 곳'으로 여겨 부임하기를 두려워하는가? 생각이 한참 미치지 못하고 한갓 헛소리들 뿐이다. 강홍립이 보내온 편지를 보는 것이 무슨 방해될 일이 있는가? 이것이 과연 적과 화친을 하자는 뜻이겠는가? 우리 나라 사람은 허풍 때문에 끝내 나라를 망칠 것이다.-23쪽
이나바가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했던 것이 무었을 의미 하는지는 곧 드러난다. 이미 거의 망해가고 있었으며 부패가 극에 이르렀던 명이 후금(뒷날의 청)을 치는 데 필요한 원병을 보내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광해군의 행위를 불가피한 것이라고 칭찬한 것은 광해군의 대외정책의 '탁월성'을 한국사의 전개과정 속에서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와 한 묶음인 만주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부각시키는 것이 된다. 이나바가 광해군을 '띄었던'것은 한국사의 자주성을 부인하는 만선사관의 틀 속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31쪽
선조가 왕자들 앞에 여러 가지 물건들을 늘어놓고 마음대로 고르게 하니 왕자들이 다투어 보물을 골랐는데 유독 광해군만은 붓과 먹을 집었다. 선조가 이상하게 여겼다.-36쪽
선조가 여러 왕자들에게 "반찬감 가운데 무엇이 으뜸이냐?"라고 묻자 광해는 "소금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조가 다시 그 까닭을 묻자 광해는 "소금이 아니면 백 가지 맛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선조가 다시 "네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광해는 "모친이 일찍 돌아가신 것이 마음에 걸릴 뿐입니다"라고 했다. 광해가 세자가 된 것은 순전히 이 말에 힘입은 것이었다.-37쪽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했던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조선군은 수적으로도 열세인데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일본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일본군은 한마디로 '준비된 군대'였다. 지휘관들은 대부분 전국시대를 거치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이었고 병사들은 새로운 무기인 조총을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오랫동안 조선 내정을 주시하면서 조선을 연구했다. 거기에 더하여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조선에 드나들었던 대마도 출신 상인들이 통역으로 참전했다. 그들은 조선말을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영남에서 서울까지의 지리에 대해서도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러니 전쟁 초반의 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45쪽
6월 15일에 선왕께서 요동으로 건너가려 계획하고 종사의 신주를 전하(광해군)께 부탁하고는 신하 약간 명을 거느리고 박천에 머무르고 계셨습니다. 이때 전하께서는 신주를 모시고 험난한 길로 희천을 지나 장동에 머무르다 원흥을 지나 평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산길이 험준하여 100리 길에 사람 하나 없었는데, 나무를 베어 땅에 박고 풀을 얹어 지붕을 만들어 노숙하였습니다. ... 험난한 산천을 지나느라 하루도 편안히 지내지 못하면서 7일에 이천에 머무르며 이튿날 7로七路에 격문을 보내 여러 성의 사람들을 불러 적을 토벌하고 국가를 회복하는 의리로 깨우쳤습니다. 격문이 닿는 곳마다 인심이 분발하여 고을의 백성들을 모아 의병으로 봉기했습니다. 이리저리 흩어져 다니던 사대부들도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끌며 끊이지 않고 모여들어 어느 정도 조정의 모양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국세가 회복되고 종사가 다시 안전하게 될 수 있던 것은 곧 이천伊川으로 거둥한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 (이어짐)-53,54쪽
그로부터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길을 떠났던 사람들은 산길을 통해 도착하고,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길을 떠났던 사람들은 바닷길을 통해 도착하여, 조정의 명령이 사방으로 전달되어 원근에 사는 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귀향하게 됨으로써 중흥의 기틀을 이룩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누구의 공입니까?-53,54쪽
조선이 일본에 완전히 넘어가면 요동이 위험해진다. 요동이 떨어지면 천진이 위협받고 궁극에는 북경마저 안심할 수 없다. 결국 조선은 요동의 '울타리'이자 일본군이 중원으로 건너오는 '다리'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조선을 지켜야만 한다.-58쪽
명은 결국 원병을 다시 보내기로 했다. 요동을 지키는 울타리로서 조선의 전략적 중요성을 새삼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요동이 명에게 '이齒'라면 조선은 '입술脣'이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이다. '순망치한脣亡齒寒'. 그것이야말로 명군이 조선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던 진짜 이유인 것이다.-59쪽
산림은 산림처사, 산림숙덕의 줄임말이다. 재야에 머물면서 오랫동안 학문과 덕행을 닦아 일세를 풍미할 정도의 명망과 경륜을 지녔으되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기를 구하지도, 벼슬을 탐하지도 않는 선비를 가리킨다. 입신과 영달을 추구하는 과거 시험 따위는 참으로 하찮게 생각한다. 국왕이 웬만큼 정성을 다해 간곡하게 부르지 않으면 조정에 나아가지도 않는다. 설사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조정의 분위기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과 거리가 멀다고 여겨지면 주저 없이 사표를 던진다. 더욱이 국왕의 행태가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을 경우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와 같은 면면들이 산림으로 대접받기 위한 '필요 조건'이었다.-88쪽
1543년 오키나와 근처의 종자도種子島란 섬에 표류했던 포르투갈 선원들은 일본인들에게 조총을 전해준다. 일본말로 '뎃포鐵砲'라 불렸던 조총은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에게 새로운 무기로 받아들여졌고 그들의 세력 판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뎃포를 보유하고 있는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사이에는 군사적 우열관계가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어원도 모르는 채 사용하고 있는 '무뎃포無鐵砲'란 말도 여기서 연유한 것이다. '뎃포도 없는 집단이 뎃포를 가진 집단에게 겁 없이 덤비는 것'. 그것이 바로 '무뎃포'다.-162쪽
바람 불어 빗발 날릴 제 성 앞을 지나니 장독 기운 백 척 누각에 자욱하게 이는구나 창해의 성난 파도 저녁에 들이치고 푸른 산의 슬픈 빛은 가을 기운 띠고 있네 가고픈 마음에 봄 풀을 실컷 보았고 나그네 꿈은 제주에서 자주 깨었네 서울의 친지는 생사 소식조차 끊어지고 안개 낀 강 위의 외로운 배에 누웠네-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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