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하나의 빛인 동시에 걷고 있는 한 여자의 뒷모습이었다. 내가 여자와 빛을 잘못 본 것은 아니다. 내 눈에는 번화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나 자동차, 가게 간판 중에서 단지 한 사람, 그 여자만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20쪽
"연애라. 여자에게 말을 걸고, 영화나 유원지 같은 곳에 간 다음은 호텔......그뿐이지 않나......핑계일 뿐이야, 핑계! 여자랑 하고 싶다는 이기심, 슬픈 핑계라."
"여자 냄새를 맡고......불알이 불록해지면서, 하고 싶다고 결정하고 나서 연애라는 말을 꺼내는 거야......타인의 형편 따윈 생각하지도 않고......"
"뭐가 운명적인 사람이야? 듣는 것도 질렸어......너희들 행동 반경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고르는 것뿐이잖아. 그렇지 않다면 티베트 사람과 연애를 해봐. 할 수 없을걸......"-149쪽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이런 짓을 함으로써, 이런 곳까지 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깨달은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아직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싶은 겁니다. 사랑이 무었인지 잘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고 싶은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은 사장이나 다른 누구보다, 코끼리보다도 더 강합니다. 제가 바보같은 짓을 하루 종일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304쪽
"모리스 라벨은 군대에 지원했지만 병사가 되진 않았어. 자동차 호송대에서 트럭 운전을 했었지. 1916년 어느 날 밤, 그는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트럭 운전을 하고 있었어. 무서운 굉음과 포성이 들리는 가운데 인류 최고의 음악가는 애국심만을 의지한 채 핸들을 잡고 있었던 것이지. 그런데 갑자기 모든 소리가 멈춰버렸다. 전장의 중심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지. 날이 밝아오고 있을 때였어. 그런 완벽한 침묵 속에 한 마리 새가 지저귀기 시작한 거야. 대단히 섬세한 귀와 감성을 지닌 자에게 있어서 이 경험은 실로 인상적인 사건이었다는 걸, 자네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실제로 그것은 충격적인 체험, 하늘의 계시와 같은 순간이었지. 사람 목숨을 날려버리고, 우리의 기억을 담당하던 건조물이 파괴되는 지옥과 같은 때에 마치 신의 사자가 너희들을 살려둔 것은 너희들이 선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러 왔던 것처럼......(이어짐)-333,334쪽
내 가치관으로는 군대는 폭력단 같아 보이지만, 그보다 품격이 있는 인상을 라벨을 받았던 거지. 전쟁이 끝나면 이 이미지를 음악으로 만들어보자. 타이들은 <무관심한 산새>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지. 하지만 라벨의 작품 가운데 <무관심한 산새>라는 타이틀을 가진 곡은 없어.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감명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 곡을 만들지 않았던 거지. 왜 그랬는지 알겠나?"
"열기가 식은 거야. 전쟁에서 돌아와서 자신의 피아노 앞에 앉았을 때는 이미 생지옥도 없어지고, 신의 손에 닿았던 것 같은 감동도 사라져버린 거지. 그것이 바로 평화라는 것이야. 세로토닌과 같지. 처음에는 감정이 아주 열렬해지지 때문에 혈액과 세로토닌을 감소시키지만, 나중에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감동이 사라지는 거야. 인간은 감동 속에서 계속 살 수는 없어. 그러니까 자네도 지금은 이제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정직하게 고백할 필요는 없어. 단지 감동이 사라져도, 감동했던 기억은 남는다. 자네가 언제까지 그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을지, 그건 나도 몰라."-333,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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